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여름, 서평] ‘존버 묵시록’ : 『반전의 희망, 욥』을 경유하여 존버와 구원을 민중신학적으로 곱씹어 보기(아아)

관리자
2022-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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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버 묵시록’

『반전의 희망, 욥』을 경유하여 존버와 구원을 민중신학적으로 곱씹어 보기

 

아아(Cafe de 3era 바리스타)

 

단언컨대 ‘존버’는 이 각박한 세상 속에서 묵시록으로 읽히고 있다. 존버는 “존X게 버텨라”, “존X 버로우”라는 뜻으로, 세상의 풍파를 어떻게든 버티는 법을 알려준다. 이를테면, 바쁘게 살아가는 대중들에게 초연하게 사는 법, 당돌하지만 모나지 않게 사는 법, 일상을 방해하는 무리들에게 온갖 증오를 느끼지만 절제하는 중립적인 시민으로 사는 법을 시사한다. 따라서 존버는 개인의 삶의 양식이나 태도의 모범을 제시한다. 하지만 존버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 윤리를 채택하여 살아내야 하는 대중들의 구원의 징후로도 포착된다. 왜냐하면 존버는 불안정한 사회에서 자신을 움츠리며 살아내야 하는 삶을 ‘지금 이미’로 계시된 구원으로 만족하게 하는 묵시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존버는 단편적으로 개편된 이 사회를 어쩌면 가장 입체적으로 볼 수 있는 사회의 은유이다.

 

상투적인 질문일 수 있겠다. 이제 민중신학은 무엇을 해야 할까? (민중)사건에 비판적으로 개입하여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는 것이 민중신학의 전통적인 골자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사건을 발견하는 것은 민중신학 작업의 시발점인 동시에 분기점이다. 하지만 ‘존버’를 이 사회의 은유로 이해하는 입장에서 이를 민중신학적으로 해석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다. 바로 ‘사건’이 구체적으로 두드러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존버’로 인해 무수히 많은 입장과 움직임들이 위축되어 ‘중립’을 일관하기에 바빠 사건들은 비가시화돼 있다. 또 어떤 사건이 전면에 두드러지기엔 존버를 함양하고 있는 시민들이 모나지 않게 버티고 있다. 그래서인지 존버하고 있는 이들이 비집고 나와 저항하면 증오를 살 뿐만 아니라 철저히 배제되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 순간의 저항은 일상에서의 고통으로 이어진다.

 

이는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삶의 태도에서 두드러진다. 예컨대 성공에 대한 사람들의 경험이 그러하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자본주의학교>를 주목해 볼 법하다. 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한 K팝 아이돌은 현재 자신이 주식과 코인으로 큰 손해를 보고 있지만 ‘사두면 오르겠지’라는 검소한 마음으로 ‘존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다른 출연자는 “그건 그냥 기도하는 거다.”라고 말했다. 시작은 미약할지라도 창대하리라는 묵시에 대한 소망을 ‘신앙’하고 있기 때문일까. 그는 단지 존버할 뿐이다. 미래가 그저 주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어쩌면 ‘구원’을 말하고 있다. 그것이 예정돼 있든 획득해야 하는 것이든, 모나지 않게 버티며 도달하면 된다. 그토록 신학적으로 논쟁적인 이른바 ‘자유의지’는 존버의 관점에서는 권장된다. 흥미로운 것은 여기에 ‘모나지 않게’라는 존버의 윤리가 은폐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존버의 윤리에 충실하는 신앙은 그들이 모나지 않게 행동하도록 ‘의도치 않게’ 인도한다. 또한 존버를 통한 성공을 기대하는 이들에게서는 어떠한 포부나 전망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들은 현재에 충실하며, 견딜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민중신학은, 오늘의 사회가 ‘민중이 사라진 시대’라는 진단하에 민중신학의 무용성을 말하는 소모적 논쟁 때문이 아니라, ‘사건이 사라진 시대’라는 현실적 진단으로 인해 오리무중에 빠질 수 있다. 존버가 바로 그러한 징후를 보여주면서 사회적 문제에 대한 민중/대중들의 운동을 억제하는 윤리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을 <욥기>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욥기>에서 우리는 욥의 고통이 ‘사회적 문제’로 여겨지지 않고 스스로 초래한 ‘죄’로 간주되는 일상 속에서 사건화의 가능성이 억제되는 상황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민중신학의 비판적 개입이 이루어지는 지평이라는 점에서, 욥기를 민중신학의 성서 전거로 이해할 수 있다.

 

욥은 일상 속에서 고통을 호소한다. 순간순간이 고통이다. 그런데 다들 그를 못 본 체한다. 욥의 항변은 신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되어 증오와 냉소만이 되돌아온다. 사건으로 포착되지 않는 고통, 이 넌센스 가운데서 민중신학은 무엇을 말해 왔으며, 말할 수 있을까? 이를 민중신학적으로 해석했다고 볼 수 있는 책이 있다. 민중신학자 최형묵의 『반전의 희망, 욥』1)이다.

 

민중신학자 최형묵은 <욥기>에서 인간의 삶에 제기된 보편적인 물음과 더불어 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편견 및 전통에 대한 비판적 반성의 계기를 발견한다. 바로 그것이 『반전의 희망, 욥』에 서술돼 있다. 욥은 고통의 한 가운데에 방치된다. 사탄은 하나님에게 “욥이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1:9)라고 말한다. 이것을 두고 저자는 “반드시 보상의 동기를 따라서만 경건하고 의로운 삶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사탄의 입을 통해 발설함으로써 그러한 상식이 ‘사탄적’이라고 암시하고 있다.”(20)고 해석한다. 사탄은 욥이 쉽게 무너질 것이라 확신한다. 하지만 그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는 신앙을 지킨다.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다(1:22). 복도 주시는데 재앙이라고 못 받겠냐며 항변한다(2:10). 하지만 그는 힘들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지만(3:1-26) 변화는 없다. 오히려 고통만 극심해질 뿐이다.

 

무엇보다 그에겐 곁이 없다. 자신의 하소연을 들어줄, 함께 더 나은 삶을 모색하고 그려 줄 곁이 없다. 아니, 오히려 곁이 적이다. 엘리바스, 소발, 빌닷 그의 세 친구는 욥의 고통의 원인을 욥에게서 찾는다. 엘리바스는 이렇게 말하기까지 한다. “잘 생각해 보아라. 죄 없는 사람이 망한 일이 있더냐? 정직한 사람이 멸망한 일이 있더냐?”(4:7) 이렇듯 엘리바스를 포함한 욥의 세 친구는 욥에게 ‘회개’를 요청한다. 욥은 위로 한 마디조차 듣지 못했다. 그는 방치되다 못해 포위되어 버렸다. 그는 체념한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는 것만이 진실을 아는 길이라 확신한다.”(12-14장) 저자는 여기서 ‘하나님의 위대함’에 대한 엘리바스와 욥의 생각의 차이를 발견한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위대함이 엘리바스에겐 인간 주체의 소멸의 근거이지만, 욥에겐 인간 주체의 회복의 근거이다. 이렇듯 욥과 그의 세 친구들은 신앙과 그 관점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사유에서 명백한 차이를 보인다.

 

이어 욥에게 엘리후가 나타난다. 그도 다를 바 없다. 고통에서 목적을 찾는다. 그나마 세 친구들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엘리후는 친구들과 달리 고통에 의미가 있음을, 고통 이후의 선물이 있음을 밝힌다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엘리후에게 고통은 욥을 “하나님 앞에서 겸허한 존재로 만들고 진정한 생명을 누리게 만드는 계기”(217)이다.

 

그것도 잠시, 욥은 하나님과 직접 대화하게 된다. 하나님은 욥을 정죄하지 않고 자신의 지혜를 일깨운다. “하나님은 욥에게 인간들 스스로 만든 그 굴레에서 헤어날 것을 촉구한다. 덩달아 그 굴레 안에 하나님을 가두는 것을 질책한다.”(42) 예컨대 베헤못과 리워야단이라는 괴물이 불가항력적으로 보이지만 결국 하나님의 피조세계 태두리 안에, 그 한계에 있을 뿐임을 말하면서, 이전의 논쟁과 관점의 무용함을 강조한다. 이는 저자가 보기에 “‘필연의 법칙’에서 헤어나 전혀 새로운 가능성을 기대하는 것”(252)이었다. 그런 와중에 욥은 극적인 선언을 한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42:5)

 

여기서 저자는 욥이 승복했음을 발견한다. 하지만 이때 승복은 ‘회개’나 ‘굴복’으로 환원될 수 없다. 이것은 “인간이 매인 노예에서 하나님의 구원 은총을 누리는 자유인의 가능성”(253)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직접 체험한다는 이야기”(253)다. 이제 욥은 어떠한 중재자 없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피조물의 한계에 갇히지 않고 하나님의 진실을 경험할 수 있다. ‘하나님의 위대함’은 바로 이렇게 체감됐다. 그 후, 욥은 엘리바스, 소발, 빌닷에게 사과를 받았고 하나님께로부터 재산을 회복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몇 배를 받기까지 한다. 그리고 장수한 뒤 세상을 떠났다(42:7-17). 대략 욥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저자의 욥기 해설을 보면 욥의 이야기가 민중신학의 논의들과 밀접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련성은 욥의 고통과 그 맥락을 중심으로 살펴 볼 수 있다. 민중신학은 민중의 고통을 ‘사회적 고통’으로 이해해 왔다. 민중신학의 ‘사회적 고통’ 연구를 참조할 때 욥의 고통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먼저 민중신학에서 고통은 민중을 발견 또는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개 조건으로 여겨진다.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민중의 성격을 ‘역사의 주체’와 ‘고난의 담지자’로 구분하면서, 민중을 정치적 상황 속에서 권력과 폭력에 저항적인 불온한 행태를 하는 고통 받는 존재들로 보았다.2) 민중신학자 김진호는 민중의 고통을 지구화 시대의 ‘사회적’ 영역으로 특징짓고 민중신학의 주된 문제의식으로 적극 위치시킬 뿐만 아니라 민중을 발견하는 맥락을 확장한다. 그에게 오늘의 민중은 이른바 ‘내부의 외부자’이다. 그래서 그들은 비주체일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존재로 사회의 구석에서 함구를 강요받는다. 그것은 사건적 맥락뿐 아니라 일상에서 지속된다. 그는 전지구적 소비사회화에 따라 ‘시장의 내면화’를 감내하면서 일상의 정치가 활성화됐음을 지적한다. 일상의 정치는 그동안 폭력적으로 일관됐던 사회적 관계 양식을 성찰하는 계기가 됐지만, 한편으로 타자에 대한 감수성의 결여로 이어졌다. 따라서 기존의 사회적 고통이 거대 권력의 압제와 폭력에 의한 고통으로 포착됐다면, 이제는 혐오와 증오에 따른 ‘인정 문제’가 새로운 화두가 되었다. 이처럼 김진호의 연구를 거치면서 일상의 영역 또한 민중신학이 비판적으로 개입해야 할 지평이 되었다.3)

 

이에 대해 민중신학자 정용택은 ‘사회적 고통’을 “사회적 강제력(social force)이라 불리는 특정한 사회적 조건 하에서 생산된 특수한 고통(생산적 차원)”4)과 “특정한 사회적 조건, 즉 규범과 기대가 사회의 표준에 충족되지 않거나 단지 부분적으로만 충족될 때, 이런 규범적 요구가 어떤 모습으로든 무시됨에 따라 규범과 현실의 괴리가 발생할 때(재생산적 차원)”5) 발견되는 고통으로 구분하며 분석한다. 그러므로 정용택에게서도 (사회적) 고통의 맥락은 김진호와 마찬가지로 일상과 관계의 영역으로 확장된다. 단, 사회적 강제력이 조건부로 달리는 제도의 지평에서 말이다.

 

위의 민중신학의 관점에서 봤을 때 욥은 그의 고통이 타인에게 ‘죄’로 낙인찍혀 증오·혐오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에서 사회적 고통을 겪는 인물이다. 또한 <욥기>가 ‘하나님의 위대함에 대한 이해’와 ‘고통받는 이에 대한 사회의 이해’를 대표하는 세 친구와 엘리후를 통해, 욥이 사회의 규범과 기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욥은 사회적 고통을 호소하는 고통의 담지자이다. 이러한 점에서 욥의 고통은 재생산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고통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욥은 편견과 전통에 대한 비판적 성찰 이후, 하나님을 직접 만나게 된다. 그리고 잃었던 모든 재산을 돌려받는다. 저자는 이를 “뜻밖의 선물”(261)이라 표현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되는 선물일 뿐, 하나님의 정의를 입증하는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261)기 때문이다. 따라서 욥은 ‘뜻밖의 선물’을 통해 인과응보의 규범 안에서 이해되는 ‘보상’에서 탈(脫)하여, 그것을 가능케 하는 사회 규범의 해체 및 무시에서 인정으로의 전환을 응당히 경험하는 세계로 향(向)하는 증언자가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욥기>를 사회적 고통의 담지자의 이야기로 증언한 민중신학의 성서 전거로 봐도 무리가 아님을 재차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민중신학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욥의 이야기와 구조를 전복한다. 민중신학적 관점에서 구원은 욥의 고통 이후의 삶에서뿐만 아니라, 그가 고통을 겪는 그 한복판에서 발견된다. 민중신학자 서남동은 “강도 만난 자가 그리스도다”라고 말하며, “강도 당한 자의 신음소리(한)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대한 그리스도의 부름이며 (…) 그 신음소리에 대한 각자의 응답과 행동에서 구원과 멸망의 갈림길이 있다”6)고 하였다. 이를 참조하여 정용택은 “강도 만난 사람이 그리스도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고통당하는 이웃의 절규에 응답함으로써 우리가 예수의 고통에 동참하게 되는, 즉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과정을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7)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고통받는 이웃의 모습으로 세계 가운데 현존한다는 것은 예수를 본받아 우리가 우리 자신과 상호의존적 관계 속에 있는 이웃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8)하기도 한다고 하였다. 이어서 정용택은 “예수의 삶과 죽음에 신앙으로 동참하는 구원의 과정과 이웃의 해방에 적극적으로 연대하는 윤리적 실천의 과정이 하나로 합치됨으로써 신앙과 실천, 구원과 윤리가 통합될 수 있게 되는 것”9)이 바로 메시아적 사건임을 역설한다. 따라서 욥의 고통은 이른바 ‘계시의 하부구조’로서, 주체상실의 근거로 위축됐던 하나님 내지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이해(계시의 상부구조)는 고통당하는 이들의 주체회복의 근거에 해당한다.10) 이렇듯 민중신학은 구원을 사회적 고통을 극복했을 때 비로소 계시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고통의 한가운데에 함의돼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정리하자면, 민중신학에서 욥의 고통은 구원의 매개가 아니라 구원이 함의된 메시아적 맥락이자, 구원에 대한 기존의 규범과 이해에 대한 비판적 반성의 전거가 된다.

 

하지만 고통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구원의 함의’를 발견할 수 있을까? 민중신학의 전통적인 명제에서는 ‘사건’이라는 분기점이 사회에서 충분히 기능해야 그것이 가능할텐데 과연 우리는 모든 이들이 모나지 않게 살아가려는 이 존버와 언약을 맺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 메시아적 순간(혹은 맥락)을 부여잡을 수 있을까? 우리는 언젠가부터 규범과 질서를 변혁하려는 시도보다, 철저히 순응하며 모나지 않는 삶을 영위하는 것을 선택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존버’라는 굴절된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회를 당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존버는 묵시가 되어 중립기어 박고 버티는 게 이 사회 대중들의 주체회복으로, 회복의 가능성으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적당한 윤리로 간주되었고, 그것만이 유효한 “지금 이미”의 구원으로 받아들여지게 됐다. 뿐만 아니라 이것이야말로 ‘모두에게’ 필요한 것으로 신앙되고 있다. ‘존버 묵시록’, 그것을 나는 이렇게 부르려 한다.

 

단언컨대 ‘존버 묵시록’을 탐독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이러한 징후에 대한 고발을 <욥기>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욥을 통해 드러나는 응당한 구원이 존버의 구원과 대비되는 구도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이해가 욥에게는 주체회복의 근거로 이해되고 구원으로 연결되었던 반면에, 존버 묵시록에서는 주체적 표현의 절제를 통한 모나지 않는 ‘중립 윤리’로의 이행 내지는 그것이 당연한 사회의 구축으로 구원을 경험한다. 둘째, ‘보상’을 인과응보의 규범에서 탈(脫)하여 그것을 가능케 하는 사회 규범의 해체와 인정윤리의 실현으로 향(向)하는 해방의 표적으로 전유하는 <욥기>와 달리, 존버 묵시록은 규범과 질서 안에서 사회적 인정, 저항, 응당한 권리에 대한 반감을 통해 만들어진 효율에 따른 ‘순리’로서 ‘보상’을 이해하고 있다. 그것은 저항을 소음으로 치환하는 구원론으로 우리 안에 은연중에 내재해 있다. 이 굴절된 ‘묵시’를 어떻게 구원할 수 있으랴.



1) 최형묵, 『반전의 희망, 욥』, 동연, 2009. 이하 이 책의 직접인용은 괄호 안에 쪽수를 기입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2) 안병무, 「예수사건의 전승 모체」, 『민중과 성서』, 서울: 한길사, 1993, 100쪽.

3) 김진호, 「오클로스와 ‘비참의 현상학’: 지구화 시대 민중신학의 과제에 대하여」, 김진호 외, 『21세기 민중신학』, 서울: 삼인, 2013, 336-345쪽.

4) 정용택, 「왜 고통이 중요하며, 왜 고통이 문제인가?」, 이상철 외, 『민중신학, 고통의 시대를 읽다』, 서울: 분도출판사, 2018, 220-221쪽.

5) 위의 글, 222-224쪽.

6) 서남동, 「한(恨)의 형상화와 그 신학적 성찰」, 『민중신학의 탐구』, 서울: 한길사, 1983, 107쪽.

7) 정용택, 「메시아를 구원하라! : 누가복음 10:25~37를 중심으로」, 웹진 3era 제181호, 2022. https://3era.campaignus.me/1497350861/?q=YToy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zOjQ6InBhZ2UiO2k6Mzt9&bmode=view&idx=8755766&t=board

8) 위의 글.

9) 위의 글.

10) 서남동은 고통받는 자가 민중이라는 사실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더 나아가 그 고통이, 그 신음소리가 곧 메시아적 사건이며 메시아의 도래의 유일한 길임을 주장한다. 요컨대 고통은 민중의 필수조건이면서 동시에 “한의 속죄적인 성격”을 담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남동, 앞의 책, 118-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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