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기획 기사] 차별금지법을 만들면 세상이 어지러워질까요(황용연)

2022-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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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금지법을 만들면 세상이 어지러워질까요



황용연(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기획위원장)

 


1.


야구사이트에서 제가 응원하는 팀의 어떤 노장투수를 두고 말이 오간 적이 있었습니다. 작년까진 그럭저럭 해 주다가 올해 들어서 상당히 부진하던 중에 어느 경기에서 부진한 투구를 하던 자신을 강판시키자 강하게 반발하는 모습을 보여서 팬들에게 지탄을 받고 있었는데요.

 

그 투수가 작년에 자신의 몸 관리를 위해서 채식을 하겠다고 선언을 했었습니다. 앞 문단 같은 상황이 되니 그 채식이란 것에도 불평을 하는 팬들이 있더라고요. 운동선수가 채식하고 힘이 나겠느냐고 말이죠. 동의는 안 됐지만 그런 말이 나오는 것에 그러려니 하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원래 채식을 하던 사람도 아니고 선수단 중에 자기 말고 채식하는 사람도 없는데 선수단 급식에 자기 혼자만을 위해서 채식을 해 달라 이런 건 이기적인 행동 아니냐고. 이 글 읽으시는 분들 중에 왜 그게 이기적인 행동이냐고 반문 안 하실 분 없으시겠죠?

 


2.


양심적 병역거부 처벌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이 나온 후 대체복무 제도가 교정시설 합숙 복무 36개월로 마련되었지요. 제도가 저렇게 될 것이라는 말들이 나오고 병역거부자들이 반발할 때,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지인과 페이스북에서 논쟁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나름 진보적이라는 대중 역사책을 써서 알려진 필자이기도 한 그 지인은 병역거부자를 처벌하지 않게 된 건 다행이지만 '양심적' 병역거부자라는데 국가가 저런 정도의 대체복무를 부과하는 것도 싫다면 그 양심을 어떻게 생각해야 되겠느냐고, 군대 가는 사람들과 형평성 측면도 생각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 하더군요.

 

이 지인과 논쟁을 하면서 저는 36개월이 너무 길다느니 이런 식으로 논쟁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묻고 싶어지더라고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양심이란 것이 왜 증명을 해야 할 문제인지, 병역거부자들에게는 교정시설이니 36개월이니 뭔가 더 많은 것을 부과해야 형평성이 맞다는 게 자연스러운 양 이야기되고 있는데 그게 왜 자연스러운 것인지.

 


3.


차별금지법이 국회에 처음 상정된 것이 어느덧 14년째가 되어가는데요. 그동안 차별금지법에 대해서 주로 시비를 거는 집단이 소위 '개독교'였고 그들이 성소수자 이슈를 가지고 시비를 걸다 보니 이 문제가 주로 성소수자 혹은 페미니즘 문제로 인식된 감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광경이 펼쳐지냐면, '개독교' 쪽에서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성소수자들이 맘껏 설치고 다녀 세상이 어지러워지고 교회의 입은 틀어 막힐 거란 말들을 하고 나서면 곳곳에서 그게 무슨 헛소리냐는 반박이 쏟아지죠. 그러면서 은연중에 차별금지법이 생겨도 '개독교'가 멋대로 혐오발언을 못 하게 될 뿐이고 성소수자들이 그냥 정상적인 시민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뿐이지 '개독교'가 말하는 식으로 세상이 어지러워지는 일은 없을 거다 이런 생각들이 정립되는 거지요.

 

그런데 말이죠. 한 번 이렇게 물어 보고 싶은 거죠. 정말로 '세상이 어지러워지는 일은 없다'라면, 차별금지법이란 걸 왜 만드는 것일지요.

 


4.


앞에서 언급한 양심적 병역거부로 돌아가 보면, 양심적 병역거부는 당연히 져야 하는 병역의 의무를 거부하는 것이니 처벌 받아야 한다는 그동안의 관점에서, 정 양심 때문에 못 하겠다면 인정은 해 주겠다는 태도로 이제야 겨우 바뀌었죠. 그러면서도 군대 가기 싫은 사람이 제도를 악용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며, 위에서 언급했듯 "교정시설 36개월" 같은 식의 핸디캡을 얹는 것을 당연히들 여기지요.

 

여기서 한 가지 의아한 것. 양심적 병역거부는 헌법의 양심의 자유에 근거한 행위이죠. 그렇다면 군대 가기 싫은 사람이 악용이니 뭐니 이런 거 따지기 전에 양심적 병역거부가 시민으로서 할 수 있는 정당한 행위의 하나이며 병역의무 수행과 동등한 자격을 갖는 것이란 말일 테죠. 그렇다면 악용의 가능성을 막기 위해 양심적 병역거부에 핸디캡을 준다는 발상이 아니라,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당연히 가져야 하는 시민으로서의 동등한 자격을 보장하는 것이 우선이고 악용의 가능성을 막는 것은 그 다음이다 이래야 하는 거 아닐런지요.

 

이런 이야기의 범위를 좀 더 넓혀 본다면, 차별금지법을 비롯하여 이전에는 사회적 표준에서 인정받지 못하던 존재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전의 사회적 표준의 대부분을 그대로 놓아 두고 그 표준을 따라 살아가던 사람들의 사회적 자존심을 그대로 용인해 준 채 소수의 존재에 대한 관용의 자리를 마련해 주는 건 아닐 거다 싶은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 반대로, 그 표준과 그 자존심 자체를 상당히 흔들어 버리는 일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해요. 만약에 그렇게 흔들어서만 소수의 존재들이 동등한 시민이 될 수 있다면 말이죠. 예를 들어, 차별금지법으로 인해 청소년 성소수자가 많아지면 안 되지 않겠냐 이런 식의 말에 대해서, 차별금지법이 만들어진다고 이성애자가 성소수자로 바뀌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이런 식으로 말할 수도 있겠지만, 설령 많아진다 한들 그게 뭐가 문제냐 그것은 그 청소년 개개인의 시민권의 문제 아니냐 이렇게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거죠. 그러면서 청소년 시절부터 내가 이성애자로 꼭 살지 않아도 된다면 어떤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고 그러면 사회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통로를 열어야 하는 거 아닐까요.

 


5.


마침 최근에 양심적 병역거부를 주로 수행하던 특정 종교의 신도가 아닌 사람이 처음으로 양심적 벙역거부를 법원에서 인정받았다는 소식이 들려 왔죠. 여전히 국가가 양심을 검증할 수 있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깔려 있는 한계는 있지만, 어쨌든 하나의 전진을 이룬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여기에 가벼운 이야기 하나 얹으면서 글을 마치죠. 서두에 언급했던 그 투수가 최근에 또 등판을 했는데요. 다들 경기 전에 패배를 예상했는데, 웬걸요. 당당히 승리투수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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