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무, 「양심과 법」, 『월간중앙』, 중앙일보사, 1972년 12월 호.

우리는 어떤 부당한 일을 당하거나 들었을 때 그 반응으로 ‘이럴 수가 있나!’가 아니면 ‘이런 법이 있나’라는 말을 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 탄사는 별 구별 없이 하는 것이나 실은 근원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는 듯하다. ‘이럴 수가 있나’고 할 때는 인간관과 그것을 이루는 어떤 원칙적인 것을 전제라 하고 사람이 그럴 수는 없다는 포괄적인 뜻이며, 둘째 경우는 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비판하는 말이다. 하나는 양심에까지 육박하고 다른 하나는 질서의 영역에 머문다. 그런데 이 ‘수’가 ‘법’으로 이동된 데 인류사회가 변질되고 인간이 불행해진 전환점이 있는 듯하다.
법 형성의 역사를 보면 관습들이 국가 형태를 통해 공법으로 공포될 때부터 법은 현실과 유리된 그 스스로의 힘으로 됐다. 관습률은 불문율이다. 그렇기 때문에 추상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것은 함께 살면서 형성된, 삶 전체를 포괄한 보편성이 있다. 그것은 언어로 표현되지 않은 부분까지 포함해서 사람에게 아주 자명한 것으로 군림한다. 그래서 그것은 이른바 양심의 소리가 가장 가깝다. 물론 양심도 달라진다. 그러나 그 변동은 역사적 삶과 함께 달라지는 것이기에 삶과의 거리는 그대로 밀착된다. 그런데 그것이 공법으로 공포되는 날부터 삶의 현실과 유리되며 독립된 법률의 현실이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점차 삶의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고 가능한 것을 죄로 규탄할 수 있게 됐다. 이것은 양심에서 법에의 이동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하려고 할 때 양심 따위는 자문의 대상도 안되고 합법적인가만 묻게 됐다. 그런데 합법적이란 법대로 한다는 것보다도 법만 피하면 된다는 데로 운용되기 시작함으로부터 마침내 양심과 정면 충돌을 불사하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된다. ‘합법적이면 된다’는 이런 풍조는 양심도, 그리고 인간도 소외시키고 만다.
이런 생각은 법철학 연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주변에서 당하고 보는 데서 저절로 반성한 생각이다. 까닭은 우리 주변에 양심 따위는 이미 팔아먹은 지 오래면서도 떳떳하게 자기 하는 일을 권리처럼 휘두르는 인간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목적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가리지 않는다. 아니 단 하나 피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법망이다. 이런 것들과 마주선 이른바 양심파는 번번이 지게 마련이다. 양심을 보장하거나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것은 없고 법만 보장하는 권력만이 있은 그럴 수밖에 없다.
법으로 다스리는 법정은 있어도 양심을 물을 수 있는 법정이 없는 게 오늘의 비극이다. 누가 오늘날 나는 양심적으로 부끄럽지 않다고 해서 그 소리를 소중히 여길 것이며 반면에 법망을 잘 피한 사람을 규탄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결국 내버려진 양심은 오물만큼이나 늘어나고 눈치 빠르게 법만 피하면서 실리를 추구하는 실리파들이 압도해만 간다. 그래서 ‘이럴 수 있나’라는 탄사는 설자리가 없고 ‘이런 법이 있나’만이 말 값을 하게 된다.
나는 얼마 전에 어떤 사람의 하는 짓이 하도 견딜 수 없어서 나와 직접 상관은 없으나 충고라도 해줄 생각으로 옷을 갈아입고 나섰는데 중도에 되돌아오고 말았다. 나는 가면서 그에게 무슨 말을 할까 생각해 보았다. ‘양심에 손을 얹고 반성하시오,’ ‘하나님이 무섭지 않소,’ ‘사람이 그럴 수 있소.’ ‘민족 앞에 부끄럽지 않소,’ ‘나는 당신을 아껴서 하는 말이요’ 아니면 ‘당신은 그대로 가다가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라고 할까? 그런데 그 어느 것도 그에게 걸릴 수 있는 것은 못된다고 생각됐다. 그는 이미 양심 따위는 다 버리고 파렴치를 냉수 마시듯 하는 판인데 이런 말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단지 그를 놀라게 하려면 ‘그대로 하면 고발하겠소’라든지 아니면 주먹질이라도 하는 것뿐인데 그가 법적으로 어떻게 처리하고 있을 게 분명할뿐더러 고발할 위치에는 있지 않고 그렇다고 주먹파도 못되고 보니 결국 가던 길을 그만두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성서의 창세기 설화에서 신이 ‘아담 인간’에게 모든 것에 대한 자유를 주면서도 ‘이것만은’ 손대지 말라는 것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중요한 뜻을 영원히 말하는 것 같다.
사람의 사회는 ‘이것만은 안 되’하는 게 있을 때 비로소 정치도 법도 경제도 의미가 있지 그것이 없어지면 그 순간부터 수라장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만은 안 되’란 법이나 권력이나 또 어떤 다른 압력이 있기 이전에 각기 직접 마주선 지성소다. 이것은 종교적으로는 ‘터부’로 나타났는데 이것은 바로 자기를 잃느냐 사느냐를 결정하는 절대다. 이것이 문화화되어 가치관, 정통, 양심 등으로 지속되어 왔다. 그런데 그 원수의 실리주의가 이런 것들을 다 깨버리고 그것이 어떤 다른 형태로든지 재 구현할 것을 가로막아 버렸던 것이다.
우리 전통사회를 송두리째 깨뜨리고 입수한 것이 이 실리주의밖에 없으니 부정부패, 퇴폐풍조 따위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인 것이다.
‘이것만은 안 되’가 유효하려면 ‘두려움’의 대상이 있어야 한다. ‘이럴 수 없다’고 할 때는 벌써 이론이나 이득의 영역을 넘어선 어떤 ‘절대’를 전제하는 것이다. 그것이 양심을 묻고 궁극적인 명령을 한다. 그런데 우리 교육에 이런 것을 묻는 과정이 있는가?
이것을 담당한 것이 종교다. 종교의 궁극성은 사람을 ‘절대’ 앞에 세우고 묻고 대답하게 한다. 여기 우리 나라의 종교에 기대를 걸어야 할 것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한국의 종교가 살아있지 못하다는 말도 된다.
출처 : 심원 안병무 아키브
안병무, 「양심과 법」, 『월간중앙』, 중앙일보사, 1972년 12월 호.
우리는 어떤 부당한 일을 당하거나 들었을 때 그 반응으로 ‘이럴 수가 있나!’가 아니면 ‘이런 법이 있나’라는 말을 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 탄사는 별 구별 없이 하는 것이나 실은 근원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는 듯하다. ‘이럴 수가 있나’고 할 때는 인간관과 그것을 이루는 어떤 원칙적인 것을 전제라 하고 사람이 그럴 수는 없다는 포괄적인 뜻이며, 둘째 경우는 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비판하는 말이다. 하나는 양심에까지 육박하고 다른 하나는 질서의 영역에 머문다. 그런데 이 ‘수’가 ‘법’으로 이동된 데 인류사회가 변질되고 인간이 불행해진 전환점이 있는 듯하다.
법 형성의 역사를 보면 관습들이 국가 형태를 통해 공법으로 공포될 때부터 법은 현실과 유리된 그 스스로의 힘으로 됐다. 관습률은 불문율이다. 그렇기 때문에 추상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것은 함께 살면서 형성된, 삶 전체를 포괄한 보편성이 있다. 그것은 언어로 표현되지 않은 부분까지 포함해서 사람에게 아주 자명한 것으로 군림한다. 그래서 그것은 이른바 양심의 소리가 가장 가깝다. 물론 양심도 달라진다. 그러나 그 변동은 역사적 삶과 함께 달라지는 것이기에 삶과의 거리는 그대로 밀착된다. 그런데 그것이 공법으로 공포되는 날부터 삶의 현실과 유리되며 독립된 법률의 현실이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점차 삶의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고 가능한 것을 죄로 규탄할 수 있게 됐다. 이것은 양심에서 법에의 이동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하려고 할 때 양심 따위는 자문의 대상도 안되고 합법적인가만 묻게 됐다. 그런데 합법적이란 법대로 한다는 것보다도 법만 피하면 된다는 데로 운용되기 시작함으로부터 마침내 양심과 정면 충돌을 불사하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된다. ‘합법적이면 된다’는 이런 풍조는 양심도, 그리고 인간도 소외시키고 만다.
이런 생각은 법철학 연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주변에서 당하고 보는 데서 저절로 반성한 생각이다. 까닭은 우리 주변에 양심 따위는 이미 팔아먹은 지 오래면서도 떳떳하게 자기 하는 일을 권리처럼 휘두르는 인간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목적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가리지 않는다. 아니 단 하나 피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법망이다. 이런 것들과 마주선 이른바 양심파는 번번이 지게 마련이다. 양심을 보장하거나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것은 없고 법만 보장하는 권력만이 있은 그럴 수밖에 없다.
법으로 다스리는 법정은 있어도 양심을 물을 수 있는 법정이 없는 게 오늘의 비극이다. 누가 오늘날 나는 양심적으로 부끄럽지 않다고 해서 그 소리를 소중히 여길 것이며 반면에 법망을 잘 피한 사람을 규탄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결국 내버려진 양심은 오물만큼이나 늘어나고 눈치 빠르게 법만 피하면서 실리를 추구하는 실리파들이 압도해만 간다. 그래서 ‘이럴 수 있나’라는 탄사는 설자리가 없고 ‘이런 법이 있나’만이 말 값을 하게 된다.
나는 얼마 전에 어떤 사람의 하는 짓이 하도 견딜 수 없어서 나와 직접 상관은 없으나 충고라도 해줄 생각으로 옷을 갈아입고 나섰는데 중도에 되돌아오고 말았다. 나는 가면서 그에게 무슨 말을 할까 생각해 보았다. ‘양심에 손을 얹고 반성하시오,’ ‘하나님이 무섭지 않소,’ ‘사람이 그럴 수 있소.’ ‘민족 앞에 부끄럽지 않소,’ ‘나는 당신을 아껴서 하는 말이요’ 아니면 ‘당신은 그대로 가다가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라고 할까? 그런데 그 어느 것도 그에게 걸릴 수 있는 것은 못된다고 생각됐다. 그는 이미 양심 따위는 다 버리고 파렴치를 냉수 마시듯 하는 판인데 이런 말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단지 그를 놀라게 하려면 ‘그대로 하면 고발하겠소’라든지 아니면 주먹질이라도 하는 것뿐인데 그가 법적으로 어떻게 처리하고 있을 게 분명할뿐더러 고발할 위치에는 있지 않고 그렇다고 주먹파도 못되고 보니 결국 가던 길을 그만두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성서의 창세기 설화에서 신이 ‘아담 인간’에게 모든 것에 대한 자유를 주면서도 ‘이것만은’ 손대지 말라는 것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중요한 뜻을 영원히 말하는 것 같다.
사람의 사회는 ‘이것만은 안 되’하는 게 있을 때 비로소 정치도 법도 경제도 의미가 있지 그것이 없어지면 그 순간부터 수라장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만은 안 되’란 법이나 권력이나 또 어떤 다른 압력이 있기 이전에 각기 직접 마주선 지성소다. 이것은 종교적으로는 ‘터부’로 나타났는데 이것은 바로 자기를 잃느냐 사느냐를 결정하는 절대다. 이것이 문화화되어 가치관, 정통, 양심 등으로 지속되어 왔다. 그런데 그 원수의 실리주의가 이런 것들을 다 깨버리고 그것이 어떤 다른 형태로든지 재 구현할 것을 가로막아 버렸던 것이다.
우리 전통사회를 송두리째 깨뜨리고 입수한 것이 이 실리주의밖에 없으니 부정부패, 퇴폐풍조 따위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인 것이다.
‘이것만은 안 되’가 유효하려면 ‘두려움’의 대상이 있어야 한다. ‘이럴 수 없다’고 할 때는 벌써 이론이나 이득의 영역을 넘어선 어떤 ‘절대’를 전제하는 것이다. 그것이 양심을 묻고 궁극적인 명령을 한다. 그런데 우리 교육에 이런 것을 묻는 과정이 있는가?
이것을 담당한 것이 종교다. 종교의 궁극성은 사람을 ‘절대’ 앞에 세우고 묻고 대답하게 한다. 여기 우리 나라의 종교에 기대를 걸어야 할 것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한국의 종교가 살아있지 못하다는 말도 된다.
출처 : 심원 안병무 아키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