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기획 기사] 말 걸기 방식, 내가 오롯이 있기 위하여(홍성훈)

2022-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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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걸기 방식, 내가 오롯이 있기 위하여



홍성훈(작가)


 

한때 어머니와 다니는 일이 안심이 되었던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어디를 가든, 나를 처음 보는 사람들과 마주할 때면 이렇게 운을 뗐다.

 

“얘가 지금 대학원에서 공부중인데요. 제가 얘 낳을 때 난산을 해서 장애로 만들었어요. 아이고, 그때 조금이라도 힘을 줘서 쑥 낳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래도 머리는 좋아서 대학원까지 갔고요.”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어머니의 타임라인에서 나의 시간은 늘 같은 방향으로 흘렀다. 본인이 심한 난산을 했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한 이야기의 종착점은 내가 어느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는가, 였고 한 손가락으로 글을 써서 그 자리까지 갔다는 게 핵심 포인트였다. 어머니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어서 어느 순간 사람들은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듣곤 했었다.


사람들의 반응은 빠르게 나타났다. 나를 보는 시선이 45도에서 40도로 약간 이동했는데 그 각도는 휠체어가 아닌 그 위에 앉은 나를 조금 더 들여다 볼 수 있는 시야를 틔워 주었다. 곁에 있는 나는 뭘 그런 얘기까지 하냐는 식으로 어머니의 팔을 툭 쳤지만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극대화하기 위한 연출 기법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나도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어머니와 같이 있으면 사람들에게 굳이 나를 애써 설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특히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다’라는 말은 꽤 효과가 있었다. 몇몇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나에게 의사를 물어보기 시작했으니까. 바로 직전까지 아무리 나와 관련한 이야기를 하더라도 어머니나 활동지원사 선생님과만 시선을 맞추고 나와 관련된 의사결정을 두 사람에게 물어본 이들이었다. 말하자면 어머니는 기가 막힌 솜씨로 타인과 나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숙련공인 셈이었다. 아들을 장애인으로 만들었다는 죄책감과 그럼에도 이렇게 잘 키워냈다는 자부심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면서.

 

어머니의 이야기가 자주 반복될수록 내가 나를 설명하는 언어들이 점차 줄어만 갔다. 어느 순간 어머니와 비슷한 방식으로 나를 설명하고 있는 모습을 스스로 발견할 때면 하던 말을 뚝, 멈출 때가 많았다. 어머니의 죄책감을 이용하는 비열한 짓이었다. 또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사람들과 나 사이에 어떤 경계선이 생겨났다. 견고하게 그어진 경계선 속에서 사람들에게 나는 ‘관조’의 대상이었지, ‘비평’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더 이상 사람들은 나의 일상을 뒤흔들 만한 말을 하지 못했고 나도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상냥하고도 쓸쓸한 예의였다.

 

‘전환’의 순간이 찾아온 건 공연 무대에 섰을 때였다. 아주 우연한 연결로 기회가 찾아왔다. 나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공연 팀에 합류했다. 사실 무대에 서는 일은 전부터 꿈꿨던 일이었는데, 무대만이 주는 긴장감을 느끼고 싶었고 관객들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무대 위에서는 내가 어떤 ‘역경’을 딛고 왔는지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나를 드러내고 관객들과 함께 있을 것인지가 중요했다. 그것은 서로의 삶의 맥락을 잇거나 다시 만들어내는 일이었으며 서로의 말을 잘 듣고 응답을 주고받는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나의 소통방식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아야 했다. 나는 말을 하기 위해 어깨 근육을 사용하는 사람이다. 음성언어가 아닌 문자언어, 즉 타이핑으로 말을 만듦으로써 사람들과 소통을 해오고 있다. 의학적 관점에서는 이런 나를 일컬어 ‘언어장애인’이라고 정의한다. 내가 자주 만나는 사람들은 음성언어를 사용하는 데 어려움이 없는 이들이었는데 각자의 방식으로 대화를 나누다 보면 반드시 침묵이 발생하기 마련이었다. 나의 타자 속도가 빠르다면 어느 정도 침묵의 시간을 줄일 수 있을 텐데 아쉽게도 그러지 못했다. 침묵의 시간을 줄이기 위해 어떻게든 한 손가락을 재게 놀리려고 애쓰지만 그럴수록 오타가 발생하는 빈도가 더 늘어나기만 했다. 나는 느린 타자 속도와 종종 발생하는 오타를 부끄러워했다.

 

그런데 무대에서만큼은 다르게 접근하고 싶었다. 어떻게든 상대방의 소통방식에 나를 맞추려 하기보다는 나의 소통방식으로 초대하고 싶었다. 무대는 얼마든지 삶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확장성을 가지고 있는 공간인 만큼 한번 시도해보고 싶었다. 나는 무대에 설치된 스크린에 문자를 찍고, 하고 싶은 말을 관객들에게 전했다. 그 순간만큼은 나의 속도나 오타에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하면서 한 글자씩 나의 말을 완성해나갔다. 관객들은 나의 말이 완성되기까지 기다려주었고 그 말에 대한 응답을 그들의 방식으로 들려주었다. 그렇게 나와 관객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삶의 어떤 부분을 이어나갔다. 일상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충만감이 느껴졌고 삶의 지지대 하나가 세워진 느낌이었다.

 

공연이 끝난 이후로도 나는 나를 설명하기 위한 언어와 방식들을 찾아나가고 있다. 무대가 아닌 일상에서도 내가 오롯이 있기 위해 나는 누군가에게 말을 건넨다.

 

사진 : 정택용 X 0set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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