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겨울, 프로그램 리뷰] 소수자와 민중신학, 서로 친하고 싶은 것 같긴 한데(황용연)

관리자
2022-12-31
조회수 56


소수자와 민중신학, 서로 친하고 싶은 것 같긴 한데

 

황용연(제3시대 연구기획위원장)

  

1.

지난 10월 17일 수유리 한신대 신학대학원에서 〈심원 안병무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있었습니다. 이 대회에서는 제8분과가 소수자/퀴어 분과로 편성되었습니다. 여기서 발표된 글은 「퀴어-페미니스트 관점에서 한 권의 책으로 읽는 이사야서」(유연희), 「조각난 존재들의 신학(들), 민중신학과 교차하다」(자캐오), 「민중신학의 민중 개념으로 본 진보적 장애운동」(유진우), 「민중과 퀴어의 만남」(이유정)입니다. 한편 본 연구소가 주로 관여했던 제5분과 노동/경제/해방신학에서는 「소수자 프레임으로 보는 민중신학의 민중」(황용연)이라는 글이 발표되었습니다.

 

2.

‘퀴어신학아카데미’의 유연희 선생님이 발표한 「퀴어-페미니스트 관점에서 한 권의 책으로 읽는 이사야서」는 흔히 제1, 제2, 제3으로 구분되면서도 한 권의 책으로 묶여 있는 이사야서가 한 권으로 묶일 수 있는 일관성을 퀴어적 시각에서 찾으려는 글입니다. 이사야서에서는 흔히 남성적 주체로 상상되는 야훼, 이스라엘/시온 등이 여성적 호칭으로 호명되고, 그들의 행동에 대한 여성적(이라고 흔히 인식되는) 묘사가 곳곳에 등장함으로써 곳곳에서 젠더 교란의 효과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러한 젠더 교란적 효과를 낳는 요인 중의 하나인 이스라엘/시온의 여성적 호명이 처음에는 ‘딸’이었다가 마지막엔 ‘어머니’로 바뀌면서 한 여자의 생애와 같은 연속된 이미지로 이사야서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차별과 혐오없는 평등세상을 바라는 그리스도인 네트워크’를 대표한 자캐오 사제님이 발표한 「조각난 존재들의 신학(들), 민중신학과 교차하다」는 차별금지법 반대 운동으로 나타나는 한국 교회의 반(성)소수자적 행각에 대한 저항운동과 민중신학의 만남이 가능할지를 묻는 글입니다. 이 글이 소개하는 대로, ‘민중과 함께 하는 전통’을 유지해 왔던 성공회 사회선교 운동이 소수자 운동과 접속할 때 “누가 우선적으로 편들어야 하는 사람들이며 민중인가?”라는 날선 논쟁과 재해석이 있었다니, 저 질문에 대한 대답이 생각만큼 쉬운 건 아니겠습니다.

 

하지만 이 글은 조각난 존재인 소수자가 안전망을 잃어버린 존재라는 점에서 성서의 고아/과부/나그네/더부살이와 상통하므로, 소수자 운동과 민중신학이 만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최근 민중신학의 담론 중 민중 현실이 민중신학자들에게 신학적 전환을 강제했음을 지적하는 담론이 ‘소수자의 현실이 신학적 전환을 강제한다’는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 또한, 소수자 운동과 민중신학의 만남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고 밝힙니다.

 

「민중신학의 민중 개념으로 본 진보적 장애운동」은 한신대 신대원생이었다가 기장 교단의 목회 현장에서의 장애인 배제에 분노하며 자퇴한,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유진우 활동가가 발표한 글입니다. 이 글은 이 분과에서 발표된 글 중 현재의 민중신학에 가장 우호적인 글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전장연 중심의 진보적 장애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활동가인 필자는, 민중신학의 기존 담론 중 시민에 의해 배제되는 비시민을 강조하는 담론과, 민중이 배제를 겪으면서도 강력한 생명력을 갖고 있음을 강조하는 담론이 장애운동의 현실에 잘 들어맞는 담론이라고 판단합니다. 특히 2022년 장애인 지하철 타기 투쟁으로 인해 자신의 의견이 ‘상식’임을 자임하고 그 ‘상식’에 어긋나게 지하철을 ‘세우는’ 장애인들을 욕하는 시민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지요.


‘퀴어신학아카데미’의 이유정 선생님이 발표한 「민중과 퀴어의 만남」은 퀴어 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퀴어신학의 방법론으로 민중신학과 대화하려 한다고 천명합니다. 이 방법론의 특성은 기존의 젠더 규범에서 일탈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성소수자/퀴어가 그 규범에 인정받을 수 있는 ‘정상성’을 추구하기보다 그 규범을 해체하고 전복한다는 점, 그리고 그 해체와 전복이 퀴어 내부의 정체성에도 적용된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 글은 초기 민중신학의 논의를 퀴어신학의 방법론으로 바라보면 강도 만난 사람이 그리스도라거나 예수사건은 민중사건의 화산맥 중의 하나라거나 하는 등의 논의가 약함과 강함의 경계, 신과 인간의 경계를 해체하는 퀴어적 특성을 가진 것으로 해석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또한 죄는 지배자의 언어이고 민중에게는 그것이 한이라는 논의 역시 죄인이라는 지칭을 뒤집어써 온 퀴어 커뮤니티의 역사와 호응하는 논의라고 평가합니다.

 

3.

제8분과의 글들이 민중신학 바깥의 자리에서 소수자의 이야기를 하는 글에 가깝다면, 제5분과에서 발표된 「소수자 프레임으로 보는 민중신학의 민중」은 민중신학 안의 자리에서 이야기하는 글에 가깝습니다. 이 글은 민중신학의 민중 용어가 당대의 주류 언어뿐만 아니라 비주류 언어와도 균열을 일으킨다는 점을 소수자 프레임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글입니다.

 

이 글은 식민지 시기부터 한 사회의 대중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계속 사용되어 왔던 ‘민중’이라는 말이 사회 변혁적 의미를 담게 된 것은, 해방 후의 근대화가 대중과 권력의 극심한 괴리를 낳으면서 대중이 사회가 돌아가는 데 영향을 전혀 미칠 수 없다는 감각이 지배적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러한 감각으로 사회 변혁적 의미를 담게 된 민중 용어는 주로 민족 용어와 결합되어서 사회의 당위적인 주체로 제시됩니다. 민중신학의 민중 용어는 그런 용법을 따라가면서도 복음서의 오클로스, 즉 당시 팔레스틴 사회의 정상적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존재로 해석되는 용어와 민중을 결부시킴으로써, 당위적 주체라는 용법과 다르게 해석될 여지를 열어 놓았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위에서 말한 “당위적 주체라는 용법과 다르게 해석될 여지”는, 특히 민주화로 인해 대중과 권력의 괴리가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는 믿음이 지배적이 되고 그에 따라 당위적 주체의 의미가 민중 용어에서 시민 용어로 옮겨진 지금에 와서 더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제 민중신학에서의 민중은 자본/권력과 함께 당위적 주체로서의 시민이 함께하는 사회적 배제의 자리에서 등장하는 언어니까요. 따라서 이런 사회적 배제의 자리에 얽히게 되는 소수자가 민중의 중요한 의미가 된다는 것입니다.

 

4.

5편의 글을 정리하면서 대부분의 글이 소수자의 자리와 민중신학의 자리가 서로 친화적일 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디까지나 친화적‘일 수 있다’이지 친화적‘이다’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상황까지는 아직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할까요. 소수자라는 프레임을 취하게 되면 사실 담론 자체가 한두 가지가 아니니 앞으로 채워야 할 내용이 더 많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5편의 글 중 한 편의 발표자이기도 한 제 개인적인 입장에서 마지막으로 한마디 드리면, 8분과의 글 2편과 논평 2편에 제 이름이 민중신학의 기존 소수자 논의의 예로 등장하더군요. 그동안 조금이라도 소수자 이야기를 해 온 보람을 느꼈다고나 할까요.^^


ⓒ 웹진 〈3era〉

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