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성, 읽고 질문하고 저항합니다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리뷰
∎이 글은 제3시대 독서모임 〈남성성, 읽을 거예요〉에서 다룬 책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권김현영 외, 교양인, 2017)에 대한 리뷰입니다.
이성철, 아아 두 필자가 함께 씁니다.
다른 선택지를 발견하는 길

이성철(제3시대 연구원)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입원했는데 손을 잘라야 할 수도 있다고, 집으로 오라고 했다. 그래도 가족인데 도리가 있는 거라며 울먹이고 전화를 끊은 아버지는 다음날 어머니에게 집에 먹을 것이 없으니 반찬을 만들고 가라고 연락했다.
어머니는 손을 자르지 않았지만 집으로 돌아와 반찬을 만들었다. 이미 아버지가 먹을 요리를 해 두고 병원에 입원했음에도 말이다. 어린 시절 나의 고민과 좌절은 대부분 “나는 아버지를 벗어날 수 있을까?”였다. 자라서 결혼을 하고 새로운 가족이 생긴다면 나는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은, 결국 아버지를 닮은 내가 그렇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자주 바뀌었다. 부단히 좌절하며 아버지처럼 되지 않기 위해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말을 하고 다니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저항이었다.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고 계속해서 공부하려 했던 이유 또한 어머니에 대한 부채감과 가부장제를 탈피하고자 하는 욕망에서였다.
권김현영은 「근대 전환기 한국의 남성성」1)이라는 글을 통해, “남성 생계 부양자 모델에 기반한 성별 분업이 사실상 해체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젠더문법의 규범성이 유지되고 있”(72)으며, “현실을 부인하고 관습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남자들이 위기를 돌파하고자 하는 일들이 지난 수십 년간 반복되었다”(72)고 말한다. 아버지의 실직과 투병으로 인해 가족의 부양자가 아버지에서 어머니로 바뀌었음에도 집안의 결정권은 남성에게, 가사와 돌봄노동은 여전히 여성에게 부과되었다. 여성의 경제 활동은 증가하였지만 어머니는 공장과 마트의 노동자와 간호조무사 등 비정규직으로 일하면서, 남성에 비해 적은 급여와 취약한 환경에서 근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가정에서는 사회생활이 축소된 남성의 체면을 세워주고 돌봄을 유지해야 했다. 생계 부양자이며 아내이자 어머니인 여성의 삶이었다.
아버지를 증오하고 때로는 가여워했던 모순적인 시간을 보내며, 내 안에 증오와 연민이 자리 잡았다. 그것은 감추고 거세해야 할 무언가였다. 벗어나고 싶었고, 벗어날 수 없는 족쇄였다. 내가 끌어안고 끊어내야 할 업보라고 생각했기에 비혼을 다짐했었다. 하지만 권김현영은 「근대 전환기 한국의 남성성」의 다른 목적이 “식민지 남성성에 적응하지 못한 남자의 위치를 드러내는 것”(100)이라고 말하며, “이들이 ‘지배적 남성’의 세계에서 낄 자리를 찾지 못하고 여자들에게 울분을 푸는 일을 역사적으로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남성과 여성으로 이분화된 젠더 문법 규칙에서 설명되지 않는 이들이 존재할 수 있는 해석의 공간이 열려야”(101)한다고 이야기한다.
지난 1년간 진행한 독서모임은 친절한 이들과 함께였다.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태도와 함께 우리는 진지함을 공유했다. 답이 없어 보이는 주제들을 가지고 때로는 오래 침묵하고 때로는 서로의 경험에 공감하고 고민했다. 남성성 세미나의 안내 메일에 매번 반복적으로 적힌 문장이 있다. “이 독서모임은 생물학적 본질주의나 ‘상실된’ 남성성의 회복·수호를 지향하지 않습니다. <남성성, 읽을 거예요>의 ‘남성성’은 사실 ‘남성성/들’(Masculinities)이라 표현하는 것이 기획의도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모임은 남성성을 젠더적 관점에서 이해합니다. 따라서 이 모임은 남성성을 수행되는 것이자 역사적으로 구성된 것, 권력 관계를 내포한 것으로 봅니다.” 이 말은, 남성성이 족쇄나 혼자 짊어질 업보가 아니라 질문하고 저항해야 하는 것이라는 응답으로 들렸다.
한국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고통은 결코 혼자 감당하고 해결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의 저항은 연결될 수 있다. 보편의 보편됨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은 다른 선택지를 만들어가는 일이다. 다짐에서 고민으로, 고민에서 연대와 실천으로 변화되어갈 때, 우리는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선택지를 발견하고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분절된 개인(남성)들은 어떻게 단합하는가?

아아(Cafe de 3era 바리스타)
삭제하고 싶은 기억을 꺼낸다. 나는 두 달 전까지만 해도 군대에 있었다. “나만 아니면 돼.” 같은 부대 사람들은 이 말을 그렇게 자주했다. 군대는 단결과 군기를 요하는 곳이지만, 실상은 병사 스스로가 그렇게 이해하지 않고 있으면 정말이지 나만 아니면 된다는 태도가 만연한 기이한 집단이었다. 어떻게 보면, 드디어 군대에도 ‘나’라는 존재를 생각할 여유가 생겼구나, 단결과 군기를 되뇌지 않더라도 살 수 있는 집단이 되었구나 하며 안도를 하거나, ‘라떼’를 운운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본 실상은 달랐다. 군인들이 생각한 ‘나’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에 대한 존중을 표현하는 말이 아니라, 그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정말이지 ‘나’와만 무관하면 상관없다는 식의 싸늘한 말이다. 즉 이것은 군인의 인권 증진이 아니라 개인들의 분절을 보여 주는 사회의 단면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양상에는 어폐가 있는 게, 이들은 올해 초까지만 해도 끈끈하게 단합했었다. ‘이대남’ 현상으로 알려진 이 단합은 (논쟁의 여지는 다분하지만) 대선 승리의 기여했다고 자찬되며 이들의 힘은 대선 이후 한국 정치 판도에서 유효한 물결로 이해되었다. 한 세대의 정치성이자 정체성으로도 평가할 수 있을 만큼 이 현상의 기세는 컸다. 하지만 이들은 대선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들의 습성을 보여 주듯 뿔뿔이 흩어졌다.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에 실린 엄기호의 글 「보편성의 정치와 한국의 남성성」2)은 그 습성을 추적한다.
엄기호에 따르면 남성성은 위기에 봉착해 있는데, 그 위기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전지구화에 따른 임노동의 하락이 시민권과 주체성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면서 발생했다. “자신들이 단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은 국민의 자격을 박탈”(173)당한 남성 일반의 피해의식에 의해 형성된 것이 남성성의 위기이다. 그들은 정치적 박탈을 박탈하고자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고 단합한다. 그렇게 그들은 남성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새로운 민족”(179)을 형성한다.
1997년 외환 위기를 기점으로 부의 원천이 금융이 되면서 노동이 위축되었다.3)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전지구화 가운데서 자본의 주된 생산지는 금융이 되었다. 따라서 임노동자들은 하나 둘 일자리를 잃었고 이른바 ‘가장’은 몰락했다. 여전히 남성중심적인 노동 시장 속 임노동 관계에서 ‘사회’를 경험한 시민(남성 일반)은 사회에 진출할 수 있는 좁은 교량에서 교통체증에 실증을 느껴 이탈하거나, 어렵게 통과한 이들은 피해의식과 분노를 한가득 머금고, 쉽게 통과한 이들은 교량에서 땀 흘리는 이들을 냉소하며 자신과 그들을 구별하기 바쁘다. 어려운 일을 수행한 이들은 대개 이렇게 말한다. “나도 피해자야!”
그렇다면 고민해 볼 건 두 가지다. 남성의 피해자성과 시민의 위기이다. 먼저 남성의 피해자성은 뭔가 묘하다. 엄기호가 보기에 남성은 여성혐오를 부정하지도, (고전적인) 남성다움을 긍정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을 ‘남성 페미니스트’라 규정하기까지 한다. 그들은 여성혐오가 발생하는 ‘사실’과 남성다움의 무효성을 입증하는 ‘사실’을 강조하며 ‘보통의 남성’을 구성한다. 또한 그들의 ‘사실’은 여성을 혐오하는 고전적인 남성다움을 ‘후진적인 것’으로 본다. 여성혐오든 남성다움이든 모두 후진적인 행태일 뿐이므로 작금의 ‘보통의 남성’과는 구분된다.4) 또한 그들은 인권을 보편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특수성을 강조하며 예외가 되려는 것은 자신의 후진성에 대한 고백과 다름이 없”(160)기 때문에 그렇게 인권 투쟁의 맥락에서 고려되는 차별과 폭력의 “질적 차이”(161)는 ‘사실’이나 ‘보편’과는 거리가 먼 ‘후진 것’으로 간주된다.5) 이렇듯 그들의 역사를 후진 것이나 특수한 것, 즉 열외로 취급하다 보니 남는 건 “성인-비장애인 남성”(162)일 뿐이다.
정리하자면 ‘보통의 남성’들의 정체성은 “단적으로 말해 경험적으로 자신들은 기득권자도 아니고 여성들에 비해 특혜를 받은 것도 없다는”(158) 인식에서 기인하는 “보편적 남성성”(158)이다. 다시 말해 이는 차별과 폭력의 질적 차이를 무시하며 인권을 이해하면서 신자유주의의 폭력의 궤도에 본인을 편입시키려는 정치성이다. 그러한 남성성은 과거의 ‘가장’ 또는 ‘마초’와는 동일하지 않을지 모르나, “문화적 특성이나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면서 인권을 적용”(162)하려는 움직임에 보편의 잣대를 들이밀고, 보편성과 정상성을 위협하는 난민/장애인/여성/트랜스남성의 운동에 대단히 냉소적이다.
한편, 고전적인 남성성과 결별했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재현하는 성인-비장애인 남성의 ‘정상성’은 고전적인 남성성과 그 담지자들을 재해석하면서 그들을 현대의 남성성의 교본 내지는 위인으로 호명하고 있다. 이를테면 ‘사이다’ 홍준표와 이준석이 그러하다. 소수자와 여성에 대한 혐오 발언, 그야말로 ‘후진’ 발언으로 무수히 많은 물의를 빚은 그들을 호명함으로써 남성 개인들은 단합하였고, 그들의 발언을 인용하며 자신들의 박탈감을 표출했다. 특정 인물의 발언과 혐오를 매개하지 않으면 단합할 수 없는 기이한 연결망을 구축했다. 그 연결망에는 후졌다고 인식하면서도 여전히 놓지 못하는 고전적인 남성성과 타인과 분절하려는 습성들이 개명을 앞다퉈 하고 있었다.
삭제하고 싶은 기억을 다시 꺼낸다. 들숨과 같이 끊임없이 경험했던 분절, 그리고 저항하는 이들에 대한 무시, 군대에 끌려 온 것에 대한 피해의식, 이것을 해결하기는커녕 가산점으로 인정해 주자는 사이다 위인들에 대한 지지. 그렇게 단합하지만 기본적으로 버릴 수 없는 분절의 습성. 나의 일이 아닌 모든 부당한 일들에 “나만 아니면 돼.”를 입에 달고 사는 이들. 함께 숨을 들이쉬었던 ‘새로운 민족’은 안녕할까.
전우들, 아니 ‘새로운 민족’들과 함께 했던 기억이 가장 새록새록할 때, 〈남성성, 읽을 거예요〉 세미나에 참여했다. 어려운 책들, 유익한 설명, 오랜만에 경험하는 토론 등, 오랜만에 느껴 본 쾌적한 들숨이었다. 세미나를 매주 거듭할수록, 그리고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를 읽고, 이런 생각을 했다. 아, 남성성을 읽고 연구한다는 건 남성성을 구출하거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을 떠나 오늘날의 시민성을 독해하는 방식일 수 있겠구나. 그리고 남성성을 사회의 은유, 매개의 주제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 꾸준히 언급하는 것은, 남성성으로 대표되는 사회문제의 성격을 사회로부터 분리하여, 사회를 구하려는 작업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 권김현영, 「근대 전환기 한국의 남성성」, 권김현영 외,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교양인, 2017. 이하 이 글의 직접인용은 괄호 안에 쪽수를 기입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2) 엄기호, 「보편성의 정치와 한국의 남성성」, 권김현영 외,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교양인, 2017. 이하 이 글의 직접인용은 괄호 안에 쪽수를 기입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3) 위의 글, 165-166쪽.
4) 위의 책, 158-160쪽.
5) 위의 책, 162쪽.
ⓒ 웹진 〈3era〉
남성성, 읽고 질문하고 저항합니다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리뷰
∎이 글은 제3시대 독서모임 〈남성성, 읽을 거예요〉에서 다룬 책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권김현영 외, 교양인, 2017)에 대한 리뷰입니다.
이성철, 아아 두 필자가 함께 씁니다.
다른 선택지를 발견하는 길
이성철(제3시대 연구원)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입원했는데 손을 잘라야 할 수도 있다고, 집으로 오라고 했다. 그래도 가족인데 도리가 있는 거라며 울먹이고 전화를 끊은 아버지는 다음날 어머니에게 집에 먹을 것이 없으니 반찬을 만들고 가라고 연락했다.
어머니는 손을 자르지 않았지만 집으로 돌아와 반찬을 만들었다. 이미 아버지가 먹을 요리를 해 두고 병원에 입원했음에도 말이다. 어린 시절 나의 고민과 좌절은 대부분 “나는 아버지를 벗어날 수 있을까?”였다. 자라서 결혼을 하고 새로운 가족이 생긴다면 나는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은, 결국 아버지를 닮은 내가 그렇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자주 바뀌었다. 부단히 좌절하며 아버지처럼 되지 않기 위해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말을 하고 다니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저항이었다.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고 계속해서 공부하려 했던 이유 또한 어머니에 대한 부채감과 가부장제를 탈피하고자 하는 욕망에서였다.
권김현영은 「근대 전환기 한국의 남성성」1)이라는 글을 통해, “남성 생계 부양자 모델에 기반한 성별 분업이 사실상 해체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젠더문법의 규범성이 유지되고 있”(72)으며, “현실을 부인하고 관습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남자들이 위기를 돌파하고자 하는 일들이 지난 수십 년간 반복되었다”(72)고 말한다. 아버지의 실직과 투병으로 인해 가족의 부양자가 아버지에서 어머니로 바뀌었음에도 집안의 결정권은 남성에게, 가사와 돌봄노동은 여전히 여성에게 부과되었다. 여성의 경제 활동은 증가하였지만 어머니는 공장과 마트의 노동자와 간호조무사 등 비정규직으로 일하면서, 남성에 비해 적은 급여와 취약한 환경에서 근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가정에서는 사회생활이 축소된 남성의 체면을 세워주고 돌봄을 유지해야 했다. 생계 부양자이며 아내이자 어머니인 여성의 삶이었다.
아버지를 증오하고 때로는 가여워했던 모순적인 시간을 보내며, 내 안에 증오와 연민이 자리 잡았다. 그것은 감추고 거세해야 할 무언가였다. 벗어나고 싶었고, 벗어날 수 없는 족쇄였다. 내가 끌어안고 끊어내야 할 업보라고 생각했기에 비혼을 다짐했었다. 하지만 권김현영은 「근대 전환기 한국의 남성성」의 다른 목적이 “식민지 남성성에 적응하지 못한 남자의 위치를 드러내는 것”(100)이라고 말하며, “이들이 ‘지배적 남성’의 세계에서 낄 자리를 찾지 못하고 여자들에게 울분을 푸는 일을 역사적으로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남성과 여성으로 이분화된 젠더 문법 규칙에서 설명되지 않는 이들이 존재할 수 있는 해석의 공간이 열려야”(101)한다고 이야기한다.
지난 1년간 진행한 독서모임은 친절한 이들과 함께였다.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태도와 함께 우리는 진지함을 공유했다. 답이 없어 보이는 주제들을 가지고 때로는 오래 침묵하고 때로는 서로의 경험에 공감하고 고민했다. 남성성 세미나의 안내 메일에 매번 반복적으로 적힌 문장이 있다. “이 독서모임은 생물학적 본질주의나 ‘상실된’ 남성성의 회복·수호를 지향하지 않습니다. <남성성, 읽을 거예요>의 ‘남성성’은 사실 ‘남성성/들’(Masculinities)이라 표현하는 것이 기획의도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모임은 남성성을 젠더적 관점에서 이해합니다. 따라서 이 모임은 남성성을 수행되는 것이자 역사적으로 구성된 것, 권력 관계를 내포한 것으로 봅니다.” 이 말은, 남성성이 족쇄나 혼자 짊어질 업보가 아니라 질문하고 저항해야 하는 것이라는 응답으로 들렸다.
한국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고통은 결코 혼자 감당하고 해결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의 저항은 연결될 수 있다. 보편의 보편됨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은 다른 선택지를 만들어가는 일이다. 다짐에서 고민으로, 고민에서 연대와 실천으로 변화되어갈 때, 우리는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선택지를 발견하고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분절된 개인(남성)들은 어떻게 단합하는가?
아아(Cafe de 3era 바리스타)
삭제하고 싶은 기억을 꺼낸다. 나는 두 달 전까지만 해도 군대에 있었다. “나만 아니면 돼.” 같은 부대 사람들은 이 말을 그렇게 자주했다. 군대는 단결과 군기를 요하는 곳이지만, 실상은 병사 스스로가 그렇게 이해하지 않고 있으면 정말이지 나만 아니면 된다는 태도가 만연한 기이한 집단이었다. 어떻게 보면, 드디어 군대에도 ‘나’라는 존재를 생각할 여유가 생겼구나, 단결과 군기를 되뇌지 않더라도 살 수 있는 집단이 되었구나 하며 안도를 하거나, ‘라떼’를 운운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본 실상은 달랐다. 군인들이 생각한 ‘나’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에 대한 존중을 표현하는 말이 아니라, 그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정말이지 ‘나’와만 무관하면 상관없다는 식의 싸늘한 말이다. 즉 이것은 군인의 인권 증진이 아니라 개인들의 분절을 보여 주는 사회의 단면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양상에는 어폐가 있는 게, 이들은 올해 초까지만 해도 끈끈하게 단합했었다. ‘이대남’ 현상으로 알려진 이 단합은 (논쟁의 여지는 다분하지만) 대선 승리의 기여했다고 자찬되며 이들의 힘은 대선 이후 한국 정치 판도에서 유효한 물결로 이해되었다. 한 세대의 정치성이자 정체성으로도 평가할 수 있을 만큼 이 현상의 기세는 컸다. 하지만 이들은 대선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들의 습성을 보여 주듯 뿔뿔이 흩어졌다.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에 실린 엄기호의 글 「보편성의 정치와 한국의 남성성」2)은 그 습성을 추적한다.
엄기호에 따르면 남성성은 위기에 봉착해 있는데, 그 위기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전지구화에 따른 임노동의 하락이 시민권과 주체성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면서 발생했다. “자신들이 단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은 국민의 자격을 박탈”(173)당한 남성 일반의 피해의식에 의해 형성된 것이 남성성의 위기이다. 그들은 정치적 박탈을 박탈하고자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고 단합한다. 그렇게 그들은 남성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새로운 민족”(179)을 형성한다.
1997년 외환 위기를 기점으로 부의 원천이 금융이 되면서 노동이 위축되었다.3)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전지구화 가운데서 자본의 주된 생산지는 금융이 되었다. 따라서 임노동자들은 하나 둘 일자리를 잃었고 이른바 ‘가장’은 몰락했다. 여전히 남성중심적인 노동 시장 속 임노동 관계에서 ‘사회’를 경험한 시민(남성 일반)은 사회에 진출할 수 있는 좁은 교량에서 교통체증에 실증을 느껴 이탈하거나, 어렵게 통과한 이들은 피해의식과 분노를 한가득 머금고, 쉽게 통과한 이들은 교량에서 땀 흘리는 이들을 냉소하며 자신과 그들을 구별하기 바쁘다. 어려운 일을 수행한 이들은 대개 이렇게 말한다. “나도 피해자야!”
그렇다면 고민해 볼 건 두 가지다. 남성의 피해자성과 시민의 위기이다. 먼저 남성의 피해자성은 뭔가 묘하다. 엄기호가 보기에 남성은 여성혐오를 부정하지도, (고전적인) 남성다움을 긍정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을 ‘남성 페미니스트’라 규정하기까지 한다. 그들은 여성혐오가 발생하는 ‘사실’과 남성다움의 무효성을 입증하는 ‘사실’을 강조하며 ‘보통의 남성’을 구성한다. 또한 그들의 ‘사실’은 여성을 혐오하는 고전적인 남성다움을 ‘후진적인 것’으로 본다. 여성혐오든 남성다움이든 모두 후진적인 행태일 뿐이므로 작금의 ‘보통의 남성’과는 구분된다.4) 또한 그들은 인권을 보편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특수성을 강조하며 예외가 되려는 것은 자신의 후진성에 대한 고백과 다름이 없”(160)기 때문에 그렇게 인권 투쟁의 맥락에서 고려되는 차별과 폭력의 “질적 차이”(161)는 ‘사실’이나 ‘보편’과는 거리가 먼 ‘후진 것’으로 간주된다.5) 이렇듯 그들의 역사를 후진 것이나 특수한 것, 즉 열외로 취급하다 보니 남는 건 “성인-비장애인 남성”(162)일 뿐이다.
정리하자면 ‘보통의 남성’들의 정체성은 “단적으로 말해 경험적으로 자신들은 기득권자도 아니고 여성들에 비해 특혜를 받은 것도 없다는”(158) 인식에서 기인하는 “보편적 남성성”(158)이다. 다시 말해 이는 차별과 폭력의 질적 차이를 무시하며 인권을 이해하면서 신자유주의의 폭력의 궤도에 본인을 편입시키려는 정치성이다. 그러한 남성성은 과거의 ‘가장’ 또는 ‘마초’와는 동일하지 않을지 모르나, “문화적 특성이나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면서 인권을 적용”(162)하려는 움직임에 보편의 잣대를 들이밀고, 보편성과 정상성을 위협하는 난민/장애인/여성/트랜스남성의 운동에 대단히 냉소적이다.
한편, 고전적인 남성성과 결별했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재현하는 성인-비장애인 남성의 ‘정상성’은 고전적인 남성성과 그 담지자들을 재해석하면서 그들을 현대의 남성성의 교본 내지는 위인으로 호명하고 있다. 이를테면 ‘사이다’ 홍준표와 이준석이 그러하다. 소수자와 여성에 대한 혐오 발언, 그야말로 ‘후진’ 발언으로 무수히 많은 물의를 빚은 그들을 호명함으로써 남성 개인들은 단합하였고, 그들의 발언을 인용하며 자신들의 박탈감을 표출했다. 특정 인물의 발언과 혐오를 매개하지 않으면 단합할 수 없는 기이한 연결망을 구축했다. 그 연결망에는 후졌다고 인식하면서도 여전히 놓지 못하는 고전적인 남성성과 타인과 분절하려는 습성들이 개명을 앞다퉈 하고 있었다.
삭제하고 싶은 기억을 다시 꺼낸다. 들숨과 같이 끊임없이 경험했던 분절, 그리고 저항하는 이들에 대한 무시, 군대에 끌려 온 것에 대한 피해의식, 이것을 해결하기는커녕 가산점으로 인정해 주자는 사이다 위인들에 대한 지지. 그렇게 단합하지만 기본적으로 버릴 수 없는 분절의 습성. 나의 일이 아닌 모든 부당한 일들에 “나만 아니면 돼.”를 입에 달고 사는 이들. 함께 숨을 들이쉬었던 ‘새로운 민족’은 안녕할까.
전우들, 아니 ‘새로운 민족’들과 함께 했던 기억이 가장 새록새록할 때, 〈남성성, 읽을 거예요〉 세미나에 참여했다. 어려운 책들, 유익한 설명, 오랜만에 경험하는 토론 등, 오랜만에 느껴 본 쾌적한 들숨이었다. 세미나를 매주 거듭할수록, 그리고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를 읽고, 이런 생각을 했다. 아, 남성성을 읽고 연구한다는 건 남성성을 구출하거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을 떠나 오늘날의 시민성을 독해하는 방식일 수 있겠구나. 그리고 남성성을 사회의 은유, 매개의 주제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 꾸준히 언급하는 것은, 남성성으로 대표되는 사회문제의 성격을 사회로부터 분리하여, 사회를 구하려는 작업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 권김현영, 「근대 전환기 한국의 남성성」, 권김현영 외,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교양인, 2017. 이하 이 글의 직접인용은 괄호 안에 쪽수를 기입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2) 엄기호, 「보편성의 정치와 한국의 남성성」, 권김현영 외,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교양인, 2017. 이하 이 글의 직접인용은 괄호 안에 쪽수를 기입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3) 위의 글, 165-166쪽.
4) 위의 책, 158-160쪽.
5) 위의 책, 162쪽.
ⓒ 웹진 〈3e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