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용의 정치학
: 맨사이팅(man-citing)을 넘어서
김나미(Spelman College, 종교학)
연구를 하고 글을 쓰는 사람들이라면 인용의 중요성에 대해 잘 알 것이다. 여기서는 단지 표절에 걸리지 않으려고 하는 인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1) 인용은 연구를 하는 사람이 어떻게 '지식의 (재)생산' 과정에 참여하는지를 보여 준다. '개인' 연구라는 것은 이미 이루어진 연구들과의 연관성 안에서 형성되는 것이고, 따라서 연구자들에게 인용은 해야 하는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의 연구와 글을 왜 인용하고, 누구의 연구는 왜 '생략'하는가의 문제이다. 인용은 연구자의 학문의 계보, 관점, 논의, 지향을 알게 해 준다. 인용은 '자연스럽게' 또는 '중립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누구의 글을 무슨 목적으로 인용하는가에 따라 그 글이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지식'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누군가를 소외시키거나 배제시킬 수 있고,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다. 인용은 그냥 각주를 제대로 달았는지 달지 않았는지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페미니스트 학자인 세라 아메드(Sara Ahmad)는 『페미니스트의 삶을 살기』라는 책에서 아주 철저한 인용 원칙을 세운다. 그는, “이 책에서 나는 그 어떤 백인 남자들도 인용하지 않는다”라고 썼다.2 여기서 "백인 남자들"이란 '제도(institution)'를 지칭하는데, 그가 말하는 '제도'란 개개인들의 행동을 지배하는 지속적인 구조 또는 사회 질서의 작동원리를 가리킨다. 작동원리로서의 "백인 남자들"은 이미 견고해진 구조뿐 아니라 그 구조의 지속성을 보장한다. 아메드는 그런 '제도로서의 백인 남자들'과 '사상사(the history of ideas)'를 동일시할 수 없다면서, "백인 남자들"을 인용하는 대신에 페미니즘과 반인종차별주의 지식의 계보학에 공헌한 사상가들, 특히 '제도로서의 가부장적 백인성 (whiteness)'을 명명하고 해체하는 작업을 해 온 '유색인 페미니스트들'을 인용한다.3
누군가는 자신이 특정 계보를 따른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서구의 "백인 남자들"을 인용한 것이 아니라, 본인의 입장을 펴고 강화하는 데 가장 적절하기에 그들의 이론을 인용하는 것이라 주장할 수 도 있다. "백인 남자들"을 무조건 인용하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얘기했듯이, 인용은 정치적인 행위이다. 글을 쓰고 연구를 할 때 무엇을 위해 썼는지, 누구의 이론과 어떤 이론을 인용했는지, 누구를 독자로 생각하면서 글을 썼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독자들은 모든 인용 글들과 이론들을 알아야만 하는가? 독자들이 누구인가에 따라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달라지는가?
대학원 시절 지도교수가 세미나에서 발표하는 학생들에게 항상 했던 첫 번째 질문은, "너의 이론적 프레임워크는(theoretical framework) 무엇이지?"였다. 내로라하는 백인 남성 학자들의 이론은 인용하면서 그들의 논리와 전제와 해석을 비판한 '변두리(on the margin)' 학자들의 연구와 이론을 인용하지 않았을 때, 발표자에게 돌아오는 비판은 서슬이 퍼랬다. 발표자들은 난다 긴다 하는 백인 남성 학자들이 말하는 '주체', '몸', '성', '계급'이 누구를 지칭하는지에 대해 말해야 했고, 어떤 '인간/사람'을 어떤 맥락에서 얘기하는지 설명해야 했다. 서구의 '보편주의'가 모두에게 '보편'적인가를 물어야 했고, '가부장적 백인성' 구조 안에서 생산되고 재생산된 지식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제국주의와 이성애가부장제, 인종적 자본주의(racial capitalism), 인종차별, '평화적인 폭력', '대화'나 '소통'을 가능케 하지 않는 힘의 불균형 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삶'과 '죽음'도 누구의 삶이며 누구의 죽음인가를 물어야 했다. 지도교수의 비판은 아팠지만 틀리지 않았다.
어떤 이론을 쓰는가에 따라 내가 연구하고자 하는 내용에 다르게 접근하게 되고 따라서 분석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누구의 이론을 왜, 어떻게 쓰느냐는 무엇에 관해서 쓰는가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냥' 하는 인용은 없고, 내가 한 '인용'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페미니스트 학자인 챤드라 모한티(Chandra Talpade Mohant)는 가장 좋은 이론은 "개인의 경험과 이야기들이 소통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고, 그런 이론은 "정치적인 것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심화시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4 비슷한 취지로 치카나(Chicana) 페미니스트 학자인 셰리 모라가(Cherry Moraga)는 우리에게 필요한 이론은 여러가지의 억압 체제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 주는 동시에 지배적인 인식론을 비판하면서 우리가 '알아가는 방법'을 찾도록 도와주는 대안적인 인식론이라고 한다.5
한편, 흑인 페미니스트 학자인 벨 훅스(bell hooks)는 더 이상 살아 갈 수 없을 정도의 아픔으로 상처 받았을 때 필사적으로 '이론'을 찾았다고 한다. 훅스는 자신과 자기 주변에서 도대체 무슨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알고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이론을 찾으려 했고, 무엇보다 아픔을 떨쳐 낼 수 있는 이론을 찾고자 했다. 훅스는 이론에서 "치유의 장소"를 보았다고 했다.6 그래서 훅스에게 '이론'과 '행동'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딱히 '이론'에 관한 것은 아니지만, 여성학 연구자인 정희진이 '백인 남성을 기준으로 한 언어'에 대해서 한 말을 보자.
나는 이른바 '맨스플레인'이 불편하다기보다 쓸모가 적다고 주장해 왔다. 가르치려는 태도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그 '맨스플레인'에 가르칠 만한 게 없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언어가 쓸모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백인 남성을 기준으로 한 언어를 모든 사회에 적용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기존의 제도 교육은 그들의—오래된—이야기를 맥락 없이 반복하고 가르친다. 공부가 사유 방식을 배우는 과정, 창조의 과정이 되지 못하는 이유다.7
우리가 무엇을 위해 글을 쓰고 연구를 하며, 누구와 어떤 소통을 왜 하려고 하는지를 알게 되면, 어떤 이론을 사용하고 인용해야 할지에 대해 조금은 더 분명해지지 않을까. 나의 숙제다. 그리고, 누구의 글이든 연구든 '맨스플레인'과 '맨사이팅(남자의 글만 인용하는 것)'은 이제 그만 듣고 보고 싶다.8
1) 표절에 대한 비판은 정희진의 「공부는 쓰기다: 표절을 넘어 다운로드의 시대에서」를 참고. 정희진, 「공부는 쓰기다: 표절을 넘어 다운로드의 시대에서」,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 융합과 횡단의 글쓰기』, 교양인, 2022.
2) Sara Ahmad, Living a Feminist Life, Durham, London: Duke University Press, 2017.
3) Ibid.
4) Chandra Talpade Mohanty, Feminism Without Borders: Decolonizing Theory, Practicing Solidarity, Durham, London: Duke University Press, 2003, 191.
5) See Grace Kyungwon Hong, The Ruptures of American Capital: Women of Color Feminism and the Culture of Immigrant Labor, Minneapolis, London: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06, xxxi.
6) See bell hooks, Teaching to Transgress: Education as the Practice of Freedom, Routledge, 1994.
7) 정희진, 앞의 책, 교양인, 2022.
8) '맨스플레인'은 영어의 '남자(man)'와 '설명하다(explain)'를 합친 용어로, 한 남자가 어떤 개념이나 분야에 대해 여자가 모른다고 가정하고 그것을 설명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와 비슷하게 맨얼은 '남자(man)'와 '패널(panel)'을 합친 용어로, 남자들만으로 이루어진 패널이나 여자나 다른 소수자들을 한 명씩 토큰으로 넣은 패널을 가리키고, '맨퍼런스'는 '남자(man)'와 '학회(conference)'를 합친 용어로, 남자들만 또는 대다수가 남자들로만 이루어진 학회를 지칭한다. '맨솔로지'는 '남자(man)'와 '묶은 책(anthology)'을 합친 용어로, 남자들만 혹은 주로 남성 학자들의 글들만 묶어 놓은 책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여기에 "남자의 글만 인용한다"는 의미로 '맨사이팅', 즉 '남자(man)'와 '인용하다(citing)'도 더해 본다.
인용의 정치학
: 맨사이팅(man-citing)을 넘어서
김나미(Spelman College, 종교학)
연구를 하고 글을 쓰는 사람들이라면 인용의 중요성에 대해 잘 알 것이다. 여기서는 단지 표절에 걸리지 않으려고 하는 인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1) 인용은 연구를 하는 사람이 어떻게 '지식의 (재)생산' 과정에 참여하는지를 보여 준다. '개인' 연구라는 것은 이미 이루어진 연구들과의 연관성 안에서 형성되는 것이고, 따라서 연구자들에게 인용은 해야 하는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의 연구와 글을 왜 인용하고, 누구의 연구는 왜 '생략'하는가의 문제이다. 인용은 연구자의 학문의 계보, 관점, 논의, 지향을 알게 해 준다. 인용은 '자연스럽게' 또는 '중립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누구의 글을 무슨 목적으로 인용하는가에 따라 그 글이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지식'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누군가를 소외시키거나 배제시킬 수 있고,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다. 인용은 그냥 각주를 제대로 달았는지 달지 않았는지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페미니스트 학자인 세라 아메드(Sara Ahmad)는 『페미니스트의 삶을 살기』라는 책에서 아주 철저한 인용 원칙을 세운다. 그는, “이 책에서 나는 그 어떤 백인 남자들도 인용하지 않는다”라고 썼다.2 여기서 "백인 남자들"이란 '제도(institution)'를 지칭하는데, 그가 말하는 '제도'란 개개인들의 행동을 지배하는 지속적인 구조 또는 사회 질서의 작동원리를 가리킨다. 작동원리로서의 "백인 남자들"은 이미 견고해진 구조뿐 아니라 그 구조의 지속성을 보장한다. 아메드는 그런 '제도로서의 백인 남자들'과 '사상사(the history of ideas)'를 동일시할 수 없다면서, "백인 남자들"을 인용하는 대신에 페미니즘과 반인종차별주의 지식의 계보학에 공헌한 사상가들, 특히 '제도로서의 가부장적 백인성 (whiteness)'을 명명하고 해체하는 작업을 해 온 '유색인 페미니스트들'을 인용한다.3
누군가는 자신이 특정 계보를 따른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서구의 "백인 남자들"을 인용한 것이 아니라, 본인의 입장을 펴고 강화하는 데 가장 적절하기에 그들의 이론을 인용하는 것이라 주장할 수 도 있다. "백인 남자들"을 무조건 인용하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얘기했듯이, 인용은 정치적인 행위이다. 글을 쓰고 연구를 할 때 무엇을 위해 썼는지, 누구의 이론과 어떤 이론을 인용했는지, 누구를 독자로 생각하면서 글을 썼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독자들은 모든 인용 글들과 이론들을 알아야만 하는가? 독자들이 누구인가에 따라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달라지는가?
대학원 시절 지도교수가 세미나에서 발표하는 학생들에게 항상 했던 첫 번째 질문은, "너의 이론적 프레임워크는(theoretical framework) 무엇이지?"였다. 내로라하는 백인 남성 학자들의 이론은 인용하면서 그들의 논리와 전제와 해석을 비판한 '변두리(on the margin)' 학자들의 연구와 이론을 인용하지 않았을 때, 발표자에게 돌아오는 비판은 서슬이 퍼랬다. 발표자들은 난다 긴다 하는 백인 남성 학자들이 말하는 '주체', '몸', '성', '계급'이 누구를 지칭하는지에 대해 말해야 했고, 어떤 '인간/사람'을 어떤 맥락에서 얘기하는지 설명해야 했다. 서구의 '보편주의'가 모두에게 '보편'적인가를 물어야 했고, '가부장적 백인성' 구조 안에서 생산되고 재생산된 지식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제국주의와 이성애가부장제, 인종적 자본주의(racial capitalism), 인종차별, '평화적인 폭력', '대화'나 '소통'을 가능케 하지 않는 힘의 불균형 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삶'과 '죽음'도 누구의 삶이며 누구의 죽음인가를 물어야 했다. 지도교수의 비판은 아팠지만 틀리지 않았다.
어떤 이론을 쓰는가에 따라 내가 연구하고자 하는 내용에 다르게 접근하게 되고 따라서 분석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누구의 이론을 왜, 어떻게 쓰느냐는 무엇에 관해서 쓰는가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냥' 하는 인용은 없고, 내가 한 '인용'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페미니스트 학자인 챤드라 모한티(Chandra Talpade Mohant)는 가장 좋은 이론은 "개인의 경험과 이야기들이 소통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고, 그런 이론은 "정치적인 것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심화시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4 비슷한 취지로 치카나(Chicana) 페미니스트 학자인 셰리 모라가(Cherry Moraga)는 우리에게 필요한 이론은 여러가지의 억압 체제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 주는 동시에 지배적인 인식론을 비판하면서 우리가 '알아가는 방법'을 찾도록 도와주는 대안적인 인식론이라고 한다.5
한편, 흑인 페미니스트 학자인 벨 훅스(bell hooks)는 더 이상 살아 갈 수 없을 정도의 아픔으로 상처 받았을 때 필사적으로 '이론'을 찾았다고 한다. 훅스는 자신과 자기 주변에서 도대체 무슨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알고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이론을 찾으려 했고, 무엇보다 아픔을 떨쳐 낼 수 있는 이론을 찾고자 했다. 훅스는 이론에서 "치유의 장소"를 보았다고 했다.6 그래서 훅스에게 '이론'과 '행동'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딱히 '이론'에 관한 것은 아니지만, 여성학 연구자인 정희진이 '백인 남성을 기준으로 한 언어'에 대해서 한 말을 보자.
우리가 무엇을 위해 글을 쓰고 연구를 하며, 누구와 어떤 소통을 왜 하려고 하는지를 알게 되면, 어떤 이론을 사용하고 인용해야 할지에 대해 조금은 더 분명해지지 않을까. 나의 숙제다. 그리고, 누구의 글이든 연구든 '맨스플레인'과 '맨사이팅(남자의 글만 인용하는 것)'은 이제 그만 듣고 보고 싶다.8
1) 표절에 대한 비판은 정희진의 「공부는 쓰기다: 표절을 넘어 다운로드의 시대에서」를 참고. 정희진, 「공부는 쓰기다: 표절을 넘어 다운로드의 시대에서」,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 융합과 횡단의 글쓰기』, 교양인, 2022.
2) Sara Ahmad, Living a Feminist Life, Durham, London: Duke University Press, 2017.
3) Ibid.
4) Chandra Talpade Mohanty, Feminism Without Borders: Decolonizing Theory, Practicing Solidarity, Durham, London: Duke University Press, 2003, 191.
5) See Grace Kyungwon Hong, The Ruptures of American Capital: Women of Color Feminism and the Culture of Immigrant Labor, Minneapolis, London: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06, xxxi.
6) See bell hooks, Teaching to Transgress: Education as the Practice of Freedom, Routledge, 1994.
7) 정희진, 앞의 책, 교양인, 2022.
8) '맨스플레인'은 영어의 '남자(man)'와 '설명하다(explain)'를 합친 용어로, 한 남자가 어떤 개념이나 분야에 대해 여자가 모른다고 가정하고 그것을 설명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와 비슷하게 맨얼은 '남자(man)'와 '패널(panel)'을 합친 용어로, 남자들만으로 이루어진 패널이나 여자나 다른 소수자들을 한 명씩 토큰으로 넣은 패널을 가리키고, '맨퍼런스'는 '남자(man)'와 '학회(conference)'를 합친 용어로, 남자들만 또는 대다수가 남자들로만 이루어진 학회를 지칭한다. '맨솔로지'는 '남자(man)'와 '묶은 책(anthology)'을 합친 용어로, 남자들만 혹은 주로 남성 학자들의 글들만 묶어 놓은 책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여기에 "남자의 글만 인용한다"는 의미로 '맨사이팅', 즉 '남자(man)'와 '인용하다(citing)'도 더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