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비평연습 특집] 질문들 : 비평연습 2회차 글쓰기(조명화)

2022-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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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들

비평연습 2회차 글쓰기



조명화



1.

 

구약 전공이 아니기 때문에 이 본문을 잘 이해하기 위해 그래서 문맥을 잘 파악하기 위해 19장 본문에 대한 석의와 관찰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궁금한 점은 이 레위인의 여정 중 여인의 집에 5일가량 머무르는 것을 왜 기록했는지이다. 레위인은 삼일을 그와 함께 거하며 먹고 마시며 거기서 유숙하다 나흘만에 떠났려 했지만 여인의 아버지의 만류로 이틀을 유숙한다. 그 장인은 친절한 사람이다. 3일도 아니고 5일이나 환대했다. 1절부터 10절까지 보여준 것은 그 아버지의 환대이다. 아마도 자신의 딸의 행복을 기원한 아버지로 그리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떠난 이들은 다시 밤을 맞이한다. 눈 앞에 여부스가 있어 하인은 그곳으로 가자고 청하나 주인인 레위인은 그곳에 외인의 성읍이라고 말한다. 그리고서 간 곳이 기브아이다. 그는 기브아가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를 집으로 영접하여 유숙케 하는 자가 없었다. 만일 교수님이 말한 대로의 정치적 문제가 첨예한 갈등 상황이었던 것을 레위인이 인식했다면 그는 기브아로 가지 않았을텐데. 그 레위인은 부족간 관계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것일까?

 

이때 한 에브라임 사람인 한 노인이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오다 그들을 만났다. 그는 무슨 이유로 기브아에 살고 있었을까? 그곳 사람들이 베냐민 사람인데 말이다. 어떤 연고가 되었든 그와 그의 딸은 그곳에서 별 탈없이 살고 있었다. 그는 고향으로 가고 있다는 나그네들에게 환대를 베푼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려진 이 장면은 곧 엄청난 재앙으로 변화한다.

 

그 성읍의 παρανόμων (무법한) 남자들(certain sons of Belial 19:22)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 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고 하며 그들을 위협한다. 이 위협이 성적인 것이 아닌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이것은 어쨌든 이 이야기의 중심 주제는 아니기에 넘어간다. 이 노인은 자신의 처녀 딸을 내어 준다. 앞선 레위인의 부인의 아버지와 대조되는 이야기이다. 이 노인의 정체는 무엇인가? 에브라임인었던 노인이 기브아 지역에서 대다수인 벤냐민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있었던 이유가 그 노인의 이런 해석 불가능한 생존의 본능 탓이 아니었을까?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라면 자식도 버릴 수 있는 아버지라면 그의 인간성은 대체 어떤 것일까? 또는 이 본문의 아버지인 노인의 행동은 딸에 대한 당대의 사고를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악을 행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이 사람이 자기 집에 들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노인에게는 과연 무엇이 악인가? 자신의 처녀 딸과 레위인의 여인이 있으니 맘껏 욕보이라고 말한다. 노인에게 선은 '자기 집에 온 사람을 환대하는 것' 그것뿐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신의 딸을 내어주는 것 이상으로 타인의 여인을 내어준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결국 노인이 내어준 것은 딸이 아니라 레위인의 여인이다. 그러나 아버지라는 이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성폭력으로 죽은 낯선 여인의 운명이 자기의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생각했을까?

 

이 기묘한고 두려운 상황 속에서 레위인 남편은 잠이 들었는지 두려워 숨었는지 아무런 말이 없다. 상황이 모두 종료된 새벽에 밖으로 나간 레위인이 발견한 것은 널부려진 부인이었으며 그는 그녀를 짐짝처럼 실어 나른 후 열 두 토막을 친다. 그리고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냈다. 성서 기자는 이 일로 인해 온 백성이 미스바로 모였다고 기록한다. 레위 사람은 자신과 부인이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유숙하러 갔더니 기브아 사람들이 나를 치러 일어나서 밤에 나의 우거한 집을 에워싸고, 죽이려 하고, 여인을 욕보여서 죽게 하였다고 말한다. 이것은 절반의 사실이다. 기브아 사람들은 레위인을 죽이려 하지는 않았고 여인을 욕보이게 한 것은 그들이지만 그녀를 내보낸 것이 노인과 자신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게다가 누군가의 귀한 딸인 한 여인을, 사위라는 이유로 그토록 환대 받은 레위인이 거기로부터 돌아오는 길에서 한 행동은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짓이였다. 죄악에 경중이 있을까마는, 악한 이들이라고 불린 그들보다 더한 악과 죄가 레위인에게 있다. 정치는 이런 것을 이용한다던데, 그는 에브라임의 베냐민에 대한 반감을 활용했고 에브라임은 그를 이용한다.

 

 

2.

 

노먼 갓월드가 정리한 성서 속 이스라엘의 사회적 조직 체계 즉, 아비의 집, 문중, 부족/지파, 부족연합에 대한 이론은 매우 타당하고 설득력이 있다. 특히 개인 및 가족 간의 신뢰로운 관계로 인해 평등한 사회 체계가 점차 조직적으로 발전하는 상황에서 점차로 생겨나는 체제 균열에 대한 이해가 그의 도식을 통해 잘 설명이 된다. 문중 내에서 평등이 얼마나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질문 자체가 해소되지는 않겠지만 거대 사회를 유지하는 과정 속에서 평등 사상이나 약자의 소리 같은 것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한데도 유다와 다말 이야기나 룻과 보아스의 이야기가 들려주는 평등한 마스파하 전통의 그림자를 볼 수 있다는 이야기는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과연 사회는 진화하고 있는가? 부족사회로부터 연합체가 되고 이것이 더욱 큰 국가라는 거대 사회가 되었던 것은 인류에게 어떤 유익이 있었는가? ‘왕’의 통치를 원한다며 소리치던 군중들로 인해 슬퍼하던 사무엘은 이렇게 말한다. “그가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어거하게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아들들을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무기와 병거의 장비도 만들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로 삼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에서 제일 좋은 것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의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너희의 양 떼의 십분의 일을 거두어 가리니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 그 날에 너희는 너희가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 이 무시무시한 경고의 말도 왕을 원하는 그들에게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며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라고 말한다. 결국 백성이 원하는 것은 평화가 아니라 전쟁이었다고 자유가 아니라 구속이었다. 이것은 충격적이다. 국가의 발생의 동기가 평화가 아니라 전쟁이라니. 인간이 원하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압제라니.

 

지배자들의 욕망에 의해 ,알렉산더 대왕 같은 정복자의 욕구에 의해 이루어진 하나의 거대 국가 체제의 존립에 대한 회의와 의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우문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현상으로서 이미 발생한지 너무나도 오래 된 것으로서 우리의 원함과 그렇지 않음과 그리 관계 없이 그렇게 된 것이다. 거대 국가 체제가 가진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들이 유럽과 미국에서 지속적으로 있는 것에 비해 한국이라는 땅에서 이루어지는, 전체주의를 닮은 명목상의 ‘민주주의’는 평화통일이라는 구호 속에서 정당화된다. 이것이 정치적인 이슈로 이용될 수 있다는 의식은 대중에게 없으며 이분법적 사고에 길들여져 있다. 종교도 교육도 정치도 사유의 체계도 거대한 자본주의 속에 잠식되는 중이다.

 

여기서 내게 문제가 된 것은 그런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부족이 하나 있었고 그것이 바로 에브라임 부족이라는 것이다. 그 에브라임 부족이 다른 부족보다 더 윤리적인 행위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성경을 알려주고 있지는 않다. 베냐민 지파에 대한 에브라임 부족의 증오는 평등 사상을 견지하려는 (선한) 에브라임 부족에게도 존재하는 악한 면모라고 봐야할까? 아니면 평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 반드시 평화를 가져오는 것만도 아니라는 사실을 반증라는 것으로 보아야 할까? 현상, 혹은 사건은 과거의 모든 관계 간 역학을 말해줄 수 없다. 많은 것이 말해질 수 없기에 때로는 물어야 하고 때로는 침묵하여야 한다. 그래서 여전히 나는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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