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민중신학 다시 읽기] 하늘도 땅도 공(公)이다(안병무)

2022-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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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무, 「하늘도 땅도 공(公)이다」(『신학사상』 제53집, 1986년 여름호)





1. 낙원 이야기

 

바울로는 “한 사람 때문에 죄가 세상에 들어 왔고 또 그 죄를 통해 죽음이 들어온 것 같이 사람들이 모두 죄를 범하였으므로 죽음이 온 인류에게 퍼지게 되었읍니다”고 말한다. 그것은 창세기의 아담에 대한 그의 해석이다. 여기서 그가 말한 죄가 무엇이며, 그 결과는 현실적으로 어떻게 되었는지를 창세기의 실락원 이야기를 통해서 밝혀 보고자한다.


이른바 창세기의 실락원 이야기는 1장과 2~3장 안에 서술되어 있다. 1장과 2~3장은 다른 자료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중복이 있고 혼선도 있으나 오늘은 그런 세부적인 문제를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고 이 이야기의 핵심, 즉 편집된 이 이야기에서 말하려는 의미를 밝히려고 한다.


‘낙원’이란 말은 사람들의 영원이 반영된 것이다. 어떤 종족이나 어떤 종교에도 낙원 이야기가 없는 데가 없다. 이미 창세기의 낙원 이야기가 있기 전에 중동 일대에 이와 유사한 낙원 이야기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구약의 낙원 이야기는 이러한 낙원 아야기들을 수렴하면서 새롭게 해석했다.


그런데 왜 인류에게 낙원을 향한 염원이 있을까? 그것은 지금의 삶을 어려움을 투사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의 삶이 행복하고 만족하다면 구태여 낙원을 그리워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전제에서 볼 때 낙원에 대한 그리움은 바로 현실생활에서 탈출하고 싶은 소원을 반영한 것일 수 있다. 물론 그 소원에서는 현재의 세계에 대한 저항의식과 나아가서는 개혁의지가 내포될 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즉 현재의 사회적 비리나 인간의 고통에 대한 이유의 추구가 그 원인일 수도 있다. 불행의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죄 때문인가? 죄 때문이라면 죄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 두 면을 완전히 분리할 수는 없으나 창세기의 이야기는 후자(죄)에 더 역점을 둔 것이다.


낙원 이야기는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과거지향적인 것으로, 이것은 인간 세계의 본래성을 묻는 데서 나온다. 다시 말해서 지금의 현실은 본래적인 것이 아니다. 현 상태는 변질된 것이다. 그러므로 본래적인 것을 변질시킨 원인을 찾아 그것을 제거함으로 원상태를 회복해야 된다는 영원에서 생긴 것이다.


또 하나는 미래지향적인 것으로, 이 유형온 현실 부정의 면에서는 같으나 본래적인 것의 추구가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능력으로 만들어내야 하며, 또 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나온 것이다. 이른바 유토피아 사상이 그런 유형에 속한다. 유토피아적인 사상에는 인간 능력에 대한 신뢰가 바탕에 깔려 있다.


우리 이야기는 창세기 이야기지만 이 둘 중에서 어느 쪽인가를 묻는다면 전자에 가깝다. 창세기 이야기에는 현실에 가로놓여 있는 인간의 문제들을 타개하려는 염원이 깔려 있다.


우리 이야기에서 ‘맨 처음’이라는 말에 사로잡혀 연대기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아담과 이브가 맨 처음 만들어진 사람이라고 이해하면 그 다음 이야기에서 곧 모순에 부딪힌다. 그 둘 사이에서 카인과 아벨이 났고, 아벨을 죽인 카인이 추방되었는데 그가 어떻게 누구와 더불어 한 족속을 형성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기에 우리 이야기는 한 삶의 마당 또는 한 막이라고 보아야 한다.


여기에는 삶의 한 형태(Type), 인간 삶의 한 가능성이 서술되어 있다. 그러므로 6천년 전이거나 수백만 년 전이거나 간에 아득한 옛날에 있었던 지나간 이야기가 아니고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그대로 관련되는 것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로도 아담 이야기를 지나가버린 이야기로 보지 않고, 지금 우리에게 직접 관련이 있으며 인간은 그와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즉 아담이 지은 죄와 같은 죄를 우리도 짓고 있다는 말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 기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며, 동시에 그 문제의 해결을 인간 역사의 궁극적 목적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유명한 아담―그리스도 도식이 나온다. 인간은 아담―그리스도라는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 있는 것이다.

 


2. 아담―인간

 

그려면 낙원은 어떤 것인가? 하느님이 자연을 창조했다. 우리 이야기에서는 자연은 직접 ‘……되라’고 명명한 데 대하여, 인간은 ‘어떻게, 무엇 때문에’ 만들어야 하는가를 전제하고 만들었다고 구별하여 서술한다.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에 따라 만들었다. 그러므로 안간은 하느님과 자연 사이에 위치한다.


‘하느님과 같은 형상으로’라는 표현에 사로잡혀 신론과 구별된 안간론에 묶일 필요는 없다. 인간론에 매여 기본 뜻을 흐리게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것은 인간은 자연과는 달리 자율성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이해하면 된다.


자율성! 그것은 선택권을 가진 존재라는 말이다. 그리고 ‘가능성의 존재’라는 말아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연을 다스리는 권리를 부여한다. 자연을 다스린다는 것은 권력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아니! 자연을 다스란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자연을 개발하는 노동을 통해서 역사를 창조해 나감으로써 하느님, 인간, 자연이 혼연일체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된 현실이 낙원이다.


노동은 강제된 행위가 아니다. 노동은 바로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으로서 자기 형성의 행위이다. 그것은 자기를 형성하는 일이며 동시에 역사를 창조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노동이 즐거운 것이 되는 현실이 낙원인 것이다.

 

그러면 이 자연에서의 아담―인간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제 창조주가 인간에게 준 지시에 따라 인간의 인간됨과 그 할 일을 밝혀보기로 하자.


첫째, ‘이 땅을 다스리라’는 말이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이 땅을 경작하라는 말, 즉 노동으로써 역사를 창조하라는 말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모든 곡식 즉 식물은 먹으라는 말이 있고, 동물을 먹으라는 흔적은 없다. 만약 이것에 의미를 준다면 자연 안에 살고 있는 동물마저도 인간의 노동에 의해 사육될 수 있는 현장을 만들라는 말이 될 것이다. 자연을 개간하는 일 (cultivation), 그것은 노동을 통하여 문화를 창조한다는 말의 근원이다. 자연에 주어진 가능성을 개발하는 것이 노동이다. 땅의 가능성을 도와서 곡식도 심고 꽃도 가꾸며 나무도 자라게 함으로 스스로도 살며, 자연에도 조화를 줌으로써 하느님의 역사 창조에 참여하는 일이 바로 노동이다. 그럼으로써 노동은 하느님과 자연, 인간을 혼연일체가 되게 하는 행위이다. 여기에는 이원론적인 사고에서 발달된 물질과 정신, 혹은 육과 영혼, 하늘과 땅의 구별이 없는 조화된 혼연일체의 현실만이 있다.


그런데 노동에 대한 이같은 이해는 외부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신학 또는 교회에 의해 무시되어 왔다. 그리고 이분법적 논리에 의해 물(物)과 영(靈)을 구분하고, 그리스도교는 영의 세계만을 담당하는 자로 자부함으로 물(物)의 세계를 방관 내지 멸시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함께 그리스도교가 이 땅에서 권력자들에게 인정된 종교귀족으로 등장함으로 노동에 대한 이해를 변질시켰다. 즉 자신들은 이른바 영적인 사실을 다루는 자들로 군림하고, 물질을 다루는 노동을 천시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따라서 육체적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천한 자들로 취급받아왔다. 이것은 문화(culture)를 정신적인 것에만 국한시키고 육체적 노동과 구분한 지식인 상류사회의 행태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물과 노동을 가장 필요로 하면서도 그것의 실제적인 주체들을 멸시하는 한마디로 지배자의 이데올로기에 의한 비리가 그리스도교 안에 그대로 자행되었던 것이다. 이에 더하여 칼 마르크스 이래로 구체화된 유물론이 그리스도교의 그것과 상치된 형태로 등장함으로 반마르크시즘의 경향이 물질을 물질주의와 동일시하게 함으로써 물질을 멸시하게 할 뿐만 아니라 물에 대한 책임은 고사하고 아무런 해명이 없는 채 오늘에 이르렀다. 물질에 의해, 물질로써 자신을 지탱하면서도 말이다.


이러한 자세는 노동문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물질과 노동, 이것은 인류의 삶의 기본바탕이었으며, 그것이 산업혁명 즉 기술의 도입으로 기계화에 의한 물질생산 형태로 바뀌면서 불균등한 물질분배, 노동의 변질, 구체적으로 말하면 노동이 강제당하고 착취되며 물질이 강한 자에게 펀중됨으로 사회에 구조져 불의가 만연되어가고 있는데도 그리스도교는 이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느끼지 않았다. 이런 양상은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배반되는데도 말이다.


노동은 본래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이며 즐거운 행위인 동시에 하느님의 역사 창조에 참여하는 구체적 행위이다. 이것이 깨지는 것이 바로 실락원의 상태이다.


둘째로, 하느님은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말한다. 그것은 자연 전체에 주어진 것과 갈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여기에 아담과 이브가 있다. 이것은 바로 성(性)이 있다는 말이다. 창세기 2장 이하에는 아담이 먼저 창조되고, 이브는 아담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동반자로 아담의 갈빗대로 만들었다는 설화가 있다. 이 설화는 남성이 권력과 재력의 주도권을 잡음으로써 남존여비의 사회구조를 정당화하는 데 크게 이용되어왔었다. 남성위주의 인간사회에서는 성은 노동과 마찬가지로 강제적인 것이 되었을 뿐 아니라 강자의 점유대상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성은 창조행위로서 역사를 만들어가는 행위이다. 창세기 1장에는 하느님이 아담과 이브를 동시에 창조했다고 서술한다. 이것은 똑같은 두 인격이 자주적으로 만남으로 역사 창조에 참여하는 동반자라는 뜻이다.


왜 이 구절은 무시되고 이브가 아담의 갈빗대라는 것만이 강조되어 왔을까? 이것은 바로 성을 독점하고 그것을 강제하는 관계로 만들어버린 강자 남성들의 죄에서 나온 결과이다.


셋째, 낙원에 있는 모든 곡식이나 실과는 인간의 자율권에 맡겨졌으나 ‘그 가운데 심어진 나무의 실과만은 따 먹어서는 안 된다’는 지시이다.


금단의 열매! 이것은 무엇이며, 왜 심어졌을까? 사람들은 이에 대해 여러 상상을 해왔다. 그것을 따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같이 된다는 말에서 그것이 ‘지혜’를 말한다고 보는가 하면, 그것을 따먹자 부끄러움을 느껴 하체를 가렸다는 이야기에서 그것은 ‘성’을 의미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 어느 것이든 간에 중요한 것은 낙원의 한계가 주어졌다는 말이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사유화해서는 안 되는, 독점할 수 없는, 그러므로 내 것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까?


나는 그것을 일단 ‘공’(公)이라고 표현한다. 모두가 더불어 받을 수 있는지는 몰라도 사유화해서는 안 되는 것이 ‘공’ 또는 공적인 것이다. 가령 하늘은 공이다. 하늘은 어느 누구도 사유


할 수 없다. 땅도 본래는 공이다. 그것을 경작하고 그 소산을 나누어 먹을 수는 있으나 사유화할 수는 없다. 하느님도 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모는 사람에게 있으나 어느 누구에게 소유될 수는 없다. 어떤 종파나 종교도 하느님을 독점할 수 없으며 독점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이 공율 침범하면 전체의 질서가 깨진다. 이것이 금단의 이유일 것이다.


또 다른 면에서 그 뜻을 생각할 수 있다. 사람이 노동하는 데는, 즉 역사 창조행위에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확실한 기준이 있어야 그 노동행위가 개발을 위한 것인지 퇴폐를 위한 것인지 또는 전전하는 것인지 후퇴하는 것인지를 알 수 있다. 개발, 전진하는 것이 선이고 퇴폐, 후퇴하는 것이 악이라 한다면 노동에 의한 창조행위의 결과가 악인지 선인지 식별하게 하는 것이 바로 금단의 열매이다.


또 다른 차원에서 보면 인간이 역사적 존재가 되려면 한계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율은 타율의 상반개념이 아니다. 타자, 즉 ‘너’ 때문에 ‘나’를 제한할 수도 있는 자유를 가진 것이 바로 자율적 존재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율은 방종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금단의 열매는 인간을 역사적 존재가 되게 하는 조건이다.


바로 이것이 낙원이다. 인간은 신도 아니고 자연도 아닌 독자적 존재로서 역사창조에 참여하는 것이 바로 낙원이다. 이렇게 사는 삶에는 슬픔, 고통, 부끄러움도 없다.

 


3. 실낙원은 공을 사유화함으로

 

그런데 실락원의 사건이 일어난다. 언제부터인지 인간의 역사는 증오와 대립, 고통 마침내 유혈의 역사로 점철되었다. 다윈이 동물세계를 관찰하여 약육강식, 적자생존 등의 현상을 보고 인간이 죽이고 빼앗고, 죽고 빼앗기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타고 보았다. 그러나 낙원 이야기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이유에서 아담(인간)이 낙원에서 추방되어야 했는가?


이것은 바로 공이 침범당함으로 시작된 것이다. 구체적으로 땅은 공적인 것이다. 성서에는 땅은 당초에 공적인 것이라는 전제가 면면히 흐르고 있다. 그런데 이 땅이 언제부터 사유화되었나? 가령 북미 개척사를 볼 때 그 사유화 과정이 연상된다. 그 무변광활한 대지에 백인들이 무력으로 침범하여 마음대로 금을 그어놓고 ‘이것은 내 것'이라고 선언하여 침범하는 자는 사정없이 죽여 버린다. 그러므로 미국은 강도들의 역사로 시작된다. 이와 비슷하게 전에는 땅의 침범이 곳곳에서 군주의 이름하에 자행되었으며, 근대에 와서는 제국주의로 구체화되어 이미 역사와 문화를 갖고 있는 민족들의 땅을 총칼로 강탈했던 것이다.


우리가 정의로운 세계를 말하려면 생산된 물질의 분배 이전에 대지의 불공평한 점유부터 문제삼아야 한다. 우리가 세계지도를 펴놓고 보면 세계가 평화로울 수 없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어떤 나라는 광활한 땅을 점유하고 사람이 없어도 독점욕에서 국경을 철통같이 하고 어떤 민족은 작은 땅에 오밀조밀하게 산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나? 그것은 모두 힘센 놈들은 더 많이 빼앗고 힘 약한 민족은 빼앗겼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캐나다, 호주 등의 광활한 땅은 앵글로색슨이 원주민을 몰아내고 점유한 것이다. 그것은 하늘이 준 기득권이 아니다. 그런데 그것을 당연한 권리로 알 뿐 아니라 그 땅의 자원으로 힘을 길러 남의 것을 침범 약탈하기에 이른 것이다. 누가 대지(大地)를 독점할 권리를 주었나! 누구에게 준 것이 아니라 빼앗은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을 수호하기 위해 군사력을 기를 수밖에 없고, 그런 마당이 낙원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낙원으로 가는 길은 무력의 포기가 앞서야 하고 무기를 포기하려면 국경을 없애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와 정반대다. 아직 불공정하게 구획된 국경선 사이에 간장이 계속되고 분계선 때문에 싸움이 속출하고 있으며 실지(失地)의 분노와 판도 확대의 야욕이 전쟁을 유발하고 있다.


또 하나는 권력의 경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권력은 원래 하느님에게만 속했다는 것이 성서의 기본전제이다. 권력이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공적인 것이다. 바울로는 로마서 13장에서 모든 권력은 하느님께로부터 났다고 선언한다. 그런데 이 공적인 권력이 사유화된 것이 왕권으로 시작되는 권력의 독점체제이다. 권력의 사유화, 그것은 언제나 폭력으로 이루어졌다. 왕권이나 현금의 독재자라는 것은 바로 이 공적인 것을 폭력으로 찢어 버리는 자들이다.


인권도 공이다. 물(物)도 공적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권력을 사유한 자들에 의해 찢겨진 것이다. 좀 좁혀서 볼 때 나라라는 것은 공적이다. 또한 나라의 중추인 민중도 공이다. 그러나 그것이 깨지는 한 정의는 있을 수 없고, 따라서 복지사회도 있을 수 없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도 바로 이 공을 지킨다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런데 종교마저도 사유화로 줄달음침으로써 점점 분화되어가고만 있다. 그래서 교회도 개교회화, 즉 사물화되어간다. 이것이 타락의 과정이다.


선악과가 ‘지혜’라면 ‘지혜’는 공적인 것으로 하느님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따 먹음으로 하느님과 같이 되겠다는 것은 바로 공을 사유화하겠다는 욕심이다.


선악과를 성(性)이라고 해석한다면 성도 공적인 것이다. 이 성을 사유화하는 그것이 바로 타락이다. 어떻게 한 인격이 내 소유가 될 수 있나? 일부일처제마저도 사유화라면, 그것은 공의 침범이다.


공적인 것을 사유화하는 삶이 시작되므로 한 마당은 끝났다. 그리고 사유화의 여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사유화의 역사는 하느님마저 사유화하겠다는 것으로 첨예화된다. 사유화 역사의 첫마당에서 카인이 아벨을 죽인다. 그 이유는 신을 독점하겠다는 싸움이다. 바벨탑의 이야기도 이 범주에 속한다. 종교간의 싸움도 바로 하느님을 사유하려는 싸움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러한 싸움에 가장 적극적인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이다. 그리스도교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피를 흘린 종교가 되어버렸는데, 이것은 신의 사유화의 욕구와 서구 제국의 권력 사유화의 욕구가 야합하여 이루어진 죄악이다.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이 확실히 주장한다. 공을 사유화하는 것이 바로 죄이며, 이같은 죄인은 더 이상 낙원을 향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담과 이브는 낙원에서 추방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처음 사람 아담이 범죄함으로 모든 인류가 죄의 영역에 들어 왔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같은 죄의 영역에서 해방될 수 있는 문이 열렸다고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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