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기획 기사] ‘경쟁’을 넘은 ‘협력’의 연구를 기대하며(한보성)

2022-01-22
조회수 118



‘경쟁’을 넘은 ‘협력’의 연구를 기대하며



한보성(문학/지식사회학 연구자)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 사태 이후 일상의 많은 모습들이 이전과는 전혀 달라진 지 오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드라마틱하게 변화한 풍경 중 하나는 학생들이 사라진 대학의 모습일 것이다. 기존에는 일부 특정 수업에만 국한되어 진행되던 비대면 수업이, 이제는 기본적이고 당연한 방식이 되면서, 기존과는 확연히 달라진 대학 교육에 대한 회의감마저 널리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지난 11월 16일 발표된 13개 연구자단체의 〈연구자 권리선언〉이 당초의 기대보다는 적은 수인 1천686명의 호응으로 마무리된 것은, 이처럼 전면적으로 달라진 대학 환경 속에서의 연구자의 존립 근거에 대한 연구자 스스로의 의심이나 불신이 다소나마 작용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또한 연구자를 정년을 보장받는 정규직 교수 위주로 간주하는 상상에서 연구자들 스스로도 자유롭지 않기에, 〈연구자 권리선언〉을 이미 특권을 누리고 있는 집단의 기득권 옹호로 오해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선언 발표를 앞두고 동참할 이들을 모으는 과정에서조차, 미처 충분히 정보를 접하지 못한 채, 때로는 스스로가 ‘연구자’인지도 의심할 정도로 고립된 상태에 놓인 다수의 연구자들의 존재 역시 생각해볼 수 있겠다. 그러나 학령인구 감소를 명분으로 삼아 진행되던 대학구조조정의 흐름은 팬데믹 훨씬 이전부터 거세게 진행되어 온 것이며, 특히 2019년 8월 1일 강사법 시행을 앞두고 많은 연구자들의 사실상의 ‘해고’가 일어난 바 있다. 또한 비정규 교수나 대학원생 신분이 단순히 연구자의 생애주기에서의 (전임교수가 되기 이전의) ‘통과단계’가 아니라, 그 자체로 자신의 연구 노동으로서 삶을 지속해 나갈 ‘연구자’임을 다시 강조할 필요 역시 있겠다. 이렇게 생각할 때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병행하는 등, 연구 노동에만 집중할 수 없는 조건에 처해 있는 연구자들 역시 마땅히 연구자로서의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

 

〈연구자 권리선언〉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연구 노동이 “체계적 지식을 연마하고 전수하며, 합리적 방법으로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일체의 행위”임을 규정한 제1조와, 연구자는 “연구노동을 통하여 노동자로서의 생존, 시민으로서의 품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할 권리”를 갖는다는 제8조이다. 이 두 조항에서 드러난 것처럼 ‘연구’라는 행위가 ‘노동’의 일부임을 분명히 한 것, 그리고 연구자의 권리는 노동자·시민·인간으로서 당연하게 보장받아야 할 ‘인권’에 속한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드러낸 점이 〈연구자 권리선언〉의 가장 중요한 의의라고 생각된다. 연구 행위를 일종의 사명을 갖고 임해야 하는 숭고한 성격을 지닌 것으로 간주하는 통념이 아직 공고하지만, 이는 연구라는 행위를 신비화해 그 수행이 어렵게 될 때 이를 연구 주체의 책임으로 돌리게 한다. 이를테면 연구자의 실직이나 정규직 임용 탈락과 같은 문제를 두고, 당사자 스스로마저 자신의 능력 부족으로 내면화하곤 하는 모습을 도처에서 볼 수 있지만, 이 문제는 매우 한정된 정규직 일자리의 수, 정규직과 비정규직 연구자의 엄청난 보수 격차, 연구 공간이나 도서관 자료접근권과 같은 기본적인 환경조차 충분히 보장받지 못하는 비정규직 연구자의 처지 등, 불평등한 노동 조건들로 세분화해 접근되어야 한다. 그리고 각각의 구체적인 노동의 조건이 만들어내는 현상 중 하나가 바로 연구자 개개인이 겪는 고용불안정성 및 빈곤의 모습임을 새롭게 인식하는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연구자 권리선언〉은 노동자로서의 연구자의 자기규정을 마련해, 이후에 기대되는 연구자 노동운동의 정초를 시도한 작업으로 보인다.

 

선언의 전문과 다른 조항들 역시 연구자가 연구 노동을 통해 생존을 지속해 나갈 수 있어야 하고, 물리적·제도적·문화적으로 안전하고 안정적인 연구 환경이 보장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그동안 성과주의 경쟁 체제가 악화시켜 온 연구의 공공성이 회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연구자에게 강요되는 일자리 경쟁은 뒤처진 자의 기본적인 생존마저 위협할 정도로 가혹한 한편, 연구 질의 하락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를테면 연구업적을 늘리기 위해 약탈적 저널에 논문을 게재한다거나, 단기간에 성과를 기재할 수 있는 주제에만 한정되는 연구만을 수행한다거나, 하나의 논문으로 발행하는 것이 더 나은 주제를 둘 이상의 논문으로 쪼개어 집필한다거나, 기여도를 거의 인정받지 못하는 번역과 같은 경우 외면한다거나, 별다른 이유 없이 교원 평가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 외국어 저널에 투고한다거나, 연구 참여도가 거의 없거나 낮은데도 저자에 포함되어 공저자 간 분쟁이 일어났다거나 하는 문제들이 성과주의의 폐해로 지적되곤 한다.

 

연구는 다른 연구자의 생산물을 참조하지 않고는 산출될 수 없는, 학계 전체로서는 언제나 협업의 결과물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경쟁 원리가 연구 분야에서도 강화될 경우, 연구를 수행하는 주체들 간의 협업을 가로막거나 저해하게 되어 연구자들에게도 대단한 감정 소모가 발생하게 된다. 학계를 구성하는 각 연구 주체들의 ‘감정문화’를 연구한 샤를로테 블로크에 따르면, 대학과 연구자를 평가하기 위해 개발된 각종 지수가, 경쟁적 투쟁을 증가시키고 그 결과로 주어지는 위계적 구조를 강화한다고 말한다.(『열정과 망상』, 갈무리, 2020.) 블로크에 따르면, 경쟁이 강화될 때 동료들 간 시기·불신·적의가 발생하며, 승자가 자신의 특권을 강화하려는 경향 역시 강해진다고 한다. 연구자들 사이의 상호 불신 및 스트레스가 가중되는 한편 불평등을 더욱 고착화하려는 움직임마저 발생한다는 것이다.

 

코로나-19와 기후위기의 상황에서 더욱 절실하게 여겨지는 깨달음이 있다면, 그것은 세계가 하나의 ‘팀’이라는 것이다. 선진국들이 백신을 선점하며 홀로 문제 상황을 탈출하려던 와중, 백신 접종률이 낮은 국가들 위주로 변이형 바이러스가 속속 등장한 사태는, 전세계적 협력 없이는 진정한 해결은 요원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시다. 기후위기 역시 지구적 차원의 협력 없이 멈출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그 어느 때보다 이기적인 경쟁의 한계를 체감하게 되는 현재의 시점에서, 경쟁을 넘어선 ‘협력’의 원리를, 연구자의 삶을 조직하고 추동하는 원리로서 재발견하고 문화적으로, 제도적으로 고착시킬 수는 없을까? 협력을 원리로 수행되는 연구에 대한 논의가 〈연구자 권리선언〉에 뒤이어 활발히 나오길 바라 본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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