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겨울, 프로그램 리뷰] 「금융화 시대의 민중신학」을 읽고(요한)

2023-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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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화 시대의 민중신학」을 읽고

 

요한(제3시대 연구원)

 

〈심원 안병무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금융화 시대의 민중신학 : 안병무의 ‘가능성(Möglichkeit)’ 개념을 중심으로」(정용택)1)는 1980년대 이후 세계적 차원에서 가속화된 자본주의 금융화 현상에 주목하여, 부채로 인해 ‘미래 없음’의 상태가 되어버린 자본주의 한국사회 현실을 비판한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자기초월의 역량을 발휘함으로써 미래를 다시 열어젖힐 수 있는 사건적 주체인 ‘민중’을 탐색한다. 특히 안병무의 ‘가능성’ 개념을 통해 금융자본주의 시대의 민중신학의 역할을 가늠한다. 이 글에서 주목하는 민중의 자기초월 역량은 종말성과 긴밀하게 연관되는데, 이 글에 따르면 안병무의 『민중신학 이야기』(한국신학연구소, 1990)와 『불티』(한국신학연구소, 1990) 등에서 종말성은 다음과 같이 제시된다. “자기 자신까지도 포함하여 현존하는 지배 체제를 끝장내고 새로운 체제로의 전환을 이루어야 한다는 강한 역사의식이 뒷받침되어 현실의 변혁에 나설 때 비로소 민중의 집단적 자기 초월이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145)

 

여기서 상기해야 할 것은 안병무가 민중운동의 현장에서 자기초월의 사건을 직접 목격했음에도, 민중이 자기초월을 “하고 있다”라고 현재형으로 말하지 않고 “할 수 있다”라고 ‘가능성’의 형식으로 이야기했다는 점인데, 이 글은 안병무가 바로 이러한 형식을 통해 민중신학의 역사적 지속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고 밝힌다.

 

이 글에 따르면 안병무의 ‘가능성’으로서의 미래 개념은 초기 키에르케고르와 전기 하이데거 그리고 불트만의 영향을 받은 실존주의적 함의를 지녔으며, 전태일 사건을 기점으로 민중신학적 전회 이후에는 역사 내재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하이데거에게 인간의 소외 상태는 ‘미래없음’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안병무의 민중 역시 가능성으로서의 미래가 상실된 존재였다. 그러나 안병무는 더 나아가 그러한 소외를 극복할 수 있는 자기초월과 종말성을 발견했다. 따라서 이 글은 “안병무에게는 가능성으로서의 미래를 사유할 수 있는 집단적 역량이야말로 민중의 자기초월 가능성과 종말 의식의 가능성을 정초하는 인식론적 조건 내지는 주체성의 토대”이며, “오늘날 민중사건의 발생 가능성과 그에 기초한 민중신학의 지속 가능성을 조건 짓는 것 역시 미래로서의 가능성에 대한 집단적 사유 역량”(148)이라고 논한다.

 

그러나 이 글에서 ‘금융화 시대’라고 지칭한 1980년대 이후의 상황(한국의 경우 1997년 이후 금융시장의 급격한 성장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미래없음’, 즉 소외를 겪게 했다. 이 글에 따르면 금융화는 크게 축적체제의 변화의 측면에서 “수익 창출 능력의 자본화”, “주주가치 극대화”, “일생생활의 금융화”(149)로 개념 규정을 할 수 있다. 특히 민중신학적 관점에서 금융화가 주목되는 이유는 ‘일상생활의 금융화’라는 측면 때문이다. 일상적으로 작동하는 부채로 인해 미래 시간에 대한 인간의 감각이 변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즉, “가능성으로서의 미래에 대한 집단적 상상력이 사라진다면, 종말 의식을 겸비한 민중의 자기초월 가능성 역시 사라질 수 있기 때문”(150-151)이다. 그리고 이는 곧 민중신학의 학문적 위기이기도 하다는 것이 이 글의 입장이다.

 

이 글이 안병무의 ‘계란의 비유’를 통해 강조하는 것은, 가능성이 하나의 고정된 현실성의 전 단계가 아니라 그 자체로 다수적이라는 점이다. 또한 이 글은 안병무의 ‘화산맥 비유’는 알랭 바디우의 사건의 개념과도 유사한 논리구조가 있다고 파악하는데, 그 핵심은 “전(前)사건적 시간의 관점에서 사건의 돌발적·우연적 발생과 후(後)사건적 시간의 관점에서 사건의 필연적·일상적 잠재성을 동시에 사유”(153)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민중사건의 조건으로서 민중의 자기초월과 종말의식이 그 사회적 맥락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음을 생각할 때, 일상생활의 금융화라는 맥락을 읽어내는 일은 중요하다고 이 글은 말한다.

 

따라서 이 글의 의의는, 전세계적인 신자유주의화 경향과 더불어 금융산업의 발달과 자본의 집중에 따른 시장의 변화로 인한 노동조건의 악화(저자는 상시적 불안정 상태로서 프레카리아트화 현상을 주목해 온 바 있다)라는 현상황을 진단하고 그에 따른 민중신학의 역할을 재고한다는 점이다. 특히 이 글은 일상생활 곳곳에 침투한 금융화로 인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민중들이 ‘미래없음’, 즉 ‘변혁의 희망 없음’을 경험함으로써 소외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는 1970~80년대 한국의 산업 발전기에 열악한 인권·노동 환경을 개선하고 정치적 민주화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했던 교회와 민중신학의 역할에 더해, 고도화(독점을 지나 제국주의화)되어가는 자본주의 구조 자체에 민중신학이 다시 한번 저항해야 함을 의미한다.

 

더불어, 이 글이 노동운동이나 변혁운동이 아닌, 민중사건을 다루는 ‘신학’의 방법으로 금융화를 사유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저자가 다른 장소에서 발터 벤야민의 이론을 통해 밝혔듯이2), 오늘날 자본주의가 기독교를 대체하여 유일신이 되었기에 기독교 전통의 종말론이 자본주의 문제에 개입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다. 둘째, 생산의 집중을 통해 성장한 독점조직들과 은행과 산업의 유착관계로부터 발생한 금융자본3)의 발전 위에서 금리생활자, 땅 투기꾼, 상공업 기업 간의 인적자원과 금융지주제도를 악용한 시장독점사례 등이 나타나, 이것이 결국 민중의 삶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생활 속에서 경험하듯, 실업, 신용대출, 부동산 문제들과 주식(파생상품이나 코인은 투기성이 더 강조된 주식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광풍의 영향에서 그 누구도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에서 자명하다. 따라서 첫 번째 이유와 연결지어 생각해 보면, 부채를 통해 속박되는 민중의 시간은 기독교 전통에서 죄에 속박된 민중의 시간과 동질성을 갖는다. 셋째, 결국 억압적 유일신의 환상을 향유하여 진리(실재)에 가 닿을 수 있는 해방의 가능성은 초월적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민중사건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 민중신학의 한 관점이라 볼 수 있다면, 금융화의 약속체계를 끝낼 수 있는 역량을 민중사건에서 찾을 수 있다는 가설도 가능하다. 다시 강조하자면 오늘날 유일하게 보편적 신으로 인정받는 것은 자본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 글 이후로 더 설명, 기대해야 하는 작업도 있다. 그것은 오늘날 민중의 역능은 어디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탐색의 지점이다. 이는 안병무의 화산맥 비유와 알랭 바디우의 사건 개념을 잇는 작업의 방향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좀 더 논쟁적으로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이다. 바디우 철학에서 후사건적 주체의 강조가 진리의 ‘무력함’으로부터 기인한다는 점을 되새겨볼 때(진리는 진리에 사로잡힌 주체의 충실성을 통해서만 유지된다는 점), 바디우 철학에서 우리가 견지해야 할 강조점은 공백의 출현(사건) 그 자체보다는 주체의 계속함(충실성)일 것이다. 즉, 역량이나 가능성(이를 강조하는 것은 들뢰즈에 가깝기에, 화산맥과 사건의 비교는 들뢰즈의 ‘잠재적인 것’과 화산맥의 차이를 좀 더 드러내는 방식으로서 가능하지 않을까?)으로서의 민중보다는, 현실에서 투쟁을 멈추지 않는 투사의 형상들을 통해 민중의 새 의미를 선언하는 작업을 기대해 본다. 이는 구체적 실례 분석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이 글에서 민중사건은 하나님(이라는, 신학 밖에서 보면 피할 수 없는 일자)과 공백을 연관시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급진적이다.4) 그러나 알랭 바디우의 정치철학이 언제나 투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정치에서 후사건적 주체의 충실성이 드러나는 지점으로서 ‘투사의 형상’에 대한 강조는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레지스탕스였던 아버지를 두었고, 마오주의자였으며, 실뱅 라자뤼스 등과 함께 정치조직을 만들고, 공장노동자(이민자) 문제에 적극 개입하기도 했다. 그러한 투쟁의 배경을 통해서 바디우의 이론이 갖는 급진성의 원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의 종말에 대해 사유하며, 자본주의에 포섭되지 않는 감산적 주체를 정립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또한 바디우적인 사고방식이라면, 이미 끝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드는 ‘민중사건’에 대해 새롭게 “그것이 있다”라고 말하는 방식의 접근도 가능하다. 그것이 새롭게 있다. 그것은 어디에서, 어떻게 싸우고 있는가?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밝히고 탐색하는 것이 민중사건에 얽매인 주체이며, 그 주체를 통해서만 민중사건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중사건은 무엇이라고 선언할 것인가? 이런 관점이라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화산맥 안은 비어 있다.



1) 정용택, 「금융화 시대의 민중신학 : 안병무의 ‘가능성(Möglichkeit)’ 개념을 중심으로」, 『한국민중신학의 새로운 목소리-심원 안병무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논문집』, 2022. 이하 이 글의 직접인용은 괄호 안에 쪽수를 기입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2) 정용택의 강좌 〈종교로서의 자본주의〉 1강, 제3시대, https://3era.campaignus.me/73/?q=YTox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9&bmode=view&idx=11514817&t=board

3)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이정인 역,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단계』, 아고라, 2018, 75-76쪽.

4) “일자란 없다. 오로지 현실적인 다수성들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기초는 비어있다.” 알랭 바디우, 박정태 역, 『들뢰즈-존재의 함성』, 이학사, 2001, 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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