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특별 연재] 민중신학의 세대론적 재(再)전개를 위하여(2) : 사회적 위기에 대한 세 가지 형태의 비판(정용택)

2022-02-05
조회수 503


민중신학의 세대론적 재(再)전개를 위하여(2)

사회적 위기에 대한 세 가지 형태의 비판



정용택(제3시대 연구실장)

 


민중신학적 위기론을 본격적으로 재구성하기 전에, 우선 사회비판의 관점에서 어떤 형태의 위기들을 말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비판이론 전통에서는 사회적 위기를 두 가지 혹은 세 가지 차원에서 파악해왔다. 첫째, 초주관적 관찰자의 관점에서 사회적 체계의 모순들, 역기능, 그리고 아노미 등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체계적-기능적’(systemic-functional) 위기가 있다. 특히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참된 장애물은 자본 그 자체”라는 마르크스의 입장을 좇아서 자본주의는 내적 모순에 의해 끊임없이 침식되는데, 이 모순은 필연적으로 심각한 위기를 일으켜 조만간 사회적 재생산을 무너뜨릴 것이라고 주장한다.1) 이렇듯 체계적-기능적 위기는 사회체계가 장기적으로 안정되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전제로 한다. 이는 사회적 위기의 두 번째 형태인 ‘규범적-생동적 위기’(normative-lived crisis)와는 명백히 구별된다. 물론 체계적-기능적 위기와 규범적-생동적 위기는 밀접히 연관되어 있으나, 분석적으로는 둘을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 둘의 차이를 좀 더 살펴보자.

 

앞서 말했듯이, 체계적-기능적 위기는 사회구조 그 자체의 내적인 모순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쉽게 말해 자본축적의 위기, 더 정확히는 자본의 가치화/가치증식(valorization)의 위기 같은 것들을 가리킨다. 반면에 대중들이 일상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다양한 삶의 위기들은 자본주의 그 자체의 위기라기보다는 자본주의가 사회적 삶에 초래한 위기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규범적-생동적 위기는 체계적-기능적 위기에 처한 사회의 구조가 개인들에게 발생시키는 실제적 결핍, 고통, 분노, 그리고 불만족 등을 지칭한다. 이러한 위기들은 주로 행위자들의 정서적이고 태도적인 수준에서 나타난다. 규범적-생동적 위기는 모종의 규범과 가치에 비추어 봤을 때 어떤 사회적 배치나 구조가 정당화될 수 없다고 인지‧지각‧체험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때 그러한 위기를 규정하는 규범과 가치는 위기로 지칭되는 현상들과는 별개로 정의되거나 발견되어야 한다.2)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 그 자체의 위기와 자본주의가 초래하는 위기를 구별했는데, 비판이론 전통에서는 이를 일반화하여 체계적-기능적 위기와 규범적-생동적 위기로 구분하면서 각각의 내용을 풍부하게 발전시켜왔다.3)

 

한편, 최근의 비판이론 연구자들은 규범적-생동적 위기에도 두 가지의 하위 형태가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도덕적’(moral) 위기이고 다른 하나는 ‘윤리적’(ethical) 위기이다. 도덕적 위기에 대한 판단은 기본적으로 ‘정의’(正義, justice) 개념에 기초한다. 따라서 그 논변은 보통 주어진 사회제도에서 재화, 권리, 지위, 특권을 둘러싼 불의한(예컨대 불공평한) 대우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여기서 초점은 일반적으로 사회적 관계, 즉 집단과 개인들이 서로에 대해 상대적으로 놓인 계급적‧인종적‧성별적 ‘위치’(position)에 따른 차별과 배제, 그리고 불평등이다. 이와 달리 윤리적 위기의 기초는 ‘좋은 삶’(good life) 또는 ‘행복’의 관념이다.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소외’(alienation)나 ‘역량 박탈’(capability deprivation)의 상태와 같이 좋은 삶의 실현을 구조적으로 약화시키는 사회적 조건에 대한 생각이다. 여기에서 논변은 원칙적 ‘정의’ 실현 여부에 관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 ‘행복’의 가능성 유무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윤리적 위기에 대한 인지‧지각‧체험은 일반적으로 좋은 삶의 실현을 가로막는 구조나 실천을 확인하고, 그것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 두 가지 위기와 그에 상응하는 비판 모델의 구별은 비슷한 듯하면서도 전혀 다른 형태의 정의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사회 정의 실현에 있어서 더 우선하는 것이 “분배냐 인정이냐?”를 둘러싸고 전개된 낸시 프레이저와 악셀 호네트의 논쟁이 있다.4)   

 

두 사람 간의 논쟁에서 드러났듯이, 현대 비판이론 및 사회철학에서는 도덕적 위기와 윤리적 위기의 개념사적 뿌리를 규범과 유토피아로 각각 상징되는 고전적 자연법 사상과 사회적 유토피아 사상에서 찾고 있다.5) 자연법 유산과 유토피아 유산의 상호보완적인 관계 정립의 당위적 필요성은 마르크스주의와 그리스도교적 메시아주의의 변증법적 종합을 시도했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에 의해 일찍이 제시된 바 있다. 우선 블로흐는 자연법 사상과 사회적 유토피아 사상이 각각 어떠한 윤리적‧정치적 실천을 목표로 하고 있는지를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요약한다. 

 

사회적 유토피아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복을 지향하고, 자연법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향한다. 사회적 유토피아가 더 이상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toil) 그리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burden)이 없도록 하는 구체적 현실을 선취하여 묘사하고 있다면, 자연법은 경멸당하는 사람들(degradation) 그리고 모욕당하는 사람들(insult)이 없도록 하는 구체적 현실을 구성적으로 제시한다. 사회적 유토피아가 대체로 행복에 관한 찬란한 꿈을 선취하고 있다면, 자연법은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선취의 상을 비교적 무덤덤하고도 냉정하게 드러낸다.6) 

 

위의 인용문을 통해 사회적 유토피아 사상의 강조점이 “개인의 성공적 자아실현이라는 의미에서 ‘좋은 삶’, 또는 ‘행복한 삶’”의 추구에 있음을 알 수 있다.7) 이에 반해 자연법 사상은 규범들의 명료화를 통해 인간의 가치와 본원적 존엄성을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일, 즉 일반적 의미에서의 후생복지 내지 인권을 보장하는 문제들에 집중했다고 볼 수 있다. 블로흐는 두 가지 사상의 구체화를 마르크스의 정치학에서 찾아낸다. 특히 마르크스가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1844)에서 “인간이 천대받고 구속받고 버림받으며 경멸받는 존재로 되어 있는 모든 관계를 전복시키라”고 주장하는 대목은 그의 정치경제학 비판이 착취로 대변되는 경제적 예속으로부터의 해방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블로흐는 자연법의 요구 사항인 인간의 존엄성 지향이 마르크스주의적 정치경제학 비판에서 극대화된 경제적 예속으로부터의 해방 지향과 맺는 관계를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의 존엄성은 한편으로는 주어진 경제적 예속으로부터의 해방 없이는 절대로 실현될 수 없다. 경제적 예속으로부터의 해방은 다른 한편으로는―시도될 수 있는 모든 구체적 현실의 상황을 넘어서서―인권에 관한 근본적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는 결코 실현 가능하지 않다. 두 가지 사항은 결코 제각기 독립적으로 그리고 자동적으로 해결될 성질의 것들이 아니다. 그렇기에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문제와 경제적 해방의 문제는 상호의존적일 수밖에 없다. 전자는 휴머니즘의 실천에 관한 우선적인 문제를, 후자는 가장 중요한 경제적 사안에 대한 해결의 문제를 전제로 하지 않는가? 따라서 인간의 고유한 권리를 실질적으로 누리는 일은 경제적 착취를 근절시키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며, 인간의 인간에 대한 경제적 착취 행위를 종식시키는 일은 인간의 존엄성을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일 없이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 두 가지 사항은 상호작용을 일으키면서, 상대방을 위해 스스로 파기되곤 한다.8)

 

굳이 비판이론이 아니라 하더라도, 자연법 사상과 사회적 유토피아 사상의 흔적은 신학담론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 2세대로 알려져 있는 일명 ‘경제신학’(Economic Theology)은 경제적 이론과 과정들이 우상이라 불리는 거짓 신들이 생산해내는 매우 요상한 변태적 현상이며, 이러한 억압의 우상들과 해방적 하느님 사이에서 발생하는 투쟁, 즉 ‘신들의 전쟁’을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결국 물신성(物神性)이 상품과 화폐와 자본 같은 사회형태들을 넘어 다양한 형태로, 변형적 아종을 연쇄적으로 양산하면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특징짓는 모든 제도들 가운데 편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경제적 범주들의 물신성에 대한 경제신학적 비판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구성한 추상적인 사회적 구조에 의해 그들 자신이 지배당하는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는 가치지배 관계로부터의 전면적인 해방―“지친 자들과 억압된 자들이 없는 그런 인간관계의 상”―을 중심에 둔다는 점에서, 가치지배의 폐지와 더불어 “질적으로 새로운 욕구와 사회적 관계 그리고 유대양식”의 발명을 지향하는 사회적 유토피아 사상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9) 

 

반면에 민중을 고통의 관점에서 이해함으로써 사회적 고통과 그 담지자인 민중을 만들어내는 세계를 총체적으로 부정하고 근본적으로 비판하려는 의도에서 발전해온 민중신학의 오클로스/민중론은 자연법 사상의 “정의와 인간의 가치에 대한 요구를 명료화하는 과업”을 계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10) 물론 두 신학담론 모두 시대별로 그리고 사안에 따라서 자연법 사상과 사회적 유토피아 사상 가운데 어느 하나의 경향을 더 강하게 드러내곤 했다. 규범과 유토피아로 대변되는 도덕적 비판과 윤리적 비판의 문제의식, 나아가 체계적-기능적 위기에 대한 사회과학적 탐구는 민중신학적 위기론과 비판 모델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참조점을 제공한다. 다음 연재에서는 유토피아 사상에 조응하는 경제신학적 물신숭배 비판과 자연법 사상과 연결되는 사회적 고통에 대한 민중신학적 비판, 그리고 체계적-기능적 위기에 대한 설명적 비판이 민중신학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통합될 수 있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1) 카를 마르크스, 『자본』 Ⅱ, 강신준 옮김, 길, 2010, 330.

2) 하르트무트 로자, 『소외와 가속』, 김태희 옮김, 앨피, 2020, 94. 

3) 대표적인 예로, 셰일라 벤하비브, 『비판, 규범, 유토피아』, 정대성 옮김, 울력, 2008을 보라.

4) 낸시 프레이저·악셀 호네트, 『분배냐, 인정이냐?』, 김원식·문성훈 옮김, 사월의책, 2014. 

5) 벤하비브, 『비판, 규범, 유토피아』, 제1장 참조. 

6) 에른스트 블로흐, 『자연법과 인간의 존엄성』, 박설호 옮김, 열린책들, 2011, 14(강조는 인용자).

7) 문성훈 외, 「옮긴이의 글」, 악셀 호네트, 『정의의 타자』, 문성훈 외 옮김, 나남, 2009, 12.

8) 블로흐, 『자연법과 인간의 존엄성』, 13(강조는 인용자).

9) 벤하비브, 『비판, 규범, 유토피아』, 31, 452.

10) 벤하비브, 2008: 452, 31.


ⓒ 웹진 <제3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