[#177, 비평연습 특집] 신(神)이 될 수 없는 신(身)의 초월에 관하여(이연화)

관리자
2022-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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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神)이 될 수 없는 신(身)의 초월에 관하여

 


이연화

 

 

히에로스 가모스에 대한 혐오?


가부장제를 위협하지 않는 남성 간의 성행위에 대해 레위기 저자들이 보여주는 과잉된 혐오는 그 텍스트로만 해석이 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 김진호 목사는 그 당시 행해지던 히에로스 가모스(풍요를 바라는 팔레스틴지방의 남신과 여신의 결합의식)가 여성사제를 배제로 인하여 남성 사제들끼리의 성행위로 전환되었고, 이에 대해 에스라개혁을 주도하던 예루살렘 귀환공동체가 남성끼리의 성관계는 망측한 짓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원주민이었던 유대공동체를 정치적으로 공격하는 수단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남성 간의 성행위 금지는 유대 지역장악을 위한 정치적 공격이었을 뿐, 동성애를 금지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여성을 대체하는 남성 사제가 소년이 선택되었을 가능성을 열어두고, 이 레위기의 텍스트는 나이든 남성과 어린 소년 간의 위계에 의한 폭력적 성관계에 대한 비판으로 읽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한발 더 나아간다.


하지만, 배제의 정치로 혐오를 표출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던, 레위기의 저자들이 법적 주체로서도 인정받지 못했던 미성년자를 위한 인권의식이 있었으리 만무하다. 또한, 현대적인 관점에서의 인권을 이 당시 텍스트의 저자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성서를 역사적·사회적으로 비평하는 관점에서 논리적으로 일관성을 갖지 못한다.

 


계륵(鷄肋)이 된 경전(經典)의 폭력


성경이 아닌 성서로 읽어나간다는 의미는, 그 텍스트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는 신의 말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사실상, 동성애의 문제는 이 사실만 받아들이면 논리적 모순이 없게 된다. ‘아 그 당시 그 텍스트의 저자들은 동성애를 혐오했었구나’로 받아들이면 되는 일이다. 하지만, 여전히도 성경을 통해서 신의 뜻을 살피려는 신앙을 가진 사람 중 동성애의 성적 지향성을 가진 사람에게 레위기의 텍스트는 일종의 형벌이다. 또한, 이 텍스트는 배제의 정치, 폭력을 가하는 이들에게 소수자인 동성애자들을 모욕하고 배척하는 근거가 된다. 신의 저주가 아니라고, 그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성서학자들은 여전히도 성경과 성서 사이에서 씨름하고 있다. 나는 성서학자도 아닐뿐더러, 성경이 아닌 성서로 읽어가는 사람이기에 내적갈등을 잠시 접어두고 다시금 남성 간의 성행위에 대한 레위기의 혐오, 그 강렬한 감정에 대해 분석해보려 한다.

 


혐오라는 감정의 본질 - 인간의 동물성에 대한 역겨움


마사 누스바움은 이성뿐만 아니라 감정도 판단의 기초가 될 수 있다고 논증해왔고, 인간의 감정 중에서 동정, 연민, 사랑 등의 감정을 교육을 통해 고양함으로써, 우리의 정치적 공동체의 역량을 키워낼 수 있다고 논증해왔다. 그런 논증 과정에서 발표한 책이 혐오와 수치심이라는 책인데, 이 책에서 혐오와 수치심은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으로, 이러한 감정들을 근절할 수는 없을지라도 혐오와 수치심이 입법 과정과 사법과정에서 작동할 경우, 우리의 정치공동체에 위험을 초래할 수 있기에 이러한 감정이 판단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마사 누스바움이 혐오라는 감정에 대해 분석한 방법으로 레위기를 살펴보자.


마사 누스바움은 혐오를 역겨운 대상의 (입을 통한) 체내화 가능성에 대한 불쾌감(입안에 있는 침은 불쾌하지 않으나, 뱉어진 침을 다시 먹으려고 할 때는 역겨움)으로 정의하는데, 인간의 배설물(콧물, 정액 포함. 인간의 눈물만큼은 예외, 눈물은 동물이 아닌 인간이 인간다움을 보이는 부산물) 및 시체(부패함) 등 혐오의 초점은 동물성(動物性)에 있다고 보았다.


그의 시각에서 레위기 전체를 읽다 보면, 인간의 몸의 부산물에 대해 역겨움과 그를 처리하는 두려움으로 가득하다. 여성의 월경피, 여성의 출산 부산물, 악성 피부병, 남성 성기의 고름, 남자의 정액, 피, 시체 등, 육체를 가진 인간의 부산물은 모두 부정하며, 이를 깨끗하기 위한 속죄제사를 규정하고 있다. 모든 문화권에서 인간 존엄의 본질적인 표식 배설물을 씻어내거나 처리하는 능력이라는 그의 결론을 위하여 레위기보다 더 좋은 텍스트는 없을 것이다.


그 흐름에서 레위기 18장 20장은 클라이맥스다. 동물들의 교미에 근친상간 금지가 존재하는가? 가부장 제도의 내면화 이전에, 근친상간에 대한 혐오는 이렇게 읽을 수 있다. 우리는 동물(動物)이 아니다. 그러니, 네 어미, 네 딸, 네 자매, 네 며느리, 네 형제의 아내는 절대로 건들지 마라. 남성의 정액이 여성의 자궁이 아닌 땅에 떨어지는 것은 부정하고 악한 짓인데 하물며 배설물과 정액이 섞이는 남성 간의 성행위야 레위기 저자들에겐 견딜 수 없는 역겨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는 수간(獸姦)과 다름없는 평가를 받는 행위였다.


그런 행위를 하면 최종적으로 신은 그들을 토해낼 것(vomit you out)이라고 경고하는데, 그 표현 역시 토사물을 뱉어내는 배설행위인 점을 보면, 레위기의 저자들은 동물과 경계가 무너지는 것에 대한 광기(狂氣)를 보여주고 있다.


 

신(神)과 신(身)의 공존의 가능성


인간의 동물성에 대한 혐오는 레위기에서만 보이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 표출하는 방식과 해결방식은 문화에 따라 달랐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육체가 퇴화하거나 폐기물이 되어가는 과정 즉 그러한 삶의 필연성(必然性)의 환멸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자유로운 시민에게 필연적인 것은 노예적이었고, 고대 그리스에서의 노예제도는 값싼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거나 이윤착취의 수단이 아닌 필연성에서 벗어나기 위한 필요악(必要惡)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그리스에서는 동물성-신(身)을 유지한 채 신(神)이 될 수 있었다. 바로 정치 행위를 통해서였다.

 


행위를 하는 인간 – 말과 행위를 통한 초월


한나 아렌트에게 있어 세계(世界)는 사람과 사람 사이(人間)에 있다. 즉 세계는 다수(多數)의 사람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인간관계들의 그물망은 말과 행위에 의한다.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그의 인격은 그가 말하고 행위를 하는 모든 것을 통해 드러나며, 말과 행위의 계시적 성질은 타인과 함께 존재하는 곳에서, 순수히 함께함에서 나타난다.”는 아렌트의 말은 우리를 구원(救援)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 그 둘이 이성이건, 동성이건, 내 앞에 존재하는 너는 나에게 말을 걸고, 나는 너에게 말한다. 응시, 미묘한 표정, 숨소리, 만짐, 육체가 보여주는 비언어적 행위는 말과 더불어 너와 나의 유일한 세계를 만들어낸다. 창세기의 야훼가 말(logos)을 통해 우주를 창조하듯, 말(logos)이 육체(肉體)가 되어 임마누엘 하듯이 사람은 말과 행위를 통해 신(神)으로 초월(超越)한다. 비록 정치라는 공론의 장이 지금은 직업의 영역이 되었지만, 여전히도 정치인들의 “말”과 “행위”가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변함없다.

 


욥의 비극에서 보이는 카타르시스


한나 아렌트에 의하면 연극은 그리스어 동사인 행위하다(drama)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말과 행위를 통해 인간의 무상함을 치유했던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왜 비극이 중요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성서의 텍스트 중에서 연극 대본의 양식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욥기다. 욥기는 대부분 오로지 욥과 세친구들의 “말”로만 이뤄져 있다. 나는 욥의 비극은 그리스비극과는 그 결이 다르고,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에게 색다른 카타르시스를 준다 생각한다. 그리스의 비극이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에 대해 깊은 동정을 갖게 하는 반면, 욥의 비극은 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고통을 보여줘서 연민을 갖게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욥기가 쓰여진 시대에는 질병, 가난, 재난 등 인간사에서 벌어지는 고통은 모두 신의 형벌로 여겨졌는데, 그 원인은 인간이 신의 뜻에 따라 살지 않은, 즉 죄가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신이라는 내러티브가 없었다면, 욥은 덜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욥은 자신의 고통의 원인을 알려달라고 신에게 매달린다. 게다가 욥기에서 그려내는 신은 사탄과 내기를 위해 욥에게 고통을 주는 잔혹한 신이다. 그래놓고는, 인간이 신의 뜻을 알게 하려고 고통을 준다는 말도 안 되는 궤변으로 결론을 내린다.


 

욥의 비극으로 레위기를 치유하다?


“가죽은 가죽으로 대신할 수 있다.” 사탄이 욥의 육체를 건들지 않았다면, 욥은 절대 신을 원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욥의 발바닥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악성 종기가 났고, 욥의 몸은 온통 구더기와 먼지로 뒤덮였다. 가려워서 옹기 조각을 가지고 자기 몸을 긁어댔기에 피부는 아물었다가도 터져버렸다. 깊은 잠이라도 들어 고통을 경감시키려 해도, 악몽으로 잠에서 깨기를 반복하니, 욥은 신이 자기를 화살의 과녁으로 삼아 자기를 쉴 새 없이 공격한다고 두려워한다. 아예 태어나지 말았으면,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런 고통을 받지 않았을 텐데 욥은 육체의 고통을 통해 인간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레위기의 시선으로 보자면, 욥의 악성 종기는 혐오스러운 것이며, 부정한 것이다. 신의 형벌을 받은 자, 신에게서 버림을 받은 자가 되었다. 종에게 애걸하는 신세고, 아내조차 욥이 숨 쉬는 것을 싫어하며, 친형제들도 욥을 역겨워한다. 어린것들도 무시하고, 구박하며, 친한 친구는 빨리 죄를 고백하고 신에게 용서를 구하라고 닦달한다. 그는 완전한 동물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이 어떻게 레위기를 치유할 수 있을까?

 


욥을 인정하기 – 인간, 그 육체를 받아들이기


아마 욥의 세친구들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욥은 묵묵히 그 육체 고통을 견뎌냈을 것이다. 그가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세친구들이 자기를 바라보는 시선, 비탄에 찬 행위였다. 나를 동물로 바라보는 세친구들의 시선. 혐오스러워하는 눈빛. 지금의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 주지 않는 그들의 매정함. 그리고 자기들의 잣대로 욥의 과거와 기억, 욥의 모든 정체성을 찢어버리지만 않았다면, 욥은 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사람은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사실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더욱이 내가 사회에서 암묵적인 규칙에 어긋나있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두려워하고, 말할 수 없는 깊은 소외감을 느낀다. 나를 비정상으로 간주하고 교정되어야 할 표적이 되는 순간, 그는 자기를 혐오하게 된다.


자기 자신을 혐오하게 되는 순간, 자신의 존재가 수치 되는 그 순간,

그는 생의 에너지를 잃고 만다.

나도 나 자신을 잘 모르겠고, 다만 산다는 것이 싫을 뿐이다 외치는 욥.

제발 그 몸을 인정하자. 그를 인정하자.

덧없이 쇠하여져 언젠가는 사라질 우리의 몸이 어떤 모양인들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렇다.

다만 내가 깨달은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을 평범하고 단순하게 만드셨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복잡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1) 감정에 대한 마사 누스바움의 논증이 선행되어야 하나, 그 작업은 레위기 텍스트를 읽기 전에 선행되었어야 하므로 잠깐 언급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감정은 인간의 경험(육체적 욕구 및 짜증 등의 기분과는 다름)이고, 어떤 대상에 대한 믿음이다. 사람은 특정한 대상(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에만 가치를 부여-감정이 일어남-하고, 그런 감정은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사회적 판단으로, 생에 초기에 형성되면 변화가 어렵다. 

2) 인간의 육체성에 대한 더러움을 깨끗하게 하려고 동물의 육체를 희생하는 제사의 아이러니함은 잠시 논외로 하자. 

3) 가 - 야곱의 아들 유다의 둘째 아들이, 형수 다말에게 정액을 주지 않고 땅에 떨어뜨렸을 때 야훼가 악하다고 죽임(창세기 38장 9절).  

나 - 남자가 정액을 흘리면 온몸을 씻어야 한다. 정액이 묻은 옷이나 가죽은 모두 물로 빨아야 한다, 남자가 여자와 동침하다가 정액을 쏟으면 두 사람이 다 물로 목욕해야 한다(레위기 15장 16절).….

4) 너희가 그 땅을 더럽히면 너희보다 앞서 그 땅에서 살던 민족을 그 땅이 토해냈듯이 너희를 토해낼 것이다(레위기 18장 24~28, 20장 22절) 

5)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노동” p.151 : 인간 신체를 포함한 모든 생명 유기체의 운동도, 자신의 존재에 침투하여 살아있게 하는 과정에 그것이 저항할 수 있는 한 순환적이다. 삶은 과정이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에는 작고 개별적이고 주기적인 생명과정이 결과물은 죽은 물질이 거대한 자연의 순환 속으로 되돌아간다.…. 

6)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행위” p.240 

7) 전도서 7장 29절 표준 새 번역개정판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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