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프로그램 리뷰] 더 넓고 깊은 파고(波高/破庫)를 향하여 : 제244차 월례포럼 리뷰(허요한)

2022-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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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넓고 깊은 파고(波高/破庫)를 향하여

제244차 월례포럼 리뷰



허요한(제3시대 연구원)

 


1. 가해자의 얼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와 내 주위에서 일어난 일들을 다시 생각해본다. 여성살해, 군대 및 술자리에서의 성폭력, 말 그대로의 폭행, 관음 피해, 캣콜링, 공공연한 외모평가 등. 그런데 위의 사례들에서 기억나는 가해자의 얼굴은 극히 소수다. 바로 곁에서 일어난 범죄들 속에서 나는 어떻게 (상대적으로 매우) 안전할 수 있었는가? 내게 부여된 남성이라는 동일성의 얼굴을 제외하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2. 시위


오랜 고민 끝에, 나는 이번 월례포럼과 텍스트(김주희, 「코로나 시대, ‘마스크 시위’와 페미니즘의 얼굴성을 질문하다」1))를 잘 요약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고, 나를 괴롭히는 문제들과 그저 대면해 보기로 했다. 이번 리뷰는 특히 주관적이므로, 직접 글을 찾아 읽거나, 제3시대 홈페이지에 업데이트 된 강연을 보시기를 적극 권한다.2)


먼저 김주희 선생님의 이번 강연(글)은 ‘시위’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시위를 논하는 것은 그 과정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에 대한 대응과 판단, 공권력에 의한 조직 침탈 및 백래시로부터의 안전성 확보, 운동의 전체 방향성과 성격의 정립 등 여러 사안들이 얽힌 ‘전술·전략’을 고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강연(글)에서 주요하게 다루는 두 마스크 시위(2016년의 이대 시위, 2018년의 혜화역 시위)는 사실 특정한 세력이나 단체의 사례로 좁혀서 보기보다는 페미니즘 운동사의 한 국면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또 다른 두 국면을 함께 읽어야 한다. 그 하나는 강연(글) 초반에 언급되었듯, 남성중심적 문화에 대항한 ‘메갈’의 문법(미러링)과 ‘N번방 사건’을 밝혀낸 ‘추적단 불꽃’의 전략이다. 또 다른 하나는 글에는 전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수의 정치’로 표현되고 각주에서 'TERF'의 사례로 언급된) 숙명여대 트랜스여성 입학 반대와 워마드의 사회적 소수자 혐오로 기억되는 ‘생물학적 동일성’을 기반으로 하여 구사된 전략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번 강연(글)은 페미니즘 운동의 대중화 과정에서 활용된 전술·전략의 의의와 그것이 남긴 과제를 고찰함으로써, 앞으로의 운동이 더 나은 방향으로 가기 위해 어떤 지점들을 고민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었다.


위와 같은 내용을 강조하는 이유는 여성혐오주의자들이 ‘페미니즘=남혐주의자’라는 선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위의 사례를 들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TERF’ 비판/논쟁을 페미니즘 운동에의 ‘개입’의 차원이 아닌 페미니즘을 섹터화/타자화하면서 진행하는 것은 지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강연(글)이 요구한 것은 기실 운동의 이론과 실천 양 측면에서 퇴행하지 않고 전진하기 위한 ‘더 높은 수준의 엄격함’이라 할 수 있다.

 


3. 성공과 ‘성공이라는 실패’


내 관점에서(내 멋대로) 파악한 이론과 실천의 ‘더 높은 수준의 엄격함’의 요청은 사실 운동주체에게 가혹하기도 한 것이다. ‘마스크’로 형상화된 익명성과 동일성의 전술의 선택의 이면에는 가혹한 현실적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강연(글)에서 밝혔듯이 마스크는 여성의 얼굴이 품평이 되는 환경에서 여성들이 자신의 ‘메시지’를 드러내는 방식이기도 했고, 마스크를 통해 ‘너는 나다’(너의 문제가 나의 문제이기도 하다로 읽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무성(無性)이 아닌 ‘익명의 여성 집단주체’로서 문제제기를 하는 효과적 방법이기도 했다. 그리고 여성혐오주의자들의 불법촬영 등을 포함한 백래시로부터의 안전도 필요했다.


마스크 전략의 성공과 실패의 겹침이 ‘안전’ 영역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강연(글)에서 이야기되었듯 이대생들은 대학본부와 싸우는 동시에 이대혐오라는 전선에서도 싸워야 했다. 또한 총장의 ‘외부세력’ 운운에 대한 반박도 필요했다. 혜화역 시위는 성산업과 연결된 불법촬영물 범죄와 그 대응에 미온적인 미디어 및 공권력과도 싸워야 했다. 유튜버가 혜화역 시위 현장을 촬영하며 여성들의 외모를 조롱하는 ‘자유’가 허락되는 것이 운동주체들이 처한 환경이었다.


그러나 시위의 현재적 성공을 위해 택한 동일성-차이의 외부화(배제) 전략은 내부 구성원의 차이를 억압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기도 했다.3) 이대 시위에서 운동의 ‘순수성’을 증명하기 위해 이대라는 엘리트 교육공간을 중심으로 하는 동일성의 전략이 ‘(운동권) 배제’와 함께 구사되었다면, 혜화역 시위에서는 운동의 순수성을 증명하기 위해 ‘생물학적 여성 참여’라는 동일성의 전략이 활용되었다. 시위는 단기 목표 달성에 성공적이었고, 그 성공적 전략의 성격 때문에 다른 문제들도 생겨났다.

 


4. 시


강연(글)에서 의외로 기억에 남는 부분은 운동참여자들의 안전한 일상 복귀에 대한 의지였다. 운동 때문에 혹시나 스펙 관리에 실패하거나 취업에 제한이 있지는 않을까. 운동이 나의 생활에 불이익으로 돌아오지는 않을까 하는 그 감각. 이건 사실 매우 중요한 문제다. 이전의 많은 변혁운동을 돌이켜 볼 때, 국가보안법으로 징역을 살거나 ‘빨갱이’ 낙인으로 생계가 어려워진 운동주체의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대 시위와 혜화역 시위의 운동주체가 운동의 순수성을 증명하기 위해 선택한 동일성의 전략(과거 사회운동 및 노동운동 등과의 단절)은 사실 국가폭력 역사의 반복을 반증한다. 구조로서의 국가폭력은 여전히 계승되고 있다. 그에 반해 국가폭력에 저항한 운동주체의 역사는 (발전, 수정이 아닌) 단절의 대상으로 간주되었다.4) 그러나 역설적으로, 국가폭력으로부터의 보안을 중시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조직의 내적 갈등과 상처의 양상은 반복되었다. 그리고 실은, 얼굴을 드러내며 안전을 중시하지 않는 (마스크 시위에서 ‘운동권’으로 재현된) 시위 방식이 불가능했던 시기가 역사적으로 더 길었다. 따라서 안전 전략의 단절/계승과 관련해서는 차라리 소위 ‘언더서클’, ‘비합조직’의 보안 사례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강연(글)에서는 마스크 시위에서 구성원의 안전과 시위의 성공을 위해 외부적인 것의 배제가 이루어진 맥락과 함께, 내부 운동 서사의 독점을 방지하기 위해 운동의 서사 자체가 삭제된 것 또한 논의되었다.5) 이러한 방식은 내부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균열의 지점들을 적극적으로 치유할 시간마저 삭제해 버렸다. 헤봉(heavy+자원봉사), 방관러(방관+er) 사이의 갈등(동료 간의 분업 방식의 문제와 그로 인한 죄책감·서운함)과 국가폭력의 트라우마는 다른 운동주체들의 후기에서도 종종 발견되는 이야기이다. 운동의 단기적(현재적)인 목표가 아니라 ‘전개과정(전체)’ 자체를 목적으로 본다면, 단기적(현재적) 목표의 전략적 성공보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을 통해 새로운 경험 세계를 열어젖히고, 사유를 실험함으로써, 이전과 다른 주체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나는 이번 강연(글)의 의미를 거기서 찾았다.


실제 그 운동들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을 뿐 아니라 운동주체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가며 현장을 분석한 김주희 선생님의 문제의식이 갖는 힘은 바로 그 동참과 개입을 통해 운동 과정을 지속적으로 확장시킨다는 점에 있다. 김주희 선생님의 작업은 운동들에 지속적으로 개입함으로써 그 이름의 공간이 열린 공간임을 드러내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미래의 시간이란 미래에 속한 사람이 당대의 관점으로 과거를 보는 눈이기도 하기 때문에, 현재의 사람은 언제나 현재의 일부를 판단할 수 있는 접근성을 가지고 있다. 어떤 식으로든 시간은 우리에게 공간이 동시적으로 열려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즉, 개입은 닫힌 공간과 지워진 시간을 다시 열고 연결시키며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를 통해 운동은 보편을 향해 나아간다. 이것이 역사가 필요한 이유 아닐까.

 


5. 콤플렉스


그런데도 아직은 모르겠다. 이건 순전히 내 경험의 문제인데, 나는 몇 가지 콤플렉스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비정규직 정규직화에 대한 대학의 무기한 안건상정 연기에 대응하기 위해 가장 적합한 시점에 특정 부서 파업을 고려한 적이 있다. 그러나 동료들과의 오랜 논의 끝에 우리는 적법한 해결 절차를 믿어보기로 했다. 태업도 생각해봤지만 비정규직 동료들의 생활을 책임질 어떤 수단도 없었다. 1인 시위 및 연대시위는 연차를 쓰거나 출근 전 1시간을 쪼개서 했다. 우리는 학교에 아무 지분도, 투표권도 없었으며 어떠한 권한도 없었다. 학비를 지불하는 소비자가 아니라 단기직 노동자-조교였으므로. 나는 성공이 필요했지만, 동료들도 생각해야 했다. 그 결과 한 방향으로 밀린 싸움을 하고 패배감을 안고 일상 업무로 돌아와야 했으며, 함께 싸웠던 비정규직 동료들은 운동의 실패로 인해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채 계약만료로 학교를 떠났다. 오랜 시간을 스스로 혼자되어 무기력하게 보냈다. 생각보다 성공서사 자체가 너무 드물다. 운동에서의 업무과중과 압박들을 견뎌야 했던 것보다, 힘의 완벽한 격차에 의한 실패가 우리의 결과라는 사실 때문에 오랫동안 괴로웠다.


그래서 동일성의 이념에는 반대하지만, 시기별 전술의 효율에 대해서는 나는 갈팡질팡하고 있다.6) ‘성공이라는 실패’를 밝혀내는 일조차, 그것이 ‘성공’(알려짐, 드러남)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점이 진정한 어려움이다.


젠더폭력과 그 문화가 실재하는지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실재하더라도 “나는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틀렸다.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관대하여, 나를 참아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깨닫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나는 한국의 어른 남성 형상(폭력을 행하는 남성들, 그 폭력과 자신은 무관한 남성들, 어느 쪽이든 폭력을 당하는 쪽과는 무관하기 때문에 누구도 반성하거나 극렬히 저항하지 않아도 괜찮은 기묘한 상황)에 대한 근원적인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그 형상에 내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로 인해 항시 분열한다. 내 생각에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이 공간에서 (아직) 페미니즘 운동에 기입될 만한 남성주체 운동의 얼굴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김주희 선생님의 논의는 보편성을 사유하는 관점에서 운동의 최전선에 위치한 고민으로 생각되며, 참조할 지점이 많아서 도움이 되었다. 따라서 독자는 (특히 이 시간, 이 땅에서 자·타의로 남성성을 수행하고 있는 자라면 더욱) 논지를 잘못 따라가 섣부른 판단을 내리기 전에, 두 가지 질문을 항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의 장소가 갖는 이념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이름에 나는 어떤 얼굴로 참여할 것인가. 꽤 길어질 고민이 시작되었다.

 


1) 김주희, 「코로나 시대, ‘마스크 시위’와 페미니즘의 얼굴성을 질문하다」, 『페미니즘연구』 21(1), 2021, 7-45면.

2) 제244차 월례포럼이 논문 「코로나 시대, ‘마스크 시위’와 페미니즘의 얼굴성을 질문하다」를 독해하면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이후로는 편의상 강연(글)로 표현하겠다. 그러나 강연에서 이루어진 부연 설명과 질의응답을 통해 폭 넓은 이야기가 오갔기에 강연도 찾아보기를 권장 드린다.

3) 이와 관련하여, 위기 대응의 방식에 대해 다룬 지난 회차(제243차) 월례포럼의 “안전 중심적 일탈” 개념은 국가단위뿐 아니라 조직단위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관점으로 보인다. 정정훈에 의하면 국가의 ‘안전 중심적 일탈’이란 “국가가 오로지 자기 보호만을 도착적으로 추구할 때, 그리하여 ‘안전’의 계기를 억압하고 오로지 안전만을 전면화할 때 발생”하는 것이다. 정정훈은 그것이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들과 행동들에 대한 폭력적 억압을 실행할 뿐만 아니라, 그러할 가능성이 있다고 예측되는 것들에 예방적 폭력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정정훈, 「안전의 변증법, 혹은 민주적 권리에 내재된 모순」, 『황해문화』 110, 2021.

4) 1980, 90년대 학생운동권의 남성중심적 동일성의 전략과 문화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운동은 남성들만의 것은 아니었다. 그 운동에 동참하고 그 안에서 균열을 내고, (목소리 내기에) 실패했던 여성운동주체들의 움직임이 여전히 더 많이 밝혀져야 할 필요가 있음은 물론이다. 동일성의 전략이 배제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남성운동주체들이 선택했던 방식이기도 하다. 따라서 김주희 선생님의 강연(글)은 그러한 지점을 페미니즘 운동이 넘어서기를 요청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5) 이러한 ‘운동 서사 독점’에 대한 거부의 바탕에는 역시 노학연대 운동의 서사를 민주화 서사로 독점하여 제도정치권에서 자신의 자산으로 삼은 남성 엘리트의 잘못이 있다.

6) 내 입장에서의 어려움은 이런 것이다. 예를 들어 혜화역 시위와 숙명여대 트랜스여성 입학 반대의 배제 전략을 어떻게 비교해야 할까? 그 둘은 연장선상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전략(적 효과)으로 보아야 하나. 무엇에 근거해서? 상황? 권력의 작용점의 위치? 운동 주체들의 이념? 혹시 이 모든 고민은 ‘혁명적 정치’ 혹은 ‘주체성’에 대한 신뢰와 기대 때문에 발생하는 것일까?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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