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프로그램 리뷰] 이야기 하는 자의 욕망 vs 이야기 듣는 자의 욕망, 그 욕망에 압사당하는 희생양(이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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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하는 자의 욕망 vs 이야기 듣는 자의 욕망, 그 욕망에 압사당하는 희생양


이연화

 

죽음보다 강한 욕망


세헤라자드가 죽지 않기 위해 천일동안이나 이야기를 해왔다고 알고 있으나, 실은 그녀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죽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닐까. 뒷담화하고픈 욕망을 억누르지 못해, 돌고 도는 게 소문이며, 그 이야기가 더 파렴치하고, 더 더럽고, 더 추악할수록 전파속도는 빠르다. 어디 뒷담화뿐일까. 이야기하고 싶은 욕망은 글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에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글자가 탄생한 이후엔 돌에, 나무에, 옷감에, 가죽에, 새겨지고 그려졌다. 수많은 신화와 설화들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이라는 장르가 탄생했을 때엔, 사람 수만큼의 이야기들이 자기만의 세계를 보여주고자 쏟아져 나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어차피 하룻밤을 잔 처녀들을 처형하는 방식으로 “여자들”에게 복수하는 샤리야르 왕한테 죽을 운명인데, 누군가에게 그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죽을 수는 없었던 세헤라자드였다면, 천일의 이야기의 본질은 『죽음보다 강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망』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듣고 싶은 욕망은 또 어떠한가. 샤리야르 왕은 세헤라자드를 죽이고 싶어도 이야기를 듣고 싶어 천일동안 죽이지 못한다. 드라마가 방영되고 나면, 마지막 화를 보기 전까지 몇 달 동안 그 이야기를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이 있다. 예고편은 이야기를 듣고 싶은 이들에게 던지는 매력적인 미끼며,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이들은 죽을 줄 알면서 그 미끼를 덥석 물고야 만다.

 

윤간, 토막살인사건, 학살, 납치 – 이 이야기 들어볼래?


사사기19장~21장에 이야기꾼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어 미쳐있다. 그 이야기의 핵심은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때”에 방점이 찍혀있다. 사사기 19장 1절은 그 문장으로 시작하고, 사시기 21장 마지막 절인 25절은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로 끝난다. 즉 왕이 없었을 이스라엘이 얼마나 혼돈스럽고, 비윤리적이고, 폭력적이며, 전쟁과 같은 상황이었는지를 말하고 싶어 한다. “자 사람들아,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을 때가 어땠는지 말해주겠소. 잘 들어보시오.”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듣는 이가 없다면, 말하는 자가 흥이 나지 않는 법.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 텍스트가 유대왕국 요시아 왕 때 서기관들이 채록을 해 놓은 것이라면, 그 당시 듣는 자들은 왜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을까. 왕의 필요성을 못 느꼈던 정치적 상황이었을까? 아니면, 왕이 있음으로 인해 지옥 같은 삶은 살던 이들에게 왕이 없던 시절 이스라엘은 더 고통스러웠기를 바라는 타자의 불행을 통한 치사한 행복을 꿈꿨을까.


이야기를 하는 자와 이야기를 듣는 자가 서로의 욕망을 확인하면서,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전말은 이러하다.

 

윤간


에브라임 출신 레위인의 둘째 부인은 베들레헴 출신이다. 그 부인이 화가 나서 친정으로 돌아가자 레위인은 부인을 달래러 베들레헴에 와서 5일이나 지체하였다. 이야기꾼은 레위인이 베들레헴 장인에게 붙잡혀있는 5일간의 상황을 지루하게 묘사한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왜 이렇게 서두가 긴지 빨리 그 다음 이야기를 하라고 재촉한다.

 

“기브아까지는 가야지”

 

사건의 발단이 되는 기브아. 기브아 사람은 같은 동족인데도, 이 레위인을 환대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 사람이 묵는 에브라임 출신 노인에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드리며 노인에게 요구한다. “그 자를 내 놓으시오” 같은 에브라임 출신임에도, 무뢰배들은 노인 말고 그 레위인만 요구한다. 노인은 같은 고향사람인 남자레위인의 안위만 중하다. 자기 딸과 레위인의 둘째 부인(한국성서 공동번역에만 노인은 자기 딸만 내어주겠다고 쓰여 있음. 다른 모든 버전엔 딸과 레위인의 둘째부인을 내놓겠다고 기재. 레위인의 둘째부인은 노인의 협상대상이 아니었을 텐데, 왜 이런 차이가 있는지 히브리 성서나 그리스성서를 봐야할 것 같음)을 내어주겠노라 협상한다.


레위인은 손님입장으로 차마 주인의 딸은 내어달라고 하지 않고, 자기 아내만 그 무뢰배들에게 넘겨준다. 이 여성이 밤새도록 이 무뢰배들에게 강간당하는 동안 그의 남편은 문을 잠가두고 편히 잠을 자다 일어난다. 이 여성이 문고리를 붙잡고 열어달라고 했지만, 그 문은 결코 열리지 않았기에 그녀는 문지방을 붙잡고 쓰러져있을 수밖에 없었다. 문 안엔 삶이, 문 밖엔 폭력과 살인이 있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도, 문설주와 문상인방엔 발라지지만, 문지방엔 바르지 않았다(출애굽기 12장 7절). 그녀는 죽음의 경계를 넘지 못했고, 신에게도 버려졌다.

 

토막살인사건


전쟁 중에 승자는 패자의 여자들을 윤간하는 방식으로 패자를 모욕한다. 직접적으로 패자남성의 항문을 유린하면서 모욕하는 경우도 있지만, 성서에서는 패자의 여자들을 공개적으로 강간하면서 패자를 모욕하는 장면을 다룬다(사무엘하 16: 22,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의 후궁을 공개적으로 강간). 성서에서는 패자 남성을 직접 강간하려 하는 것은 그 시도조차 너무나 모욕적이라 신의 심판을 받는 상황처럼 묘사된다(창세기 19장 소돔의 멸망).


이 레위인 아내의 강간은 곧 남성을 강간한 것이고, 이는 그의 치욕이다. 그는 아내의 생사조차 궁금하지 않으며, 그녀는 살아있어도 눈앞에서 사라져야 할 수치 그 자체다. 한글성서에서는 이 참혹함을 차마 이야기 할 수 없어서인지 아내의 주검, 시체라고 묘사하나 영어 성서에는 그가 그 아내의 시체를 토막 내었는지, 살아있는 아내를 토막 내었는지 알 수 없다. 후자라면, 이 레위인은 자기 수치심을 견디지 못해, 살아있는 사람을 난도질하여 살해한 자다. 이야기꾼은 아무렇지 않게 담담히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이야기를 듣는 자는 집단강간과 토막살해 그 이야기에 취해 빠져든다. 아마 이야기를 하는 자나 듣는 자는 남성이 아닐까.


“이렇게 끔찍한 일은 이스라엘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온 날부터 이 날까지 일찍이 없었고 또 본적도 없는 일이다.”


레위인이 당한 수치가 끔찍한 일인가, 살해당한 여성의 비극이 끔찍한 일인가. 이야기꾼이 말하는 끔직한 일은 무엇이고, 듣는 자들에게 끔찍한 일은 무엇인가.

 

학살 그리고 여성납치


이야기꾼은 베냐민 지파가 몰살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이 엽기적인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반복한다.


“기브아의 어른이라는 것들이... 나를 죽이려 하였습니다. 내 첩을 욕보여 죽게 했던 것입니다. 나는 내 첩을 가져다가 토막을 내어.... 그들이 이스라엘에서 얼마나 더럽고 얼마나 고약한 짓을 했는지 알리려는 것.”

 

이야기꾼은 이 학살이 야훼의 뜻임을 강조하기 위해 지난하게 학살의 전모를 밝힌다. 두 번의 패배와 마지막 승리. 그 학살에 대해 자기들은 죄가 없고, 이것은 야훼의 뜻이었다고 변명한다.

 

20장

23절-이스라엘 사람들은 야훼께 나가 저녁이 되도록 그 앞에서 통곡하며 다시 물어보았다, 26절-이스라엘 백성과 전군은 베델로 일제히 올라가 야훼 앞에 앉아 통곡하며 저녁때가 되도록 온종일 단식하고.

21장

2~3절 – 이스라엘 군은 베델로 가서 저녁이 되도록 하느님 앞에 앉아서 소리를 질러 대성통곡하며 아뢰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여, 어찌하여 이스라엘이 이런 일을 당해야 했습니까? 어찌하여 오늘 이스라엘에서 지파 하나가 없어지는 일이 생기고 말았습니까?”

21장 15절 – 야훼께서 이스라엘 지파들 사이에 틈이 벌어지게 하셨기 때문에

 

더 가관인 것은 이 학살에 모두가 참여해야 자기들의 범죄를 덮을 수 있기에, 그 살해에 참여하지 않은 자들을 찾아내어 또 다른 학살을 자행해 다른 기억마저 모조리 지워버리려 했다는 점이다. 야베스 길르앗 주민들의 남자와, 사내와 잠자리를 한 여자들을 모조리 죽이고(학살당해야만 하는 자들), 처녀(베냐민의 남은 남자들과 결혼하여 자식을 낳는 여자들은 자기의 미래와 자식의 미래를 위해 침묵할 수밖에 없기에)들만 남긴다. 역겨운 것은, 이런 짓을 벌인 이유가 이스라엘 중에서 지파 하나가 없어지게 되면, 대대로 내려오는 자기들의 정체성이 흔들릴 수 있기에 베냐민의 씨를 이어주려 길르앗과 실로의 여성들을 납치하여 씨받이로 이용했다는 점이다.

 

이야기 욕망에 압사(壓死)당하는 희생양


이 참혹한 이야기를 하는 자가 말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는 것처럼(19장~21장에 걸쳐진 상세한 가로안의 주석들-“여부스가 예루살렘, 베냐민, 언약궤, 실로..”), 이 이야기를 듣는 자는 듣고 싶어서 귀를 쫑긋 세운다. 2000년이상 더 오래되고 이스라엘과 상관없는 내가 이 텍스트에 몰입해가며 이 참상을 계속해서 읽어가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있는데, 그 당시 이 텍스트를 읽어내는 자들에겐 오죽할까.


자기 조상들의 이야기이자 곧 자기의 이야기. 베냐민 지파가 왜 역사상 사라졌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며, 왜 왕이 필요했는가에 관한 이야기. 그들의 이 미칠 듯한 욕망은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죄악을 고발하고 있다.

 

이야기를 말하는 자와 그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자 사이에서 한 여성이 도륙당하고, 한 집단이 학살당하고, 납치당해 씨받이가 되는 여성들이 압사당하고 있다. 그리고 그 상황은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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