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 목회 마당] 선한 양심의 응답(김윤동)

2022-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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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양심의 응답



김윤동(제3시대 기획실장)

 


일시 : 2021년 2월 21일 (한백교회)

본문 : 베드로전서 3:18~21

 

18 그리스도께서도 죄를 사하시려고 단 한 번 죽으셨습니다. 곧 의인이 불의한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셔서 여러분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려는 것입니다.

19 그는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가셔서 선포하셨습니다.

20 그 영들은, 옛적에 노아가 방주를 지을 동안에, 곧 하나님께서 아직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하지 않던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방주에 들어가 물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겨우 여덟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21 그 물은 지금 여러분을 구원하는 세례를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세례는 육체의 더러움을 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힘입어서 선한 양심이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사순절의 첫 주일입니다. 사순절은 모든 것이 생동하는 한국의 계절과는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발랄하고 기분이 들뜨고 샤방한 옷을 입고 나들이를 할 봄날에 성찰하고 되돌아보고 그래야 하니까 말입니다. 예전에 대학 시절에는 가장 화창한 봄날, 새로운 것들이 다시 살아나고 가장 서로가 서로를 궁금해할 시간에 뭔가 절제해야 하는 이 상황이 싫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벚꽃이 피는 날, 고난주간과 중간고사까지 겹치면 고통이 배가 되었죠.

 

또한 그런 계절과 상관없이 사람들에게 회개와 절제,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묵상은 그 자체로도 불편합니다. 우리가 재에서 왔고 재로 돌아갈 것을 묵상하고, 우리 자신의 유한성과 언젠가는 맞이할 죽음을 기억하라니요. 뭔가 기분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습니다. 특히나 새해가 왔다기보다 그저 팬데믹 2년차를 맞이한 것 같은 요즘, ‘백신이 나온다, 연말이면 마스크를 벗는다’와 같은 기분 좋은 소식이 나오다가 그마저도 뜸해지고 확진자의 수는 여전히 비슷한 선에서 출렁거리고 있고 팬데믹의 종식이라는 것이 또 한 걸음 달아난 것 같은 요즘입니다. 어수선하고 우중충합니다.

 

이 와중에 봄꽃이 활짝 피듯 활기차고 좋은 소식들만 오가도 모자랄 판에 다시 절제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시간이라니. 썩 와닿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 시즌만 되면 들불처럼 번지는 ‘진정한 회개란 무엇인가’와 같은 이야기를 길게 드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 현실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몇 가지 회개나 사과와 관련된 현상들에 대해 생각해 보려는 것입니다. 다만, 회개를 곧 어떤 잘못한 것에 대한 개인 또는 집단의 반성으로만 이해해 온 기독교의 전통과 교리에 관해서, 나아가 구체적으로는 그런 방식으로만 응답하는 최근 십여년간의 개신교 일련의 움직임에 대해 왜 이런 것들에 저는 불편해 하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보고 있고, 오늘 그 고민을 여러분과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최근 교회를 대표하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YMCA, YWCA가 공동으로 사과문을 발표(2021. 1. 29)하였고, 영향력 있는 한 기독교 시민단체에서도 ‘교회가 미안합니다.’(2021. 2. 1)라는 제하의 사과문을 발표하였습니다. 당연히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1, 2, 3차 대유행의 시작점에 모두 존재했던 주체로는 교회가 유일하지 않을까요? 이태원, 목욕탕, 요양병원, 헌팅포차 이런 이름들이 각각의 대유행때마다 주요 전파의 진원지로 거론되긴 했지만 교회는 늘 빠지지 않았습니다. 사고를 치는 일부 교회의 세력들에 대해 교회의 대표들은 한편으로는 저들은 우리와 ‘다르다’며 선 긋기에 나선 적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과했고, 뼈아픈 성찰의 시간을 갖겠다고 다짐 또 다짐했습니다. 물론, 사과는 이번 1월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요. 작년 2차 유행이 한창이던 8월에도 NCCK와 한교총은 입을 모아 사과를 했었습니다.

 

어떤 쪽에서는 ‘사고’를 치고, 다른 한 쪽에서는 ‘사과’와 ‘반성’이 이어지고 있는 이런 일련의 풍경들이 좀 지루합니다. 교회가 사과를 하는 모습이 비단 팬데믹에 국한된 어제 오늘만의 일이 아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그 사고와 사과가 연관성 있게 번갈아가며 일어나고 있는 이 지리멸렬한 양상은 최근의 사태이지만, 교회의 대사회적인 사과는 사실 이번 팬데믹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물론 팬데믹 와중에 일어난 교회 대표단체들의 사과는 집단적인 극우개신교의 광기에 대해서 진땀뻘뻘 뒷수습하는 모양새였다면, 그 이전에 일어난 교회의 사과는 상당히 뜬금없는 사과였습니다. 사실 사과라기보다 그것은 ‘회개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집행되었습니다. 연배가 꽤 높으신 어르신 목사님들이 갑자기 나뭇가지를 꺾어 스스로 자기의 종아리를 내리치며 하나님께 죄를 지었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는둥, 괴기스럽기 짝이 없었던 2015년 ‘회초리기도대성회’와 더 나아가 2007년에 전국적인 평양 대부흥 운동을 계승하자는 모토로 회개 및 교회 대부흥 운동으로 퍼져나간 ‘Again 1907’이 교회가 하는 사과의 대표적 사례였습니다. 물론 이전의 사과는 자신을 성찰하는 반성이라기보다 뭔가 교회 내부결속을 향한 선동적인 메시지가 강했던 사과이긴 합니다.

 

선동의 채찍과 회초리가 되었든, 진정성 있는 교회의 사회를 향한 성찰이 되었든 이렇게 교회가 수치스러운 반성과 사과를 수십년째 이어오고 있으면서 어느 교회를 가나 패배감이나 자조적인 분위기가 팽배해진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디 가서 나는 예수를 믿는다 얼굴 들고 다니기 어려운 지경이 되어버렸고, 그리스도인들의 자존감은 바닥인 것도 같고 참 안타깝기도 합니다. 이는 회개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이는 기성 교회들도 눈물 콧물 흘리며 밤낮 회개하지만, 구체적인 대상도 없고, 사과의 내용도 없으니 끝나고 나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무감각하고 마비된 회개’가 도돌이표처럼 행해지고, 또 뼈아픈 성찰과 사회와 함께 울고, 함께 우는 정의롭고 참여적인 교회를 외치는 교인들도 윤리적으로는 상당히 바른 말인데, 돌아오는 메아리 없는 아주 소수의 외침이랄까요, 그런 말들을 하면 할수록 허탈한 기분이 드는 건 부인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저는 이런 사태들을 가만히 놓고 보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당연히 개신교인이 사과는 해야 마땅하다. 퍼뜩 떠오르는 대답은 ‘당연히 해야 한다. 같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달고서, 그들의 악행에 대해서 책임 있게 사과해야 마땅하다’라는 답변이 떠오르죠. 자, 그럼 이 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사과해야 하나 하는 점입니다, (여기 계신 이상철 목사님께서도 여러 실태 조사를 통해서 ‘사회가 교회를 걱정하고 있다!’ 라고 많이 말씀해 오셨는데, 어떤 의견을 가지고 계신지요.)

 

저는 먼저 이렇게 잊을만 하면 대대적으로 일어나는 사과 퍼레이드가 좀 민망하고 허탈합니다. 또 실태조사에서도 언급되었듯이 모든 교인이 그런 것이 아니며, 교회도 부끄러움을 모르지는 않다는 면피성 멘트도 조금 민망스럽습니다. 왜 그리 공허할까요? 정작 잘못한 사람은 사과를 않고 더 빳빳이 고개를 드는데, 갑자기 다른 곳에서 사과를 한다는 것은 내부의 침묵하는 다수의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시그널 같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뭔가 어색하기만 하고 구색 맞추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도 듭니다. 실제적으로는 전혀 대표되지도 않고, 애시당초 통제 불가능한 교회 대표들의 무능성이 오히려 더 부각되는건 아닌가, 그래서 이 허탈함이 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마치, 선생님이 떠든 사람을 혼내려 하는데, 갑자기 의협심이 뛰어난 반장이 일어나 ‘선생님, 제가 저 떠든 아이를 대신하여 사과하고 매를 맞겠습니다.’ 하며 말하는 일그러진 소영웅주의를 보고 있는 것 같아서 더 오그라들고 민망스럽습니다.

 

이런 소회들을 늘어놓는 것은 오히려 우리의 허탈함을 키우는 것 같아 더 길게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허탈함의 이유야 어찌되었든 더 오늘 깊게 묵상해 보아야할 것은, 오늘 이 예배를 함께 드리고 있는 우리는 오늘 사순절 첫 주일을 맞아,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서, 또 한 교회로서, 또 그리스도교신학을 연구하는 연구소로서 켜켜이 중첩되어 있는 현 사태에 대해 책임 있는 사과, 적절하고, 온당하며, 책임있는 ‘응답’은 어떠해야 하는 것일까 하는 질문일테니까요.

 

저는 오늘 성서정과에 따른 본문 중 베드로전서 3장 본문에서 희미하게나마 그 힌트를 얻었습니다. 바로 세례에 관한 21절 본문에서 말입니다. 세례는 곧 죄사함의 상징과도 같은 사건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따라 우리가 죽고, 동시에 그의 부활을 따라 다시 사는 의미를 담은 의식입니다.

 

기본적으로 그리스도교는 인간을 죄를 가진 존재라 칭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본연의 질서로부터 떠나 불완전하고 죄를 지닌 악한 존재로 말이죠. 민중신학을 비롯한 조금은 현대적인 해석을 하는 신학에서는 죄에 대해서 특별히 죄를 ‘하나님에게 불순종함’, ‘악에 복속함’, ‘율법에 대한 위반’ 등으로 묘사하는 것을 벗어나 ‘완전한 것으로부터의 소외, 불완전함’으로, 또는 구조적인 악함으로부터 오는 ‘고통’으로 조금은 순화시켜서 표현하긴 합니다만, 어떻게 표현하든 세례는 그 일련의 ‘죄’라는 것으로부터의 용서됨, 벗어남, 해방 등을 먼저 맛보고 구원을 미리 취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세례가 그러하다면 우리는 이 절기에 책임 있는 사과를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책임 있게 지금의 고통에 대해 응답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연관지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베드로전서에서는 먼저 세례가 무엇이 ‘아닌가’하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세례는 육체의 더러움을 씻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를 행할 때 그 때나 지금이나 물이 사용되는데, 세례가 죄를 씻는다는 표현을 사용하다보니 그 때나 지금이나 뭔가 그 물로 육체에 있는 더러움을 씻어내는 것으로 인지되었겠지요. 여기서 말하는 그 ‘육체’도 생물학적 몸뚱아리가 아니라 마음과 정신을 지배하고 무의식적으로 차오르는 욕망 같은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이분법적 사고 안에서는 무조건적으로 ‘욕망=육체의 것’이란 도식이 있었을 테고 그 욕망과 동일시된 그 육체는 더러움과 죄의 근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물로 샤워를 하듯 세례를 받으면 온 몸에 있는 더러운 생각과 욕망들이 기계적으로 없어질 것이라는 주술적인 생각이 있었을 겁니다. 그 물에 대해서 베드로전서는 앞에 부연설명을 덧붙입니다. “그 물은 지금 여러분을 구원하는 세례를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미리 보여줬다는 그 물은 무엇입니까? 바로 20절에서 말하고 있는 노아 방주 사건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알기로는 노아의 홍수사건은 이 세상을 심판하는 물이었습니다. 창세기에도 세상에는 하나님이 세상에 인간을 지은 것 자체를 한탄하시면서 범람하는 죄를 씻기 위해 쓸어버리는 물이라 기록하고 있었는데, 베드로전서는 그 물을 새롭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힘입어 선한 양심을 촉구하는 응답으로서의 물이라고 말이죠. 공동번역에서는 이 구절을 ‘깨끗한 양심으로 살겠다고 하느님께 서약을 하는 것’이라 번역하고 있습니다. 응답(새번역), 서약(공동번역), 간구(개역개정)라고 번역된 이것이 죄를 사하는 그 행위의 핵심이라 말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앞에서 이야기한 그 사과, 하나님께 대해서든 이 사회를 향해서든 그 죄를 씻는 행위라는 것은 무엇을 종결짓는 행위, 저질러진 불법, 저질러진 악행에 대해서 우리 이제 없이 하자!라고 종결하는 선언이 아닙니다. 죄라고 하는 저 쪽의 대응에 대한 맞대응, 즉 값을 치른다는 의미로서의 사과가 아니라, 그 악한 행위란 사실 우리 중의 일그러진 일부이며, 그것은 이어지고 있고 우리가 방향을 비틀어 이을 것이며, 계속되고 있다는 그 무거운 서약이 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이 구절에서도 언급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부활’,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늘상 고백하던대로 그리스도의 부활이란 죽음이라는 하나의 대응에 대한 맞대응, 달리 말해 이것의 단일한 발생과 그에 상응하는 발생으로서의 저것! 이라는 메커니즘이 아니라, 오늘도 여기서도 저기서도 예수 사건이,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화산맥처럼 연쇄적으로 터져 나오는 것이 부활이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부활을 힘입어 우리 안에 있는 선한 양심이 여기서도 저기서도 계속해서 화산맥처럼 터져나오는 응답 말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앞으로 달라지겠습니다.’ 하는 그 사과의 순간에 진심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의 사과와 성찰이 허탈한 이유는 그 사과의 메시지가 틀려서 그런 게 아닙니다. 사과문들을 보면 얼마나 진정성이 담겨져 있는지 모릅니다. 중요한 건 제안된 견해가 틀린 게 아니라, 그 견해를 내는 방법이 틀린 것입니다. 그 메시지가 나오기까지의 그 의사결정구조가 틀어진 게 문제입니다. 오히려 통제되지 않고 사고치고 날뛰는 교회들은 그것이 매우 비상식적이고 보통의 생각들에서 벗어난 것이고, 소수의 파벌 내부에만 통하는 말이라 할지라도 자신들의 청중들이 가려워하는 곳을 긁어주고 그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면서 그에 수반하는 다음 단계와 과제를 강력하게 제시하지 않습니까?

 

반면 반성과 사과를 내놓는 그 집단들은 결속된 청중도 없고, 있다 하더라도 그 청중들과 함께 어떤 적과 어떤 전략으로 싸우겠다는 그 기개, 전장에 뛰어드는 에너지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과거 조선 말기 양반들에서나 볼 법한 엘리트층의 엣헴거리는 공허한 윤리의식과 무력함, 무능함이 더 드러날 뿐입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빨려 들어가겠다는 의지는 더더욱 보이지 않습니다.

 

당연히 교회 대표 주자들의 사과와 반성보다 사회의 상식에 반하는 무리들의 메시지나 의사결정방식, 메커니즘이 결코 옳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저이들이 틀렸다고 말함으로 사과가 끝나는 게 아니라, 그들과의 전쟁에서 완승을 거두는 게 중요합니다. 과거 예수 운동이 단지 인륜만을 옹호하는 윤리운동에 그친 것이 아니라 아포칼립스, 즉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로 평온히 이어지고 있는 시공을 과감히 쪼개어 내는 종말적 사건이기도 한 측면이란 걸 한백교회와 연구소의 신앙으로 고백한다면 면피성 사과만 할 것이 아니라 저 반대편이 현재 대중의 추인(追認)을 이끌어내고 있는 그 에너지를 대항할 수 있는 어젠다를 짜내야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백교회 교우 여러분, 그리고 이 예배를 시청하고 계신 모든 분들, 우리는 오늘 우리의 사과와 성찰, 그리고 이성적인 생각과 행동들은 이렇게 무력하고 지리멸렬한가에 대한 제 고민에 대해서 말씀드려왔습니다. 그건 연구소의 고민이기도 하며, 더불어 한백교회의 고민과도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연구소에서 가장 많이 한 강좌 이름을 살펴 보면 ‘000 다시 읽기’라는 게 참 많았습니다. 어떤 성서 본문이나 기존에 믿어온 전통의 신앙을 재해석하고 뒤집어 읽기라는 방식으로 그 무기를 가지고 우리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연구소는 한백교회와 더불어 민중신학이라는 무기를 이용해서 세상과 소통하였고,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무지의 베일을 벗어던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으로 인해 세상에 외칠 수 있는 힘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양상이 조금 바뀐 것 같습니다. 신앙에 관하여 무지의 베일을 벗겨준 건 고맙지만, 그 다음부터는 우리가 알아서 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아예 우리가 알아서 무지의 베일을 벗을테니 너희들은 별로 거들 것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기독교나 성경이 아예 거들떠도 보기 싫다는 사람은 수만배 더 많아졌습니다.

 

전장은 바뀌었고, 싸움의 양상은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우리는 그래도 아직 염치가 있는 집단이다, 침묵하지만 사고치지 않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에 위안을 얻던 때도 있었습니다. 이제는 아닙니다. 우리의 메시지는 더 친절해져야 하고, 사람들은 단순히 결과물을 얻으려 한다기보다 어떻게 그 결과물에 도달했는지 그것도 하나부터 열까지 다 내놓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대신해 전쟁에 나가 승리하고 패배하고 사과하고 어쩌고 해달라는 게 아니라, 싸울 수 있는 무기를 쥐어달라는 것입니다. 져도 우리가 지고, 이겨도 우리가 이기겠다는 것이죠. 흐름상 이치적으로 자연스러운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이런 고민이 많은 나날을 보내던 요즘, 문득 연구소에 남은 실무자들에게 여기에 어떻게 오게 되었고, 어떻게 여기까지 남게 되었는가 하는 질문을 나누었습니다. 여러 삶의 궤적들 속에서 연구소를 만났지만, 우리의 공통점은 함께 배우면서, 계속 글쓰기를 하며 남은 사람들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우리로부터, 또한 우리와 함께 무엇이 선한지를 듣고 연구한 사람은 정말 많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의 그 ‘세계를 다시 읽고’ 또 각 전장에서 수많은 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기 한백교회를 비롯하여 연구소와 지금 함께하고 있는 남은 사람들은 함께 공부하며, 함께 이 필드를 통해서 꾸준히 ‘쓰기’라는 작업으로 응답해온 사람들입니다. 들음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함께 우리의 역사를, 예수운동의 현재 버전을 써내려간 사람들이었다는 점입니다.

 

하여, 올해 연구소는 우리를 지켜주었던 사람들과 공동체, 그리고 우리를 아직 모르는 사람들에게 더 친절한 연구소가 되는 것에 집중할 예정입니다. 또한 30년간 많은 ‘쓰기’를 통해 자신의 선한 양심을 응답해왔던 연구소의 행적처럼, 그렇게 함께 쓰고 읽을 사람들을 모아갈 예정입니다.


이번 해는 수십년간 이어져 온 공허하고 허탈한 회개가 없는 한 해였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바라건대 우리가 대응에 대한 맞대응으로만 시간을 허비하는 일 또한 없었으면 합니다. 모쪼록 이 지리멸렬한 싸움의 새로운 물줄기를 열어볼 수 있는 그런 한 해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두서 없는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웹진 <제3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