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 기획 기사] 네, 다음 ‘글’(김윤동)

2022-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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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다음 ‘글’



김윤동(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기획실장)

 


활자와 글의 시대가 저물고 이미지와 영상의 시대다. ‘직관적’이라는 말은 가장 이 시대의 적합하고 아름다운 말이 되었다. 무엇이든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어야 하며, ‘~에 관하여’ 주저리주저리 설명을 덧붙이면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게 되었다. 말만 하면 사족을 붙이지 말라고 핀잔을 듣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제3시대는 2021년에 비평연습이라는 강좌를 시작했다. 글을 쓰는 작업이다. 될 수 있으면 이미지, 될 수 있으면 영상, 그것마저 안 되면 최대한 짧게 표현하는 게 ‘대세’인 지금 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지 않는 ‘비평연습’이란 강좌를 열게 되었을까? 유튜브를 하루에 한 개씩 만들어도 모자랄 판에 우리는 4월에는 <성서는 동성애를 반대하는가?>라는 제목으로 8번, 그리고 7월에는 <성서를 읽고 성서와 함께 말걸기>라는 이름으로 6번의 강좌 동안 끊임없이 강사와 수강생이 서로 글을 주고받고 있다. 우리는 이런 시대에도 계속해서 ‘쓰는 사람’을 찾아 나서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진행하는 글쓰기 모임의 타이틀은 ‘비평연습’이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비평이 아니다. 우리에게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란 책으로도 잘 알려진 일본의 사상가이자 작가인 사사키 아타루(佐々木中)는 ‘비평가적 지식’과 ‘전문가적 지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양 쪽을 비판하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비평, 더 나아가 ‘지식’이란 것에 대해서 뼈아픈 통찰을 준다.

 

꼴사납게도 정보에 토실토실 살이 찌고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비평가가 될 것인가, 초라하게 자기 진영에 틀어박혀 비쩍 말라가는 전문가가 될 것인가. 혹은 각 자리에 어울리게 그 두 개의 가면을 재빨리 교체하며 살아갈 것인가.

 

즉, 비평가는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또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언제든 어떤 상황에서든 ‘모든 것’에 대해서 ‘한 마디’씩 거들 수 있어야 한다. 온갖 것들, 그 ‘모든 것’에 대해 “그거야 알고 있지. 이러이러한 거잖아, 그건 그런 것에 지나지 않아”라고 반사적으로 말할 수 있게 되는 것, 메타 레벨에 서서 자신의 우위성을 보여주려는 것, 그것이 비평가의 지식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전문가적 지식이란 비평가적 지식과 어떤 면에서는 같지만 또 이와 약간은 다르게, 어떤 ‘한 가지’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 지식을 가리킨다. 이 둘은 서로 비슷한 양상이므로, 때로는 결합하여 폐쇄적으로 발현한다. 시야가 닫힌 채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우리의 글쓰기는 역설적으로 정보로부터 자신을 차단하고, 무지로 들어가는 일. 필터를 해제시키는 일. 지도 없이 방황하는 일, 여행하는 일이다. 우리는 많은 지식과 타자의 명령들을 들어서 자유롭고 해방될 수 있을 거라 믿지만 알고 보면 그 명령들로부터 벗어난 곳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는 동인모임으로 시작한 1991년부터 올해로 30년간의 여정을 이어왔다. 그 여정의 중심에는 ‘민중신학’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그 ‘민중신학’이 지향했던 것이 무엇인가? 개인의 이름은커녕 어떤 집단으로도 소속되지 못하여 호명되지 못한 사람들, 이름 없던 사람들에게 이름을 붙여주는 여정이었다. 자기 언어를 잃어버린 사람들, 표현하고 싶어도 표현할 수 없는 사람들의 창구가 되어줄뿐더러 언어를 되찾아주고 나아가 새로 창조하는 여정이었다.

 

지금 우리의 ‘쓰기’는 현재 글과 텍스트를 이용해 쓰지만, 앞으로도 다양한 쓰기의 방식을 탐구할 예정이다. 다행스럽게 올 상반기에 이뤄진 글쓰기 작업들은 성서를 비롯한 다양한 텍스트를 다시 읽어보면서 그를 지렛대삼아 수강생 스스로 자신의 언어를 창조하고자 하는 열정을 확인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2021년 하반기에는 더 많은 사람들의 애정과 열정이 담긴 쓰기의 작업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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