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기획 기사] 능력주의를 넘어선 성평등의 전략이 필요하다(한보성)

2022-01-22
조회수 332
 능력주의를 넘어선 성평등의 전략이 필요하다


한보성(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생)

 

한 여성 직업인이 ‘여성할당제’ 덕분에 현재의 직위를 얻었다는 ‘뒷말’을 들은 적이 있다. 종사하는 직무도, 소속된 조직도 달라 반박을 하지는 못했고, 근거를 되묻는 일과 함께 내가 잘 모르는 사정이 있으리란 짐작한 채 넘겼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분야와 대상만 달라질 뿐 비슷한 험담을 듣는 경험이 반복되었다. 일반적으로 선망되는 지위를 획득한 여성들을 대상으로, ‘여성’이기에 그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는 말들이었다. 처음 몇 번은 개별 여성들의 업적과 기여도를 내세워 시시비비를 가리고 반박하려 했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부터 성공한 여성이 제도의 ‘수혜자’가 아님을 역설하는 것이 도리어 다른 누군가를 일종의 ‘특혜’를 입었다고 간주하는 편견을 승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한국의 여성 고위직 진출 비율을 따지는 이른바 ‘유리천장지수’(영국 《Economist》)가 매년 OECD 최하위라거나, 남성 대비 여성의 임금이 67.8%에 불과(2019년 기준, 고용노동부)하다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들어가며 한국의 성별 격차의 심각성을 강조하는 데에 집중했다. 그렇지만 한국 사회 전체의 문제를 들어 성평등의 필요성을 말하는 ‘상식’과 구체적인 개인의 성취를 따지는 것 사이의 괴리가 고민되지 않을 수 없었다. 토크니즘(tokenism, 사회적 소수자를 겉으로는 포용하나 실제로는 한정적인 권력만을 허용해 불평등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수렴될 우려가 있는 성별할당제의 한계를 인식하면서도, 여성들을 더 잘 대변할 다른 구체적 대안에 대한 고려 없이 제도만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 것 안티페미니즘의 손을 들어주는 것으로 보여 내키지 않았다. 다른 ‘백래시(backlash, 사회·정치적 변화로 영향력이 줄어든다고 생각하는 기득권의 반격을 말함. 여기에서는 페미니즘의 부상을 두고 남성들이 반격을 가하는 현상.)’처럼, 고용·승진에서의 성차별 역시 이미 ‘해소’되었다는 의견 역시 자주 보인다. 물론 ‘부정’은 앞서 언급한 고용차별과 성별격차의 관련 자료의 일부를 인용하는 것으로 반박하면 될 것 같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성평등이라는 대의에 반대하거나, 고용 시장에서의 성차별이 이제 ‘없다’며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특정인을 여성할당제의 ‘수혜자’라며 폄하하는 사람들 역시 상당하기 때문이다. 이미 존재하는 차별을 인정하는 사람들조차 그것을 조정하는 제도에 대해서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은 왜일까? 이때 전유되는 단어가 바로 ‘공정’이다. 여성할당제가 비록 성차별을 다소 조정하는 효과가 있더라도, 더 출중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 더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 더 ‘공정’하다는 주장이다. 즉, 이런 이들에게 성별 격차란 제도를 통해 시정되기보다는 개인이 능력 함양을 통해 돌파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물론 이때의 ‘공정’ 역시 차별의 철폐보다는 능력에 기반을 둔 ‘평가’에 의해 보장되어야 할 것으로 이해된다. 자원의 차원적 배분이 ‘능력’에 따른 결과로 이해되면서 옹호되는 것이다. 그래서 공정성을 강조하는 목소리 아래에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들인 수고와 노력이 보상받지 못한다는 일종의 ‘억울함’이 깔려 있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층위에서 반박이 가능하다. ‘능력’이란 개인에게 고유하게 속한 속성으로 간주되지만 실은 시대적·정치적·사회적으로 구성·측정·평가된다는 점, 그래서 단일한 잣대로 ‘능력’을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환상이라는 점, 그럼에도 ‘노력’이 ‘능력’으로 투명하게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면 이는 어디까지나 ‘화폐’로 환원된 부분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 ‘능력’을 획득하기 위해 투입된 ‘비용’(이른바 ‘노력’ 등)은 사회적 약자 쪽이 아니라 능력을 규정하고 판별하는 권력을 지닌 쪽에 청구하는 것이 옳다는 점 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겠다.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점은 이른바 ‘공정’할 것이라 믿어지는 규칙이, 사회적 약자와 지배적 위치를 점한 사람들이 같은 조건 아래에서 경쟁할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경쟁이 격화된 분야일수록, 경쟁에 투입할 자원이 없는 사회적 약자부터 탈락해 나가는 모습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형평성’ 등을 이유로 지배집단만의 의견을 그대로 수용할 경우, 차별이 점점 더 격화되곤 하는 현상 역시 잘 알려져 있다. ‘능력주의’에 기반을 둔 ‘공정에 대한 믿음’은 오히려 균등하지 않은 조건에서 경쟁에 임해야 하는 처지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린 채, 패배한 사람들에게 수치심과 모멸감을 가한다. 상위 소득자들이 돈을 벌 수 있었던 조건을 무시한 채 소득을 자신의 ‘노력’과 ‘능력’의 결과로만 간주하거나, 나아가 주류 집단의 사람들이 ‘정상’에서 벗어난 비주류 집단을 향해 ‘게임의 룰’을 깬다고 혐오 발언을 내뱉는 것 역시 이렇게 이해할 수 있겠다.


간단하지 않은 문제가 하나 더 있다. 고용 분야에서의 성차별은 지역·연령·전공·직무 간의 다른 변수를 배제하더라도 상당한 임금 격차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는 여성들이 주로 채용과 직무 할당 과정에서 배제되면서 저임금 기업, 저임금 일자리로 몰리게 되며 발생한 것이다.(김창환·오병돈, 2019) 그렇기에 능력주의의 강화가 도리어 성차별을 완화하는 효과가 있지 않겠냐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실제로 공무원 등 능력주의에 의한 직무 분야에서는 성별에 따른 임금 격차가 상대적으로 훨씬 적은 수준이기에, ‘편견 없는 능력주의’에 대한 요구로 비합리적 성차별을 해결하자는 주장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능력주의가 담보하는 것처럼 보이는 ‘공정’은 언제나 약자의 배제를 전제로 한다. 이를테면 단일한 평가 체계를 수립해 ‘직군 내’ 성평등을 어느 정도 이뤄내자는 주장에는, 여성이 주로 수행하면서도 저임금에 갇혀 있는 영역에서의 차별에 대한 고려가 빠져 있다. 갈수록 비정규직의 비율이 늘어나고 정규직을 줄이는 방향으로 노동시장이 재편되고 있는 상황에서, 여성들은 점점 더 불안정, 저임금 일자리로 내몰리고 있다. 능력주의는 이에 대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 더욱이 COVID-19 확산 사태 이후 돌봄노동의 부담으로 인해 고용 충격이 주로 여성에게 집중되었다는 분석(김지연, 2021) 역시, 노동의 위계와 가치의 근본적인 재배치 없이는 성평등의 달성 역시 요원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비록 성차별을 부정하고 싶어하거나, 성평등이 이뤄졌다고 억지 주장을 하는 이들이 ‘공정성’을 내세워 여성들의 부상과 문제제기에 대해 온갖 폄훼를 늘어놓는다면, 여성들만 늘 ‘자격’을 의심받는 것부터 ‘차별’임을 지적해야 한다. 이렇게 특정 여성들을 두고 ‘자격’이 없는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이미 과반보다 훨씬 더 많이 자리를 차지해 제도적 조정을 개입하게 한 ‘남성들’을 두고 같은 취지로 말하는 법은 결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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