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기획 기사] 나 홀로 세상에 : 이른바 '공정'에 대한 단상(황용연)

2022-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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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홀로 세상에
이른바 '공정'에 대한 단상



황용연(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기획위원장)

 


1.


얼마 전 마지막해를 맞은 현재의 정부는 출범하면서 평등한 기회와 공정한 과정과 정의로운 결과를 약속했었습니다. 이 세 가지 중 특히 두 번째의 공정이라는 말을 두고 이 정부 내내 설왕설래가 꽤 컸었고, 앞으로도 계속 클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기회가 평등하다는 것과 결과가 정의롭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대답까지 '공정'이란 말에 포함된 것 같기도 하고요.

 

이런 설왕설래들을 보면서 한 가지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기회의 평등과 결과의 정의로움까지 다 포함하는 것 같은 이 '공정'이란 말. 공정이란 말은 결국 누구와 누구, 무엇과 무엇 사이의 공정일 텐데, 그 누구와 무엇은 과연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 걸까요.

 

공정이란 말이 꽤 많이 나왔던 몇 가지 사건들, 작년의 소위 '인국공' 사태 같은 케이스를 돌아보면 방금 던진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마도 '개인'이 아니겠나 싶습니다. 사회와의 사이에 다른 아무런 매개가 없이, 공정해야 한다는 과정에 온전히 자기 혼자 뛰어들어, 그 과정을 자기 혼자 겪어 나가고, 따라서 그 과정의 결실도 모두 온전히 자기 혼자에게 귀속시키는 것이 마땅하다는, 그런 의미에서의 개인 말입니다.

 

이런 개인에게 공정이란 말은 사실상 이런 의미를 가지겠죠. (자기 혼자의 노력으로) 학교 공부를 잘 했으니 그에 맞는 성적을 매겨 달라는 것과 같은 의미. 그리고 좋은 성적을 받았으니 그 성적에 따라서 보상도 잘 해 달라는 의미.

 


2.


시험을 보려고 하는데 부정응시자가 있으면 안 되겠죠. 또한 부정행위가 있어서도 안 되겠고요. 그래서 공정을 외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만큼 많이 들리는 말이 외노자니 원세대니 조려대니 하는 말들입니다. 한국의 법률에 따르면 나가야 하는데 나가지 않고 '불법체류'하고 있다는 '외노자'. 연세대와 고려대라는 '명문' 대학의 스펙을 '위조'해 보려는 '원세대'생과 '조려대'생 등등.

 

이런 현상이 벌어지면서 인권, 소수자, 특히 페미니즘 등을 주장하는 것이 일종의 부정행위 취급을 받지 않나 하는 생각이 함께 듭니다. 저런 주장들이 완전히 부정당하는 것까진 아니더라도, 이 시대의 '개인'들은 많은 경우 저런 주장들을 능력이 없거나 정당화할 논리가 부족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불과한 것을 어떤 보편적인 도덕으로 꾸며서 특별점수(?)를 받으려는 행각쯤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감성팔이'네 '인권팔이'네 하는 말들이 생기게 된 이유가 이런데 있지 않나 싶고요.

 


3.


사회개혁이나 사회운동에 관심 있는 분들은 어떤 사회체계에서 불이익을 받거나 혹은 그 체계의 하층부에 있는 사람들이 그 사회체계를 개혁하는 데 동의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런데 공정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생각하다 보면, 이 단어가 힘을 얻는 맥락에서는 바로 앞에서 언급한 생각, 즉 하층부에 있는 사람들이 체계를 개혁하는 데 동의할 거라는 생각이 잘 안 통하는 거 아닌가 싶어요. 즉 자기가 하층부에 있는 것도 그냥 하층부에 걸맞은 실적밖에 못 올리고 있는 자기 책임일 뿐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공정'이란 단어의 효과 아닌가 싶은 겁니다.

 

어쩌면, 언젠가 상층부에 걸맞은 실적을 올렸을 때 '공정'하게 그 실적에 대한 보상을 받으려면, 지금 하층부에 있는 것도 하층부밖에 못 되는 나에 대한 '공정'한 대접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당연한 전제 아니겠냐 뭐 이런 구조가 되어 있는 거 아닌가 싶달까요. 그런가하면 이런 '공정'이 실현되리라고 믿기 힘들다는 생각 또한 있기 때문에, 뭔가 큰 이득을 볼 혹은 손해를 회피해야 할 이런 상황이 왔을 때 '영끌'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겠고, 그런 '영끌'이 필요한 세상이기 때문에 '공정'에 대한 갈망이 더해지는 것이기도 하겠구요.

 

이렇게 보니 방금 언급했던, 인권, 소수자, 페미니즘 등의 주장에 대한 부정행위 취급이라는 게 조금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있겠다 싶습니다. 이런 주장들이 사람과 사람 간의 연대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면, 연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이런 주장들이 부정행위 취급당한다는 건, 세상에 그냥 나 혼자 뛰어든 '개인'으로서, 다른 개인과의 관계가 없이 그냥 자기 노력으로 이룬 성과에 대한 '공정'한 대접, 이것 말고 다른 가능성을 믿지 않는다는 징후가 아닌가 하는 거죠. 연대를 이야기하는 사람의 속셈은 자기 이득을 챙기기 위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는 불신이 그에 따라오겠고요.

 

이렇게 볼 때 또 하나 짚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언제부터인지 늘기 시작한 "가르치려 들지 마라"라는 말입니다. 이 말이 소위 꼰대질을 지적하는 말로 쓰이기도 하지만, 소수자 이슈에 관한 말이 오고 갈 때 기존의 통념을 유지하려는 쪽에서 듣기 싫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기도 하죠. 어쩌면 이것도, 소수자니 뭐니 떠드는 너도 나와 같은 '개인'일 뿐인데 너는 뭐 그리 잘 났냐 네가 아는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이런 말일 수도 있고, 더 나가보면 소수자니 뭐니 떠드는 니 속셈이 뭔지 알게 뭐냐 혼자 사는 세상 믿을 수 있는 건 나뿐인데 이런 말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4.


지금은 공정이란 말이 현재의 정부에 대한 비판의 뉘앙스를 담게 되었지만 서두에 언급했던 것과 같이 사실 공정은 현재의 정부의 약속이기도 했습니다. 그 현재의 정부를 지지하는 분들은 사회개혁을 위해서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화된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거 같습니다.

 

그런데 저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화된 힘"이라는 말을 듣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조직화를 한다면 조직화의 기제나 이유나 명분 등이 나와야 할 텐데 그런 게 없죠. 그냥 "깨어있는 시민"이라는 이상적인 주체가 제시되고 그들이 "조직화"되어야 한다는 말만 있을 뿐이지요.

 

사람과 사람이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가 조직화의 문제일 텐데 그것에 대한 말이 빈약하다면, 결국 저 말이 전제하는 것도 앞에서 말한 '개인'이구나 싶은 생각입니다. 홀로 세상을 살아가고 홀로 책임지고 홀로 성과를 올리고 그 성과를 '공정'하게 평가받기를 원하는 '개인'. 홀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기도 알만큼은 모두 안다고 믿는 '개인' 말입니다. 이러한 '개인'이라는 상을 공유하고 있으니 '공정'이라는 소망을 공유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죠.

 

그러다 보니 조직화된 힘이라는 게 생기기는 생기는데 그 조직화의 방식은 "깨어있다"고 믿게 되는 그 "깨어있음"의 내용에 따른 패거리 짓기가 되어 버리고 어느 패거리가 힘이 센가 표를 더 많이 얻을 수 있는가를 다투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 아닌가 합니다. 힘이 세고 표를 더 많이 얻은 패거리가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은 표를 더 많이 얻은 것에 대한 '공정'한 결과구요. 사회운동하는 사람들에게 표를 찍지도 않았는데 요구를 해도 되냐는 식의 반응이 많아지는 건 이런 상황이랑 무관하지 않겠죠.

 

아마도 '개인'밖에는 존재하지 않는, '공정' 외에는 상상하지 못하는, 그런 상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꼭 필요한 질문이 될 거 같습니다. 그것은 결국 사람과 사람간의 연대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의 질문이기도 하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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