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9장과 사사기 19장의 상호텍스트성에 대한 가설
성서 읽기 방법과 관련하여
박은정
1. 들어가는 말: 성서 읽기 방법론의 부재
많은 교회에서 신도들에게 매일 성서를 읽을 것을 권유한다. 매일 아침 QT를 할 것을 권유하고 맥체인 성경 읽기, 통큰통독 등 여러 성서 읽기 방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런데 성서 읽기에 대해서 하루에 몇 장, 어떤 순서로, 언제 읽어야 하는지 등 성서를 완독하는 방법에 대한 조언은 많지만 정작 성서 본문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경우는 찾기 어렵다. 그나마 성서 읽기법을 소개하는 경우에도 ‘한 문장 한 문장을 음미하라, 메모하라, 주석본을 참고하라’ 등 피상적인 수준에서의 조언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서 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에 비해서 성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교육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일부 보수우파 기독교인들이 성서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답을 찾을 수 있다.
2. 일부 반동성애 옹호론자의 성서를 대하는 태도와 문제점
아래의 기사는 사사기 19~21장과 레위기 20장이 반동성애를 의미하는 구절이 아니라는 기사에 대한 반박 기사로, 보수우파에서 성서를 대하는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 다음은 ["'남자와 동침하면 죽이라'는 구절, '반동성애' 뜻 아냐"] 라는 기사에 나타난 오해와 오독이다. 이 주제로 된 동성애 옹호 강연회는 동성애를 징계하는 명시적 조문인 레위기 20장 19절(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을 동일한 비평 방법1)에 입각하여 동성애를 옹호한다. (중략) 동성애 옹호 신학은 언제나 이런 식이다. 율법 조문이면 조문, 스토리면 스토리, 그 텍스트가 지닌 본질로의 직결된 명제를 부정하고 다른 읽기의 관점을 제시해 흔들어 놓는 방식. 신앙 생활을 그런 식으로 하는가? 성경은 부분적으로든 전체적으로든 그런 비틀어진 석의를 지지하지 않는다. (중략) 우리 기독교인은 저런 상상력이 없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중략) 이 강연과 기사에 따르면 성서가 마치 당대의 배경 역사를 이해하고 들여다보는 관문인 것처럼 소개되지만, 성서라는 텍스트는 당대의 그러한 역사들 가운데서 어떠한 역사들이 제거되고 분쇄되었는지, 그리고 어떠한 역사만이 남겨졌는지 그 경계를 직시하게 하는 정선된 눈금자(canon)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2)(밑줄 필자)
이영진(2017)은 ‘성서에 나타난 반(反) 동성애 코드는 일종의 페이크(가짜) 뉴스라는 취지의 강연(한백신학교실/제3시대그리스도연구소)이 기사로 연재되고 있는 것을 보’고 ‘그 내용 중 그릇된 이해가 여과 없이 기독교인들에게 유포되어 심히 우려스러워 바로잡고자’ 글을 쓰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사사기 19~21장을 바탕으로 <“상관하겠다”는 구절은 동성애를 뜻하는가>라는 기사와 레위기 20장을 다룬 <‘남자와 동침하면 죽이라’ 구절, ‘반동성애’ 뜻 아냐>의 기사를 반박하고 있는 기사인데, 동성애 반대에 대한 신학적 근거와 더불어 인용에서 알 수 있듯이 성경 해석에 관한 관점이 드러난다. 이영진(2017)은 동성애를 옹호하는 신학은 ‘본질로의 직결된 명제를 부정하고 다른 읽기의 관점을 제시해 흔들어 놓는 방식’을 사용한다고 주장한다. 위의 인용에서의 다른 읽기의 방법은 노먼 갓월드의 ‘사회정치적 혁명 모델’이다. 이영진은 노먼 갓월드의 이론을 간략히 설명한 후 ‘이러한 편향된 관점은 당연히 유물론적 사관에 기저한다. 따라서 상기와 같은 이해는 민중 중심의 신학이라는 지극히 제한적 관점에서만 읽을 수 있는 것이지, 동성애에 관한 하나님의 입장을 대변한다고는 볼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위의 인용에서 유추할 때 이영진(2017)은 성서 읽기에 대해 아래의 관점을 가진다고 정리할 수 있다.
1. 성서는 하나님의 뜻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신앙인은 특정한 방법론에 의거하지 않고 성서의 의미를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2. 성서는 총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장르(율법 조문, 스토리 등)에 따라 다른 해석방법론 이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
3. 성서는 역사를 초월하여 절대적 기준을 제시한다.
동성애에 대한 관점보다 성서 읽기에 대한 위와 같은 태도가 더 문제가 될 것이다. 위의 관점들은 성서에 대한 비판적 읽기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보수 교단에서 성서 읽기 방법론에 대한 교육이 미흡한 것도 성서에 대한 이러한 태도를 반영한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일단 성경 구절을 접하기만 하면 특정 관점이나 방법론에 기대지 않고 직관적으로 성서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많이’, ‘꾸준히’ 읽을 것을 강조하지, ‘어떻게’ 읽을 것인지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보수 교단이라고 해서 모두 성서 읽기에 대한 위와 같은 태도를 가진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동성애 이슈와 관련해서는 주로 신학자나 목회자가 쓴 기사뿐만 아니라 평신도로 추정되는 개인 블로그 등에서도 성서 읽기에 대한 위와 같은 태도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3)
그런데 성서는 역사와 시대를 초월하여 절대적 기준을 제시하며, 다른 배경지식 없이 성서를 읽는 것만으로도 성서의 의미를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는 생각은 필연적으로 오독을 야기한다. 읽기 활동에서 독자는 자신의 스키마를 적극 활용하여 의미를 구성하기 마련이다.4) 즉 별다른 정보가 없다면 독자는 이미 자신이 가진 배경지식을 이용해서 글을 이해하게 되는데 이는 성서를 당대 유대인의 세계관이 아니라 오늘날 한국인의 윤리관 및 상식에 의거하여 읽게 된다. 또한 번역의 문제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문제들이 오독을 낳게 되는데 아래는 그 예시를 보여준다.
그곳에 사는 레위인 하나가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하였다. 레위사람이 첩을 취한 것 자체가 당시 레위 사람들의 부패를 알린다. 2절은 이 첩이 행음하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남편을 떠났다. 첩이 행음한 것에 대해 남편과 좋지 않은 불화가 생겼을 것이고 따라서 여인은 떠난 것이다. 레위기 21장 7절은 여호와의 집에서 봉사하는 모든 레위 사람은 기생이나 부정한 여인을 취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이런 상황 자체가 레위인의 부패된 상황이다. (중략) 그녀는 모세의 법에 의하면 돌로 맞아 죽어야 했고 마땅히 용서를 빌어도 죄를 지은 여자가 빌어야 하는 법인데 남편이 찾아가서 ‘다정히 말하고’ 그 맘을 풀어주어 데려오려 했다는 것은 법이 없는 이방인들의 실행은 되어도 하나님의 백성, 그것도 레위인들 가운데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5)(밑줄 필자)
위의 글은 번역의 문제와 잘못된 배경지식의 문제를 모두 보여준다. ‘필레게쉬(pilegesh)’를 ‘첩’으로 번역하여 이 여인을 ‘부정한 여인’으로 보았다. 또한 ‘자나(zanah)’를 ‘행음하다’로 번역하여 레인위의 둘째 아내를 ‘모세의 법에 의하면 돌로 맞아 죽어’야 하는 ‘죄를 지은 여자’로 보았다. 일부다처제 사회에서 둘째 부인(필레게쉬)은 부정한 여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글쓴이는 오늘날의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어 레위인의 타락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자나를 ‘행음하다’로 번역한 것도 무리가 있다. 이러한 오역은 사사기 19~21장 사건의 의미를 전혀 다른 방향에서 해석하게 만든다.
위의 해석이 의도된 오역이 아니라는 가정 하에 성서강독 훈련을 받은 목회자마저 번역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배경지식을 잘못 적용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면 올바른 성서 이해를 돕기 위해서 평신도에게 여러 성서 읽기 방법론이 개발되어야 하고 교육되어야 한다. 지금 함께 하고 있는 쓰기 비평과 같은 방법도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3. 설화 장르로 본 창세기 19장과 사사기 19장의 상호텍스트성
텍스트를 생산하고 수용할 때는 일정한 사회적 규약에 따른다. 다시 말해 사회적 활동으로서 텍스트 생산과 수용은 사회가 용인한 텍스트 규범 즉, 장르6)의 영향을 받는다. 장르는 텍스트와 사회적 행위를 연결시켜 주는 매개체적 역할을 한다. 같은 내용의 텍스트라도 그것이 소설일 때와 다큐멘터리일 때, 뉴스일 때 텍스트가 갖는 사회적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다.
때문에 성서의 장르를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따라서 성서를 읽는 방법 및 방향이 달라진다. 텍스트언어학의 하위 분야로 텍스트유형론이 있는데, 프랑스의 언어학자인 프랑수아 라스티에(1989)는 상위변증 층위를 설정하여 실용적 텍스트와 문학 텍스트, 그리고 종교 텍스트를 유형화하였다. 상위변증 층위란 텍스트의 가치 부여와 관련된 층위이다. 라스티에(1989)는 윤리적인 판단에서 벗어나는, 다시 말해 상위변증 층위가 존재하지 않는 텍스트는 실용적 텍스트로, 윤리적인 판단을 필요로 하는 텍스트는 신화적 텍스트로 분류하였다. 신화적 텍스트는 가치 부여의 방식에 따라 다시 문학 텍스트와 종교 텍스트로 나누었는데, 문학 텍스트는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가치 부여가 이루어지는데 반하여, 종교 텍스트는 가치론적인 관점에서 가치 부여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이데올로기적이건 가치론적이건 모두 넓은 의미에서 윤리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문학 텍스트에서 나타나는 윤리가 국부적인 것에 한정되어 있는 반면에 종교 텍스트의 윤리는 총괄적이라는 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라스티에의 텍스트유형론을 인용해 가며 내가 주장하고 싶은 바는 종교 텍스트인 성서가 다른 장르와 구별되는 것은 텍스트 내적 요인보다 텍스트 외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 성서의 텍스트 구조, 문법 요소, 결속 장치 등 흔히 언어학에서 ‘텍스트문법’이라고 부르는 것, 혹은 서사 이론에서 ‘사건 층위’라고 부르는 것들이 성서를 성서답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성서를 성서답게 만들어 주는 것은 예배에서의 사용, 권위의 인정 등 사회적 활동에 따른 것이며 성서의 의미로 한정지어 봐도 전통적 해석에 권위를 부여하여 반복 재생산하는 것, 새로운 방법론을 적용하여 지속적으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 등 성서를 둘러 싼 담론 생산 과정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성서의 장르적 특징은 성서를 직관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무모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서의 또 다른 특징은 성서가 텍스트군집7)이라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구약은 모세오경, 역사서, 시가서, 예언서로, 신약은 복음서, 역사서, 서신서, 예언서로 구성된다고 보지만 신화 위주의 창세기와 법조문을 잘 보여주는 신명기가 같은 장르가 아님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성서의 전통적 장르 분류와 상관없이 오늘날의 장르 지식으로 성서를 읽을 때 얻을 수 있는 바가 분명 있을 것이다.
이 장에서는 창세기 19장 롯 이야기와 사사기 19장의 레위 사람의 둘째 처 이야기를 구비문학 중 ‘설화’라는 관점에서 두 이야기 간의 상호텍스트성을 설명해 보고자 한다. 한 가지 미리 밝혀 두는 것은 앞으로 전개 될 논의는 전부 가설에 불과하다. 실증을 위해서는 실제 창세기와 사사기의 여러 판본을 비교해 보아야 할 것이나 나의 능력 밖의 일이다.
창세기 19:1~26(아브라함 이야기까지 포함하면 창 18:1~19:26)은 ‘나그네 환대’ 모티브가 구현된 설화이다. 나그네 환대 모티브는 홍수 설화처럼 거의 전 문화권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에 나오는 ‘바우키스와 필레몬 부부’8)의 이야기가 대표적이며, 불교설화에서도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한국의 ‘장자못 설화’9)과도 그 구조가 매우 유사하다. 이세 이야기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나그네의 정체나 금기의 존재 유무, 받게 되는 상벌, 멸망의 범위 등 세부적인 내용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세 설화는 매우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금기의 존재 여부에서는 롯과 장자못 설화가, 마을의 멸망 방법으로는 바우키와 필레몬 부부의 이야기와 장자못 설화가 유사한데, 그렇다고 해서 세 작품이 직접적인 영향 관계를 갖는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설화가 인류보편의 인식을 보여주기 때문에 서로 다른 문명에서 유사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창세기의 롯 이야기가 어느 문화권에서나 접할 수 있는 보편적인 설화11)라면 사사기의 레위 사람의 둘째 처 이야기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창세기의 롯 이야기가 문학 장르상 ‘신화’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에 없는 데 비해서 사사기의 이야기가 구비 문학의 하위 장르로서 의 설화인지 아니면 실제 역사의 일부인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사기 19장의 이야기는 동맹 부족 국가에서 군주정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군주정을 옹호하기 위해서 쓰였다는 것이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라는 문장뿐만 아니라 사사기 다음에 군주제의 첫 성립 시기를 다루는 사무엘상이 온다는 것으로도 사사기 17~21장의 집필 의도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레위 사람의 둘째 처 이야기는 그것이 실제 일어난 일이든 아니든 간에 동맹 부족제 쇠퇴기의 혼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일 것이다.
창세기 19장과 사사기 19장은 사건 전개 과정에서 일부 유사한 점이 있지만 사건의 발단 및 결과에서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신적인 존재가 등장하는 창세기 19장과 달리 사사기 19장은 신화적 요소가 배제되어 있다. 이는 두 이야기가 서사적으로 같은 모티브를 공유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서사 구조적으로 창세기 19장은 오히려 앞서 살펴본 다른 나라의 설화들이 유사하다. 그렇다면 소돔의 주민들 혹은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나그네를 내어 놓으라고 외치는 장면의 유사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הוציאם אלינו ונדעה אתם
데려오라... 그 남자들을... 우리가 상관하리라(삿 19:22)
הוצא את־האיש אשר־בא אל־ביתך ונדענו
데려오라... 그 남자를... 우리가 상관하리라(창 19:5)
위의 두 구절은 표현의 동일성 때문에 두 텍스트의 유사성이 인정되는 경우이다. 그런데 이렇게 인상 깊은 표현을 빌어오는 경우는 구비문학에서 흔히 일어나는 현상이다. 구비문학은 말로 전달되다 보니 둘 이상의 이야기가 섞이기도 하고 전달과정에서 생략되거나 덧붙여지기도 한다. 특히 전승과정에서 당시 민중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사건이나 표현들이 덧붙여지는 것들을 흔히 확인할 수 있다.12) 더구나 롯 이야기는 오랜 기간 구비되다가 창세기 집필 무렵에 문헌화되었다고 한다면 문헌화 과정에서 표현이 가다듬어지면서 덧붙여진 요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실증할 수는 없지만 요시아왕 시기에 사사기 19장이 먼저 집필된 후, 창세기 19장이 집필되었다면 창세기의 롯 이야기가 구비되다가 문헌화하는 과정에서 사사기의 일부 표현을 가져 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4. 마치는 말
성서 읽기 방법론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하여 창세기 19장과 사사기 19장의 유사성에 대한 가설을 세워 보았다. 성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또한 나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일 것이다. 결국 성서를 읽는 이유는 나의 삶을 올바른 방향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성서를 비판적으로 읽는 것은 내가 가진 (기독교적) 세계관과 현실 세계를 동시에 비판적으로 탐구하는 것일 것이다. 근래 개신교계 일부가 노골적으로 정치세력화하여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것과 맞물려 성서가 이데올로기의 도구가 되는 것에 울분을 토하는 한편, 내가 성서를 올곧게 이해하고 있는지, 나의 가치관으로 성서를 재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항상 고민하게 된다. 이번 수업을 통해서 스스로를 점검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 다행스럽다.
1) 노먼 갓월드(Norman K. Gottwald)의 사회·정치적 혁명 모델
2) 이영진, <성서에 나타난 反동성애 코드가 ‘가짜 뉴스’라고?>, 크리스찬 투데이 2017. 6. 28. www.christiantoday.co.kr/news/301851
3) 구체적인 통계 작업은 한 것은 아니지만 <사사기 동성애>라는 키워드로 구글에서 검색했을 때 반동성애 성향의 글들에서 이러한 태도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러한 관점은 자료수가 부족해서 단언할 수는 없지만 설교 요약문에서 두드러졌다. 학술논문, 신문기사, 유튜브 채널, 교회 공식홈페이지의 설교요약, 개인 SNS의 설교요약, 개인 묵상글 등 장르에 따른 동성애 이슈의 논점 및 태도에 대해 연구하는 것도 하나의 연구거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4) 현대 읽기 교육 이론은 ‘스키마 이론’에 토대를 두고 있다. 스키마의 형성과 구체적 활용 방법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주장을 달리하지만 스키마 이론 자체를 부정하는 주류 읽기 교육학자는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5) 유동근, <소돔이 ‘동성애’로 망했는데… 따라하는 사사 시대>, 크리스찬투데이 2012. 4. 7.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254865
6) ‘장르’는 가장 보편적으로 쓰는 단어라서 여기에서는 장르라는 단어를 사용하겠지만 텍스트언어학에서는 장르 대신 ‘텍스트유형’과 ‘텍스트종류’를 구별하여 사용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일기예보, 편지, 논문’ 등등이 텍스트종류에 속한다. 개별 텍스트는 항상 특정한 텍스트종류로 존재한다. 텍스트유형은 유형론적 입장에서 이야기할 때에 사용된다. (예: 문학 텍스트, 학술 텍스트, 종교 텍스트 등등) 또한 국어국문학과에서는 ‘장르’라는 말 대신 ‘갈래’라는 번역어를 보편적으로 사용한다.
7) 신문이나 잡지에는 기사, 광고, 사설, 비평, 연재소설, 만화 등등 많은 텍스트들이 들어 있다. 이와 같이 서로 일정한 관계를 가진 텍스트종류들이 공존하는 텍스트 실현체를 텍스트군집이라고 한다.
8) 온 마을에서 거지 부자를 내쫓았지만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었던 이 노부부만이 거지를 받아 들여줬는데 그 거지 부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제우스와 헤르메스였고, 제우스는 친히 부부의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을 금은으로 장식된 거대한 제우스 신전으로 바꾸고, 나머지 집은 모두 그 신전 앞의 거대한 호수로 만들어버렸다. 제우스는 부부에게 소원을 물었고 노부부는 제우스신의 섬기는 신관이 되게 해 달라는 소원과 두 사람이 한 날 한시에 죽게 해 달라는 소원을 빌었다. 그 후 두 사람은 같은 날 죽어 월계수가 되었다.
9) 옛날에 아주 인색하고 포악한 부자인 장자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중이 와서 동냥을 달라고 하자, 장자는 외양간을 치고 있다가 쌀 대신 쇠똥을 바랑에 넣어 주었는데 중은 그냥 받아갔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장자의 며느리가 몰래 쌀을 퍼다가 바랑에 담아 주었다. 그러자 중이 “당신이 살려면 지금 나를 따라오되 절대로 뒤돌아보지 말라.”는 금기를 주었다. 며느리는 집을 떠나 산을 오르는데 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참고 돌아보지 않았으나 갑자기 커다란 소리가 들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돌아보았다. 며느리는 자기가 살던 집이 못이 되었으므로 놀라 그 자리에서 돌이 되었다.
10) 일부 연구에서는 장자못 설화와 서사무가의 연관성을 들어 중이 신적인 존재라고 보기도 한다.
11) 보편성이 설화의 일반적 특징이다. 소위 이솝우화라고 불리는 설화가 한국의 전래동화와 비슷한 이야기가 많은 것도 설화의 보편성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12) 한국 고대가요 <구지가>와 <해가>의 유사성이나, 삼국시대 이전부터 전승되어 온 아기장수 설화에 삼별초 항쟁이나 이성계 이야기가 덧붙여지는 것들이 그 예이다.
ⓒ 웹진 <제3시대>
창세기 19장과 사사기 19장의 상호텍스트성에 대한 가설
성서 읽기 방법과 관련하여
박은정
1. 들어가는 말: 성서 읽기 방법론의 부재
많은 교회에서 신도들에게 매일 성서를 읽을 것을 권유한다. 매일 아침 QT를 할 것을 권유하고 맥체인 성경 읽기, 통큰통독 등 여러 성서 읽기 방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런데 성서 읽기에 대해서 하루에 몇 장, 어떤 순서로, 언제 읽어야 하는지 등 성서를 완독하는 방법에 대한 조언은 많지만 정작 성서 본문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경우는 찾기 어렵다. 그나마 성서 읽기법을 소개하는 경우에도 ‘한 문장 한 문장을 음미하라, 메모하라, 주석본을 참고하라’ 등 피상적인 수준에서의 조언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서 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에 비해서 성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교육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일부 보수우파 기독교인들이 성서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답을 찾을 수 있다.
2. 일부 반동성애 옹호론자의 성서를 대하는 태도와 문제점
아래의 기사는 사사기 19~21장과 레위기 20장이 반동성애를 의미하는 구절이 아니라는 기사에 대한 반박 기사로, 보수우파에서 성서를 대하는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이영진(2017)은 ‘성서에 나타난 반(反) 동성애 코드는 일종의 페이크(가짜) 뉴스라는 취지의 강연(한백신학교실/제3시대그리스도연구소)이 기사로 연재되고 있는 것을 보’고 ‘그 내용 중 그릇된 이해가 여과 없이 기독교인들에게 유포되어 심히 우려스러워 바로잡고자’ 글을 쓰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사사기 19~21장을 바탕으로 <“상관하겠다”는 구절은 동성애를 뜻하는가>라는 기사와 레위기 20장을 다룬 <‘남자와 동침하면 죽이라’ 구절, ‘반동성애’ 뜻 아냐>의 기사를 반박하고 있는 기사인데, 동성애 반대에 대한 신학적 근거와 더불어 인용에서 알 수 있듯이 성경 해석에 관한 관점이 드러난다. 이영진(2017)은 동성애를 옹호하는 신학은 ‘본질로의 직결된 명제를 부정하고 다른 읽기의 관점을 제시해 흔들어 놓는 방식’을 사용한다고 주장한다. 위의 인용에서의 다른 읽기의 방법은 노먼 갓월드의 ‘사회정치적 혁명 모델’이다. 이영진은 노먼 갓월드의 이론을 간략히 설명한 후 ‘이러한 편향된 관점은 당연히 유물론적 사관에 기저한다. 따라서 상기와 같은 이해는 민중 중심의 신학이라는 지극히 제한적 관점에서만 읽을 수 있는 것이지, 동성애에 관한 하나님의 입장을 대변한다고는 볼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위의 인용에서 유추할 때 이영진(2017)은 성서 읽기에 대해 아래의 관점을 가진다고 정리할 수 있다.
1. 성서는 하나님의 뜻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신앙인은 특정한 방법론에 의거하지 않고 성서의 의미를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2. 성서는 총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장르(율법 조문, 스토리 등)에 따라 다른 해석방법론 이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
3. 성서는 역사를 초월하여 절대적 기준을 제시한다.
동성애에 대한 관점보다 성서 읽기에 대한 위와 같은 태도가 더 문제가 될 것이다. 위의 관점들은 성서에 대한 비판적 읽기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보수 교단에서 성서 읽기 방법론에 대한 교육이 미흡한 것도 성서에 대한 이러한 태도를 반영한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일단 성경 구절을 접하기만 하면 특정 관점이나 방법론에 기대지 않고 직관적으로 성서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많이’, ‘꾸준히’ 읽을 것을 강조하지, ‘어떻게’ 읽을 것인지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보수 교단이라고 해서 모두 성서 읽기에 대한 위와 같은 태도를 가진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동성애 이슈와 관련해서는 주로 신학자나 목회자가 쓴 기사뿐만 아니라 평신도로 추정되는 개인 블로그 등에서도 성서 읽기에 대한 위와 같은 태도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3)
그런데 성서는 역사와 시대를 초월하여 절대적 기준을 제시하며, 다른 배경지식 없이 성서를 읽는 것만으로도 성서의 의미를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는 생각은 필연적으로 오독을 야기한다. 읽기 활동에서 독자는 자신의 스키마를 적극 활용하여 의미를 구성하기 마련이다.4) 즉 별다른 정보가 없다면 독자는 이미 자신이 가진 배경지식을 이용해서 글을 이해하게 되는데 이는 성서를 당대 유대인의 세계관이 아니라 오늘날 한국인의 윤리관 및 상식에 의거하여 읽게 된다. 또한 번역의 문제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문제들이 오독을 낳게 되는데 아래는 그 예시를 보여준다.
그곳에 사는 레위인 하나가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하였다. 레위사람이 첩을 취한 것 자체가 당시 레위 사람들의 부패를 알린다. 2절은 이 첩이 행음하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남편을 떠났다. 첩이 행음한 것에 대해 남편과 좋지 않은 불화가 생겼을 것이고 따라서 여인은 떠난 것이다. 레위기 21장 7절은 여호와의 집에서 봉사하는 모든 레위 사람은 기생이나 부정한 여인을 취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이런 상황 자체가 레위인의 부패된 상황이다. (중략) 그녀는 모세의 법에 의하면 돌로 맞아 죽어야 했고 마땅히 용서를 빌어도 죄를 지은 여자가 빌어야 하는 법인데 남편이 찾아가서 ‘다정히 말하고’ 그 맘을 풀어주어 데려오려 했다는 것은 법이 없는 이방인들의 실행은 되어도 하나님의 백성, 그것도 레위인들 가운데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5)(밑줄 필자)
위의 글은 번역의 문제와 잘못된 배경지식의 문제를 모두 보여준다. ‘필레게쉬(pilegesh)’를 ‘첩’으로 번역하여 이 여인을 ‘부정한 여인’으로 보았다. 또한 ‘자나(zanah)’를 ‘행음하다’로 번역하여 레인위의 둘째 아내를 ‘모세의 법에 의하면 돌로 맞아 죽어’야 하는 ‘죄를 지은 여자’로 보았다. 일부다처제 사회에서 둘째 부인(필레게쉬)은 부정한 여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글쓴이는 오늘날의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어 레위인의 타락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자나를 ‘행음하다’로 번역한 것도 무리가 있다. 이러한 오역은 사사기 19~21장 사건의 의미를 전혀 다른 방향에서 해석하게 만든다.
위의 해석이 의도된 오역이 아니라는 가정 하에 성서강독 훈련을 받은 목회자마저 번역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배경지식을 잘못 적용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면 올바른 성서 이해를 돕기 위해서 평신도에게 여러 성서 읽기 방법론이 개발되어야 하고 교육되어야 한다. 지금 함께 하고 있는 쓰기 비평과 같은 방법도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3. 설화 장르로 본 창세기 19장과 사사기 19장의 상호텍스트성
텍스트를 생산하고 수용할 때는 일정한 사회적 규약에 따른다. 다시 말해 사회적 활동으로서 텍스트 생산과 수용은 사회가 용인한 텍스트 규범 즉, 장르6)의 영향을 받는다. 장르는 텍스트와 사회적 행위를 연결시켜 주는 매개체적 역할을 한다. 같은 내용의 텍스트라도 그것이 소설일 때와 다큐멘터리일 때, 뉴스일 때 텍스트가 갖는 사회적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다.
때문에 성서의 장르를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따라서 성서를 읽는 방법 및 방향이 달라진다. 텍스트언어학의 하위 분야로 텍스트유형론이 있는데, 프랑스의 언어학자인 프랑수아 라스티에(1989)는 상위변증 층위를 설정하여 실용적 텍스트와 문학 텍스트, 그리고 종교 텍스트를 유형화하였다. 상위변증 층위란 텍스트의 가치 부여와 관련된 층위이다. 라스티에(1989)는 윤리적인 판단에서 벗어나는, 다시 말해 상위변증 층위가 존재하지 않는 텍스트는 실용적 텍스트로, 윤리적인 판단을 필요로 하는 텍스트는 신화적 텍스트로 분류하였다. 신화적 텍스트는 가치 부여의 방식에 따라 다시 문학 텍스트와 종교 텍스트로 나누었는데, 문학 텍스트는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가치 부여가 이루어지는데 반하여, 종교 텍스트는 가치론적인 관점에서 가치 부여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이데올로기적이건 가치론적이건 모두 넓은 의미에서 윤리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문학 텍스트에서 나타나는 윤리가 국부적인 것에 한정되어 있는 반면에 종교 텍스트의 윤리는 총괄적이라는 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라스티에의 텍스트유형론을 인용해 가며 내가 주장하고 싶은 바는 종교 텍스트인 성서가 다른 장르와 구별되는 것은 텍스트 내적 요인보다 텍스트 외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 성서의 텍스트 구조, 문법 요소, 결속 장치 등 흔히 언어학에서 ‘텍스트문법’이라고 부르는 것, 혹은 서사 이론에서 ‘사건 층위’라고 부르는 것들이 성서를 성서답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성서를 성서답게 만들어 주는 것은 예배에서의 사용, 권위의 인정 등 사회적 활동에 따른 것이며 성서의 의미로 한정지어 봐도 전통적 해석에 권위를 부여하여 반복 재생산하는 것, 새로운 방법론을 적용하여 지속적으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 등 성서를 둘러 싼 담론 생산 과정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성서의 장르적 특징은 성서를 직관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무모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서의 또 다른 특징은 성서가 텍스트군집7)이라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구약은 모세오경, 역사서, 시가서, 예언서로, 신약은 복음서, 역사서, 서신서, 예언서로 구성된다고 보지만 신화 위주의 창세기와 법조문을 잘 보여주는 신명기가 같은 장르가 아님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성서의 전통적 장르 분류와 상관없이 오늘날의 장르 지식으로 성서를 읽을 때 얻을 수 있는 바가 분명 있을 것이다.
이 장에서는 창세기 19장 롯 이야기와 사사기 19장의 레위 사람의 둘째 처 이야기를 구비문학 중 ‘설화’라는 관점에서 두 이야기 간의 상호텍스트성을 설명해 보고자 한다. 한 가지 미리 밝혀 두는 것은 앞으로 전개 될 논의는 전부 가설에 불과하다. 실증을 위해서는 실제 창세기와 사사기의 여러 판본을 비교해 보아야 할 것이나 나의 능력 밖의 일이다.
창세기 19:1~26(아브라함 이야기까지 포함하면 창 18:1~19:26)은 ‘나그네 환대’ 모티브가 구현된 설화이다. 나그네 환대 모티브는 홍수 설화처럼 거의 전 문화권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에 나오는 ‘바우키스와 필레몬 부부’8)의 이야기가 대표적이며, 불교설화에서도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한국의 ‘장자못 설화’9)과도 그 구조가 매우 유사하다. 이세 이야기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나그네의 정체나 금기의 존재 유무, 받게 되는 상벌, 멸망의 범위 등 세부적인 내용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세 설화는 매우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금기의 존재 여부에서는 롯과 장자못 설화가, 마을의 멸망 방법으로는 바우키와 필레몬 부부의 이야기와 장자못 설화가 유사한데, 그렇다고 해서 세 작품이 직접적인 영향 관계를 갖는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설화가 인류보편의 인식을 보여주기 때문에 서로 다른 문명에서 유사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창세기의 롯 이야기가 어느 문화권에서나 접할 수 있는 보편적인 설화11)라면 사사기의 레위 사람의 둘째 처 이야기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창세기의 롯 이야기가 문학 장르상 ‘신화’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에 없는 데 비해서 사사기의 이야기가 구비 문학의 하위 장르로서 의 설화인지 아니면 실제 역사의 일부인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사기 19장의 이야기는 동맹 부족 국가에서 군주정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군주정을 옹호하기 위해서 쓰였다는 것이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라는 문장뿐만 아니라 사사기 다음에 군주제의 첫 성립 시기를 다루는 사무엘상이 온다는 것으로도 사사기 17~21장의 집필 의도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레위 사람의 둘째 처 이야기는 그것이 실제 일어난 일이든 아니든 간에 동맹 부족제 쇠퇴기의 혼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일 것이다.
창세기 19장과 사사기 19장은 사건 전개 과정에서 일부 유사한 점이 있지만 사건의 발단 및 결과에서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신적인 존재가 등장하는 창세기 19장과 달리 사사기 19장은 신화적 요소가 배제되어 있다. 이는 두 이야기가 서사적으로 같은 모티브를 공유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서사 구조적으로 창세기 19장은 오히려 앞서 살펴본 다른 나라의 설화들이 유사하다. 그렇다면 소돔의 주민들 혹은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나그네를 내어 놓으라고 외치는 장면의 유사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הוציאם אלינו ונדעה אתם
데려오라... 그 남자들을... 우리가 상관하리라(삿 19:22)
הוצא את־האיש אשר־בא אל־ביתך ונדענו
데려오라... 그 남자를... 우리가 상관하리라(창 19:5)
위의 두 구절은 표현의 동일성 때문에 두 텍스트의 유사성이 인정되는 경우이다. 그런데 이렇게 인상 깊은 표현을 빌어오는 경우는 구비문학에서 흔히 일어나는 현상이다. 구비문학은 말로 전달되다 보니 둘 이상의 이야기가 섞이기도 하고 전달과정에서 생략되거나 덧붙여지기도 한다. 특히 전승과정에서 당시 민중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사건이나 표현들이 덧붙여지는 것들을 흔히 확인할 수 있다.12) 더구나 롯 이야기는 오랜 기간 구비되다가 창세기 집필 무렵에 문헌화되었다고 한다면 문헌화 과정에서 표현이 가다듬어지면서 덧붙여진 요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실증할 수는 없지만 요시아왕 시기에 사사기 19장이 먼저 집필된 후, 창세기 19장이 집필되었다면 창세기의 롯 이야기가 구비되다가 문헌화하는 과정에서 사사기의 일부 표현을 가져 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4. 마치는 말
성서 읽기 방법론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하여 창세기 19장과 사사기 19장의 유사성에 대한 가설을 세워 보았다. 성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또한 나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일 것이다. 결국 성서를 읽는 이유는 나의 삶을 올바른 방향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성서를 비판적으로 읽는 것은 내가 가진 (기독교적) 세계관과 현실 세계를 동시에 비판적으로 탐구하는 것일 것이다. 근래 개신교계 일부가 노골적으로 정치세력화하여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것과 맞물려 성서가 이데올로기의 도구가 되는 것에 울분을 토하는 한편, 내가 성서를 올곧게 이해하고 있는지, 나의 가치관으로 성서를 재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항상 고민하게 된다. 이번 수업을 통해서 스스로를 점검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 다행스럽다.
1) 노먼 갓월드(Norman K. Gottwald)의 사회·정치적 혁명 모델
2) 이영진, <성서에 나타난 反동성애 코드가 ‘가짜 뉴스’라고?>, 크리스찬 투데이 2017. 6. 28. www.christiantoday.co.kr/news/301851
3) 구체적인 통계 작업은 한 것은 아니지만 <사사기 동성애>라는 키워드로 구글에서 검색했을 때 반동성애 성향의 글들에서 이러한 태도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러한 관점은 자료수가 부족해서 단언할 수는 없지만 설교 요약문에서 두드러졌다. 학술논문, 신문기사, 유튜브 채널, 교회 공식홈페이지의 설교요약, 개인 SNS의 설교요약, 개인 묵상글 등 장르에 따른 동성애 이슈의 논점 및 태도에 대해 연구하는 것도 하나의 연구거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4) 현대 읽기 교육 이론은 ‘스키마 이론’에 토대를 두고 있다. 스키마의 형성과 구체적 활용 방법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주장을 달리하지만 스키마 이론 자체를 부정하는 주류 읽기 교육학자는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5) 유동근, <소돔이 ‘동성애’로 망했는데… 따라하는 사사 시대>, 크리스찬투데이 2012. 4. 7.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254865
6) ‘장르’는 가장 보편적으로 쓰는 단어라서 여기에서는 장르라는 단어를 사용하겠지만 텍스트언어학에서는 장르 대신 ‘텍스트유형’과 ‘텍스트종류’를 구별하여 사용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일기예보, 편지, 논문’ 등등이 텍스트종류에 속한다. 개별 텍스트는 항상 특정한 텍스트종류로 존재한다. 텍스트유형은 유형론적 입장에서 이야기할 때에 사용된다. (예: 문학 텍스트, 학술 텍스트, 종교 텍스트 등등) 또한 국어국문학과에서는 ‘장르’라는 말 대신 ‘갈래’라는 번역어를 보편적으로 사용한다.
7) 신문이나 잡지에는 기사, 광고, 사설, 비평, 연재소설, 만화 등등 많은 텍스트들이 들어 있다. 이와 같이 서로 일정한 관계를 가진 텍스트종류들이 공존하는 텍스트 실현체를 텍스트군집이라고 한다.
8) 온 마을에서 거지 부자를 내쫓았지만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었던 이 노부부만이 거지를 받아 들여줬는데 그 거지 부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제우스와 헤르메스였고, 제우스는 친히 부부의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을 금은으로 장식된 거대한 제우스 신전으로 바꾸고, 나머지 집은 모두 그 신전 앞의 거대한 호수로 만들어버렸다. 제우스는 부부에게 소원을 물었고 노부부는 제우스신의 섬기는 신관이 되게 해 달라는 소원과 두 사람이 한 날 한시에 죽게 해 달라는 소원을 빌었다. 그 후 두 사람은 같은 날 죽어 월계수가 되었다.
9) 옛날에 아주 인색하고 포악한 부자인 장자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중이 와서 동냥을 달라고 하자, 장자는 외양간을 치고 있다가 쌀 대신 쇠똥을 바랑에 넣어 주었는데 중은 그냥 받아갔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장자의 며느리가 몰래 쌀을 퍼다가 바랑에 담아 주었다. 그러자 중이 “당신이 살려면 지금 나를 따라오되 절대로 뒤돌아보지 말라.”는 금기를 주었다. 며느리는 집을 떠나 산을 오르는데 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참고 돌아보지 않았으나 갑자기 커다란 소리가 들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돌아보았다. 며느리는 자기가 살던 집이 못이 되었으므로 놀라 그 자리에서 돌이 되었다.
10) 일부 연구에서는 장자못 설화와 서사무가의 연관성을 들어 중이 신적인 존재라고 보기도 한다.
11) 보편성이 설화의 일반적 특징이다. 소위 이솝우화라고 불리는 설화가 한국의 전래동화와 비슷한 이야기가 많은 것도 설화의 보편성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12) 한국 고대가요 <구지가>와 <해가>의 유사성이나, 삼국시대 이전부터 전승되어 온 아기장수 설화에 삼별초 항쟁이나 이성계 이야기가 덧붙여지는 것들이 그 예이다.
ⓒ 웹진 <제3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