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기획 기사] 그 하느님은 ‘성기’가 없다 : 퀴어비평과 민중신학의 만남에 대하여(김진호)

2022-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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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하느님은 ‘성기’가 없다

퀴어비평과 민중신학의 만남에 대하여



김진호(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이사)



주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이다. 

“너는 ... 아론에게 ‘죽지 않으려거든, ...... 

휘장 안쪽 거룩한 곳 곧 법궤를 덮은 덮개 앞으로 나아가지 말라’고 일러라. 

내가 구름에 휩싸여 있다가 ‘그 덮개’ 위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레위기〉 16,2)



그 신은 ‘퀴어하다’


사경, 오경, 혹은 그 이상의 제1성서 문서들을 통으로 꿰뚫어 연결하는 빅픽처(big pictuer)가 있었다는 것은 학계의 오래된 정설에 속한다. 그리고 이 빅픽처가 적어도 두 범주(제사장과 자료와 신명기계 자료. 흔히 이들 각각을 P.와 Dtr.로 줄여쓴다)로 계보화된다는 것도, 다양한 하위가설들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널리 인정되고 있는 가설이다. 그중 하나인 제사장계 자료(Priestly Code, 이하 P)에 따르면 신은 형체를 갖지 않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그 신은 보이지 않는다. 즉 그분의 존재양식은 ‘형체’(besalmenu)가 아니라 ‘영광’(kabod)이다. 《퀴어성서주석》의 저자 중 하나이고 〈레위기〉 연구자인 데이비드 스튜어트(David Tabb Stewart)에 의하면 〈출애굽기〉의 P자료층에서 그 ‘영광’의 자리는 ‘구름 속’이었는데, 〈레위기〉에선 언약궤 덮개인 케루빔(cherubim)1) 사이다. 구름이 있는 곳을 상징하는 장소가 ‘광야’나 ‘산’이라면 언약계가 있는 곳은 ‘회막’(the tent of the meeting, ohel moed)이다. 신은 이제 떠돌기를 멈추었고 정착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신은 형체가 없다.


그런데 (P가 해체하고자 했던) 신의 ‘형체’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이나 팔레스티나의 부족들은 신을 인간의 모습 혹은 반인반수의 모습으로 형체를 만들었다. 그 신은 남성이기도 하고 여성이기도 하며 때로 간성(intersex)이기도 했다. 하여 P의 신, ‘구름 속’ 혹은 ‘회막’의 형체 없는 그 신은 ‘성기’가 없다. 스튜어트의 표현에 따르면 ‘젠더 없는 신’(degendered Yahweh)이다.


이렇게 〈레위기〉를 포함한 사경 문서들을 꿰뚫고 있는 빅픽쳐의 산물인 P의 그 신은 ‘성적으로 기괴한 존재’다. 이를 ‘퀴어’(queer)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P에서 그 신은 퀴어적으로 묘사되었다. 나아가 신이 퀴어하다는 것은 세계가 퀴어하게 될 때 더 위대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퀴어한 신에 부합하는 세계를 어떻게 디자인할 수 있을까? 이런 해석을 성서에 대한 ‘퀴어비평’(queer criticism)이라고 부른다. 



〈레위기〉와 민중신학적 비평


지난해에 출간된 나의 책 《성서와 동성애》는 성서 속에 동성애 혐오주의가 있는지를 역사학적으로 검증해보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역사비평학적 방법을 충실하게 적용한 분석을 시도했다. 여기서 다양한 성소수자 가운데 동성애자만을 주목한 것은 한국개신교의 반동성애 세력이 성소수자 문제를 동성애 문제로 국한해서 혐오주의를 소리높여 외쳤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그들이 주장하는 성서 속의 반동성애 텍스트들은 몇 개 되지도 않을 뿐더러, 하나 같이 근거가 약한 과잉해석의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레위기〉 20,13 “남자가 같은 남자와 동침하여, 여자에게 하듯 그 남자에게 하면, 그 두 사람은 망측한 짓을 한 것이므로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처럼 남성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구절이 있다. 하지만 텍스트의 문맥을 면밀하게 살피고 그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정황을 통해 추론해보면 제사장 중심의 유다계 귀환공동체 집단의 헤게모니 전략의 일환으로 이 구절이 활용된 흔적을 읽어낼 수 있다. 


조금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이렇다. 오래 전부터 지중해와 메소포타미아 곳곳에서 벌어져 왔던 대표적 풍요제의인 ‘거룩한 결혼’(hieros gamos) 의례는 신을 상징하는 제사장과 씨족이나 마을의 대표가 가상결혼식을 거행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이 의례의 결정판은 두 결혼 당사자의 동침이다. 이스라엘에도 그런 거룩한 결혼의례가 야훼성전에서 벌어져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흔적을 〈호세아서〉 4,14에서 확인할 수 있다. “너희 남자들도 ‘창녀’들과 함께 음행을 하고, ‘창녀’들과 함께 희생제사를 드리는데”에서 ‘창녀’로 번역된 두 단어는 각기 다른 히브리어를 옮긴 것이다. 전자는 ‘조놋트’(zonoth)이고 후자는 ‘케데사’(qedeshah)다. 문맥상으로도 “함께 음행을 하다”와 “함께 희생제사를 드리다”와 연결된 것에도 볼 수 있듯이 이 두 단어는 다른 함의를 갖고 있다. 해서 신뢰할 만한 여러 영어 성서들에서는 두 단어를 다르게 옮겼다. 즉 ‘조놋트’는 ‘매춘여성’을 뜻하는 ‘harlots’이나  ‘whores’로 번역된 반면, ‘케데사’는 ‘성창’이라는 뜻의 ‘cult prostitutes’나 ‘shrine prostitutes’로 쓰여졌다. 한편 군주제 시대에는 여성인 제사장이나 예언자들이 종종 존재했는데, 식민지 시대에는 여성종교인들이 사라졌다. 그렇다면 이 시기 ‘거룩한 결혼’ 예식에 참여하는 제사장들은 남성이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게다가 헬레니즘 시대에 오면 그리스에서 유래한 남성간 성관계에 대한 철학적 찬사들이 신문명으로 유입되어 들어오면서 성전에서의 ‘거룩한 결혼’이 남성 동성 간의 동침으로 실행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헬레니즘 시대의 문헌으로 보이는 〈레위기〉에서 남성끼리 성관계 하는 자를 극형에 처하라는 말은, 남성간 성행위 자체에 초점이 있다기보다는 ‘거룩한 결혼’ 예식의 척결에 목적을 두었다고 보는 것이 더 개연성이 있다. 형체 없는 신을 강조하는 〈레위기〉는 ‘거룩한 결혼’ 풍조를 우상숭배로 간주하여 축출할 때 자신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귀환공동체가 이 지역에서 다른 유력 세력들의 영향력을 거세시켜 땅의 종주권을 장악하려는 것이 〈레위기〉의 최종 목표였던 것이다. 


그것을 위해 민중신학적 비평이 유효했다. 민중신학적 비평이란 민중의 시각에서 텍스트를 읽으려는 비평방법이다. 즉 〈레위기〉 텍스트의 시각을 대표하는 유다계 귀환공동체의 엘리트 제사장의 관점이 아닌, 그 텍스트 속에 감추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민중신학적인 역사적 비평을 통해 힐끗힐끗 드러나는 민초의 시각으로 텍스트를 다시 읽음으로써 이들 엘리트 제사장 세력의 정치공학적 기획을 개연성 있게 추론해낼 수 있다. 민중이 그 텍스트 구성의 주역이 아니기 때문에, 곧 텍스트 자체는 그 구성 주체들이 민중을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활용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민중의 시각으로 해석하려면 이데올로기 비평이 필요하다. 요컨대 민중신학적 비평은 이데올로기적 비평 방법을 적극 활용하되, 그것을 민중의 관점에서 읽어내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페미니스트 비평도 텍스트가 여성을 도구화하여 자신의 정치적 기획에 동원하고 있는 것들이기에 이데올로기 비평을 필요로 한다.


한데 이 책은 퀴어비평을 시도하지는 못했다. 실은 책의 결론부에서 글 한 편을 더 기획했었다. 시론적이나마 민중신학적인 퀴어비평을 이야기하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성소수자의 시각에서 텍스트를 읽어내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레위기〉와 퀴어비평


그때 참고했던 글 중 하나가 《퀴어성서주석》에 수록된 데이비드 스튜어트의 ‘〈레위기〉 주석’이었다. 실은 참고하고자 했지만 해독에 실패했기에 참고하지 못했다. 생소한 정보들도 많았고 그의 해석 중 많은 부분이 잘 독해되지 않았다. 줄줄이 기다리고 있는 작업 스케줄에 떠밀려 스스로 정한 출판 일정에 대한 압박 때문에 더 치열하게 검토하지 못한 탓도 있다. 아무튼 책의 결론부에 첨가하려 했던 그 한 장은 수록될 수 없었다.


그로부터 1년 정도 지나서 《퀴어성서주석, 1. 히브리성서》의 한글번역본이 발간되었다. 엄청난 관심을 받으며 많은 이들이 구매했다.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그 책의 번역본을 기대한 이들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책을 구입하자마자 내가 처음 읽은 글은 당연히 스튜어트의 논문이다. 한글로도 난해하긴 마찬가지지만, 영어에 서투른 자에게 이 번역서는 행복한 선물이었다. 


아무튼 그의 글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레위기〉 속에서 무수한 성소수자의 흔적이 넘실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데 있다. 성서 텍스트 가운데 유난히 성(sexuality)에 대한 묘사가 많고, 그것들이 이 문서를 떠받들고 있는 강박적인 ‘성결’의 관점에서 무자비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심지어 극단적 척결의 대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이 문서에 대한 통념이었다. 한데 〈레위기〉 전문연구자이자 퀴어비평가인 스튜어트에게는 전혀 새롭게 해독되었다. 성서의 다른 데서는 볼 수 없는 성소수자의 목소리들이 도처에 숨겨져 있고, 심지어는 성서의 다른 어떤 문서들보다 그 목소리들에 대한 진취적 평가가 발견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 글의 제목으로 잡은 ‘성기 없는 하느님’이라는 표현은 P의 하느님을 ‘젠더 없는 신’이라고 말한 스튜어트의 해석을 임의로 고쳐 쓴 것이다. 불경스럽다는 생각에 분노할 이도 있겠다. 또 선정적 표현이라는 생각에 거부감을 갖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참아 주면 좋겠다. 내가 ‘신의 성기’라는 표현을 쓴 것은 그것이 고대사회에서는 ‘풍요’를 상징하는 기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특히 고대 이집트의 신 ‘민’(mnw), 그리스신화 속의 아프로디데와 디오니소스 사이에서 태어난 신 프리아포스(Priapos) 등에게서 성기는 풍요를 상징하고 있다.


다시 스튜어트의 주석으로 돌아가 보자. 그는 ‘성기 없는 신’에 대한 이해를 단서로 해서 〈레위기〉에 나오는 여러 섹슈얼리티에 대한 텍스트를 새롭게 읽어내고 있다. 말했듯이 놀랍게도 내 눈에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던 여러 성소수자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더욱이 저자는, 우리 시대와 비교하자면 인식의 한계가 엿보이는 표현들이 〈레위기〉 속에 드러나고 있지만, 동시대 다른 문서들과 비교할 때 어떤 경우는 덜 혐오적이고 또 어떤 경우는 꽤 진취적인 섹슈얼리티 관점을 읽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정치적으로 진보적이고 민중적인 개혁의 관점이 두드러진 문서 전승인 〈신명기〉가 성소수자에 대해서는 훨씬 더 배타적인데 반해 〈레위기〉는 좀더 포용적이라는 것이다.


가령 〈신명기〉에는 “고환이 터졌거나 음경이 잘린 사람은, 주님의 총회(qahal) 회원이 되지 못합니다.”(23,1)라고 말하지만, 〈레위기〉는 “...... 고환이 상한 사람들......도 하나님께 바친 음식 곧 가장 거룩한 제물과 거룩한 일반제물을 먹을 수는 있다. 다만 ...... 제단에[을] ...... 더럽히는 일만은 삼가야 한다.”(21,20~23)고 좀더 포용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즉 〈신명기〉는 하느님의 법 공동체에서 성소수자를 배제하고 있지만, 〈레위기〉는 그들을 제사장이 될 수 없지만 공동체에 속할 수는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또 26,3~39을 저자는 미리암과 그를 추종하는 여성들의 노래라고 본다. 스튜어트에게서 ‘미리암’이라는 기표는 성전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여성이 아니라 지도자인 여성을 뜻한다. 그런 그녀들은 미리암, 드보라, 한나처럼 성전에서 승전가를 부른다. 그런 맥락에서 스튜어트는 이 단락을 회막에서 예배의 주요 부분을 담당하는 여성 지도자들이 부르는 노래라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그들의 노래가 특별히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이 유토피아적 성공에 대한 서사시로 일관하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거기에는 디스토피아적 위기에 대한 성찰의 요청이 담겼다. 스튜어트는 이 점에서 〈신명기〉에서 노래 부르는 여성이 무명이고 그 내용이 축복에 치우쳐 있다는 것과 비교된다고 주장한다. 해서 진보적 혹은 민중적인 텍스트라는 〈신명기〉보다 〈레위기〉가 더욱 진취적인 모습을 보이는 대목을 바로 이 부분에서 뚜렷이 찾아볼 수 있으며, 이 중요한 노래를 부르는 주체가 비혼의 여성 지도자, 그의 표현으로는 ‘미리암과 그녀의 여성집단’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들을 그는 ‘레즈비언 미리암’이라고 부른다.


곧 〈레위기〉에는 성소수자들이 넘실대고 있고 그들이 공동체에서 완전히 배제되지 않는 양상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야훼도 ‘젠더 없는 신’으로 표상되었다는 것이다. 스튜어트에 의하면, 이것은 그 사회의 퀴어적 기조의 산물인데, 바로 그런 맥락에서 “너는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19,18)라거나 “너희와 함께 사는 그 외국인 나그네를 너희의 본토인처럼 여기고, 그를 너희의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19,34) 같은 빛나는 윤리가 제시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거니와 나는 〈레위기〉 속에서 이렇게 퀴어적 주체들의 소리가 넘실거리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스튜어트의 비평은 내겐 새로운 안목을 주었다. 



퀴어비평과 민중신학의 만남


하지만 동시에 나는 채워지지 않는 미묘한 갈증을 느낀다. 그것은, 스튜어트 자신이 지적하고 있듯이, 〈레위기〉의 율법은 ‘이스라엘’에만 적용된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때 그가 말하는 이스라엘은 필경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 지역에 국한될 것이다. 이 문서 저자들의 진정한 이스라엘에 속하는 상상적 지리학의 범위는 유대를 넘어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들은 유대 지역에 대한 성결을 강조한다. 그리고 다른 지역은 근원적으로 우상숭배자들의 땅이다. 이 문서에서는 그 공간적 분리가 단호하다. 그런 점에서 이 문서는 분리주의 정치학에 기반을 둔 세력의 담론이다. 


한데 학자들에 의해 ‘제3이사야’라고 불리는 익명의 예언자와 그의 추종자들은, P와 거의 동시대에 그런 분리주의와는 다른 기획을 이야기한다. 그들은 모든 억압당하는 이들을 예루살렘으로 모이라고 말한다. 그 땅에 세워진 주님의 성전은, 순혈의 사람들만의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만민을 위한 집이라고 말이다.(〈이사야서〉 56,7) 그런 점에서 ‘제3이사야’에게서 예루살렘은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해방’을 상징하는 땅이다. 그리고 그 땅에 모인 만민이 지켜야 하는 신앙의 원리는, 순혈주의자에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다. 여기서 ‘제3이사야’에게 안식일이란 ‘정의’(sedeq. justice)를 지키고 ‘올바른 일’(sedaqah, rightness)을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이사야서〉 56,2~2) 


요컨대 스튜어트가 〈레위기〉에서 성소수자들의 수많은 목소리들을 읽어낸 것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내가 미묘한 아쉬움의 마음을 지울 수 없었던 이유는, 이 문서가 성서의 다른 어느 것보다도 진취적이라는 그의 주장과는 달리, 순혈주의적 배타주의가 넘실거린다는 점에 있다. 또한, 나의 책 《성서와 동성애》에서 이야기하고 있듯이, 이 문서는 ‘외부의 적’을 상징적으로 표상하는 ‘내부의 적’으로 다양한 퀴어적 존재들을 지목하고 있다. 즉 이들 ‘내부의 적’으로 지목된 이들을 응징함으로써 ‘외부의 적’으로부터 그 사회를 수호하려는 보수주의적 안보론이 이 문서의 기본 골격을 이루고 있다.


퀴어비평은 퀴어의 시선으로 성서를 읽는다는 점에서 중요한 안목을 제공한다. 과거에 진보적 혹은 민중적 비평은, 바로 내가 바로 그랬던 것처럼, 퀴어적 시선을 결여하고 있었기에,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퀴어에 대한 억압의 담론을 용인하는 과오를 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퀴어적 시선으로 모든 진보적 혹은 민중적 관점을 해체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퀴어비평과 민중신학 혹은 진보신학적 비평은 서로 교차하며 연결되어야 한다. 당연히 퀴어비평가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많은 (남성)이성애자들의 퀴어적 존재에 대한 몰이해처럼, 사회적 배제에 대해 퀴어비평가들이 무관심하다면 그것도 문제적이다. 어쩌면 스튜어트의 ‘〈레위기〉 주석’도 그런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에서 나는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반면 〈신명기〉 개혁을 주도한 요시야 왕실은 퀴어에 대한 문제의식은 부족했지만 농민(노동자)의 몰락을 억제하고자 했고 몰락한 농민(노동자)의 복원을 골자로 하는 개혁문서인 ‘〈신명기〉 원본’을 만들어냈다. 물론 이러한 민중적 개혁은 요시야 왕을 필두로 하는 개혁 진영에 정치세력화된 농민운동그룹2)이 개입했기에 가능했다. 아무튼 〈신명기〉가 군주국 유다 시대의 진보적 개혁을 상징하는 문서였다면, 〈레위기〉는 식민지재건공동체 시대 보수적 개혁을 상징하는 문서다.


이런 관점에서 P의 ‘성기 없는 신’이 의미하는 것이 과연 충분히 퀴어적 사유를 반영하고 있는가에 대해 의문이 든다. 말했듯이 신의 성기는 출산에 대한 은유다. 그것은 그 신의 제사가 풍요제의의 성격을 갖는다는 것을 뜻한다. 풍요제의는 기본적으로 농민(노동자)의 시선이다. 그렇다면 ‘성기 없는 신’은 풍요라는 축복을 강조할 필요를 못 느끼는 신이 아닐까? 풍요를 향한 염원을 탐욕으로 보는 시선은 다분히 궁핍에 무감각한 엘리트 제사장의 관점이 아닐까?


바벨로니아에서 돌아와서 예루살렘과 그 인근에 재정착한 귀환자 공동체는 점점 제사장 중심의 사회로 변모하고 있었다. 적어도 페르시아 제국 후기부터는 그랬다. 그 변곡점에 느헤미야와 에스라가 있다. 이 둘은 페르시아의 관료 출신 인사들로, 예루살렘의 유다계 귀환자들과 페르시아 중앙정부 간의 긴밀한 네트워크를 활용하는 정치를 폈다. 페르시아는 제국 곳곳에 친페르시아 인사들이 다스리는 체제가 정착하기를 기대했고, 느헤미야와 에스라 같은 이들은 페르시아의 그런 귀환자 정책을 활용해서 유다체제를 재구축하고자 했던 것이다. 느헤미야는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을 재건축했고, 에스라는 그 사회에 규범적 질서를 구축하려 했다. 에스라 자신이 아론계 제사장이라는 사실에서 드러나듯 이때 규범적 질서의 자리를 채운 것은 ‘제사장들의 규범’이었던 율법이었다. 하여 이후 사회는 제사장들의 계보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들 유다계 엘리트 제사장들은 하루하루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민초들과는 사정이 달랐다. 해서 그들은 신에 대한 제사를 통해 풍요를 열망했던 민초의 바람과는 다른 신을 추구할 수 있었다.


아무튼 이들 귀환자 공동체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유배되었을 때 그 땅을 선점했던 이들과 땅의 종주권을 둘러싸고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물론 귀환자들은 열세였다. 이때 그들이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내걸은 기조가 순결주의다. 제사장 중심의 공동체이니만큼 ‘순결’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이웃 부족들에 비해 그들이 비교우위에 있었다. 한데 그런 순결을 유난히 강조하는 텍스트가 바로 〈레위기〉다. 말했듯이 이 문서 역시 아론계 제사장 계보의 영향력이 강하게 드러나는 문서다.


이제 유대 지방의 민초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그 땅의 대중은 더 이상 유다국의 백성이 아니다. 그 나라는 이미 오래 전에 멸망했고, 팔레스티나의 다른 나라들도 사라졌다. 또 그 나라들을 멸망하게 했던 제국들은 너무 멀리 있었다. 뜻하지 않게 시리아와 팔레스티나에는 강력한 중앙집권력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세력이 부재하게 되었다. 각 지역마다 그럴싸한 권력층이 생겨났지만 과거 군주국 시대 같은 강력한 통제력을 보여주는 정치체제는 성립되지 않았던 것이다.3) 해서 그 땅의 민초들은 서로 연결망을 형성하면서 안전을 도모하는 탈권력의 네트워크를 만들어냈을 법하다. 왜냐면 그때에도 민초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탈법적) 군사집단들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혼인은 마을과 마을, 지역과 지역 간의 상생의 네트워크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그런 방식으로 그 시대 민초들은 서로 뒤섞여 살게 되었다. 완전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렇게 그들은 서로 적대하지 않고 친밀한 이웃으로 살고 있었다. 


그런 이들에게 귀환자 엘리트들은 과거 유다국 재건을 목표로 하여 유다 지역에 분리주의 프레임을 덧씌우려 한다. 〈레위기〉나 〈에스라서〉, 〈느헤미야서〉 등은 가장 두드러진 분리주의적 텍스트다. 섹슈얼리티에 대한 무수한 공격의 말들은 이들 분리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고 있다. 말했듯이 이 문서의 주역이 엘리트 제사장 세력과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신명기 개혁’을 주도했던 이들은 진보적이었고 또 민중적이기도 했지만 섹슈얼리티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다. 〈신명기〉 속의 숱한 진보적이고 민중적 담론에도 불구하고 퀴어나 젠더에 대해서는 전통적인 가부장제적 통념을 반복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겠다.


반면 〈레위기〉의 주체들은 보수적이었지만 무수한 섹슈얼리티를 정치공학적으로 활용하는 과정에서 민중의 다양한 성적 관행들을 알게 되었겠다. 하여 사람들의 일상에서는 흔하게 일어나는 다양한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현상들이 중앙정치의 담화 속으로 들어왔다. 보수주의적 엘리트 제사장들에게 그것은 ‘외부의 적’인 이방 족속들의 혐오적 풍습으로 간주되었다. 이 문서 속에서 그런 풍습은 단호히 배척해야 할 것이었고, 그런 풍습에 물든 이들은 척결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 문서의 골격을 이루는 지배적 사사가 큰 틀에선 일관되게 배타주의적 안보론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디테일 속에는 그런 풍조에 대한 민중의 적극적 해석들이 곳곳에 반영되어 있다. 〈신명기〉에선 그런 것들에 무관심한 탓에 다양한 섹슈얼리티를 열거하는 대신 추상적인 일반론을 폈고, 그 기조는 가부장제적 틀에 의존하고 있었다. 반면 민중의 해석이 〈레위기〉에선 도처에 숨은 듯 드러나 있었던 것이다. 내가 보지 못한 것을 스튜어트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섹슈얼리티에 대한 나의 무관심에 비해 그의 섬세한 사투가 이루어낸 결실이다. 그런 점에서, 페미니스트 비평이 그랬던 것처럼, 퀴어비평은 민중신학자에겐 너무나 필요한 사유의 동력이다.


그런데 스튜어트의 퀴어비평은 퀴어적 해석으로 보기에 충분히 적절한가. 말했듯이 그는 성서 속의 좀 더 진보적이고 민중적인 기획 속에 성소수자에 대한 배려가 없다는 것과 좀 더 보수적인 기획 속에 그들의 목소리가 발견된다는 것에 주목하면서 후자를 더 높이 평가한다. 그렇다면, 그가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퀴어비평은 진보적 혹은 민중적 기획을 필요로 하지 않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그런 문제제기의 연장선에서 〈레위기〉의 분리주의적 보수주의자들이 유다 지역에 대한 자신들의 헤게모니 기획을 위해 다양한 섹슈얼리티 현상을 도구화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그들은 그 지역의 자원들을 독점하고자 하는 세력이었다. 해서 자원을 박탈당한 숱한 민중의 아우성을 초래한 자들이다. 그런 이들의 하나인 성소수자들의 숨겨진 목소리를 발견한 것은 너무나 중요한 것이지만, 이데올로기적 비평을 통해 이들 성소수자들을 표적 삼아 분리주의를 정당화함으로써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강화하려 했던 정치공학적 기획을 해독해내는 것 같은 치밀한 분석이 결여된 것이라면 그 비평을 충분한 퀴어비평이라고 할 수 있을까.


스튜어트의 〈레위기〉 해석은 이 문서가 진보적 문서보다 더 진취적임을 강조하면서 황금률의 원조격되는 텍스트들(19,18・33~34)이 바로 〈레위기〉의 일부임을 강조한다. 하지만 자국민을 학살하고 온갖 폭력의 정치로 일관했던 5공 정권이 다른 어느 정부보다 ‘정의사회’라는 슬로건을 가장 적극적으로 내 걸은 것을 경험한 우리는, 스튜어트의 이런 주장에 단순히 동조할 수는 없다. 가장 나쁜 정치세력도 가장 훌륭한 수사를 통해 그 체제를 치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건은 그런 정치체제가 그만큼 진취적인 정치를 구현하려 했는가를 살피는 과정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성서에 대한 퀴어비평은 민중적 관점에서의 이데올로기 비평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온 민중신학의 조력이 필요하다. 즉 민중신학은 퀴어적 시선의 도움이 필요하고, 퀴어비평은 민중적 시각이 보완되어야 한다. 해서 두 범주의 성서비평은 서로 교차하며 발전해야 할 것이다.



1) 케루빔(cherubim)은 케룹(cherub)의 복수형으로, 한글 새번역성서과 개역개정성서에서는 ‘그룹’으로 음역했고, 공동번역성서는 ‘거룹’이라고 옮겼다. 이 존재는 언약궤 혹은 법궤의 덮개 양편에서 이 궤를 보호하는 일종의 수호천사로, 미슈나 전통에서 최상급의 위계에 있는 천사의 하나였다(12세기 랍비 모세 벤 마이몬). 

2) 므낫세의 아들 아몬은 왕이 되자마자 궁중정변으로 살해당하는데, 저 왕의 살해자들을 처형하고 요시야를 새 왕으로 추대한 이들을 〈열왕기〉는 ‘암하아레츠’라고 표현한다. 고대 팔레스티나의 문헌들 속의 ‘암하아레츠’는 농민 일반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지만, 〈열왕기〉에 등장하는 이 단어는 정치세력화된 집단으로 등장한다. 실제로 아몬의 부인이자 요시야의 모친은 보스갓(Bozkath) 출신인데, 그곳은 라기스 지방의 성읍이다. 라기스는 유다국에서 가장 넓은 곡창지대로 농민이 세력화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다. 특히 히스기야와 요시야 왕 이후 유다국이 멸망하기까지 민중적 개혁을 추동하는 라기스 지역의 농민세력이 왕권을 둘러싼 중앙정치적 갈등의 한 축으로 부상하고 있음이 포착된다. 그들의 성향이 〈신명기〉 개혁 속에 담겨 있다면, 그들은 정치적으로 민중적 시각을 대변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어떤 문헌적 자료도, 고고학적 출토물도 그 시대에 국가다운 흔적을 반영하는 정보를 주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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