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신학적 단상
가교(Causeway)
김은정(연세대 국학연구원)
우리 엄마는 극 외향적인 성향을 가진 분으로, 친구 사귀기를 좋아하고, 함께 있으면 끊임없이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우리 아이들은 내 귀에 소음 제어(noise canceling) 기능이 자연적으로 탑재되어 있는 것 같다고 하는데, 이는 수다스러운 엄마의 장녀로 자란 덕분이다. 엄마의 이야기는 주로 주변 사람들의 사는 이야기다. “누구네는 이렇게 저렇게 재미나게 산다”로 시작해서, “그땐 그랬지, 내가 그랬지”의 추억 회상으로, 교회 목사님의 훌륭한 점을 열거하는 이야기로 진행되기도 해서 핵심을 잡기가 쉽지 않다. 논조는 비판보다 감탄이 주를 이룬다. 내 나름대로 엄마의 이야기의 큰 주제를 잡아 보면, 그것은 ‘좋은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요새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후의 추억을 반복해서 말씀하시는데, 잘 들어 보면 엄마가 바라는 것을 알겠다. 엄마도 할머니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죽음을 맞고 싶다는 소망이다. 당위보다 소망을 말하는 화법은 억압적이지 않으면서 자연스러운 당부가 된다. 어릴 때는 그런 화법이 나랑 친구를 비교하는 것 같아 발끈해서 그 애를 데려와서 키워 보라고 버럭하기도 했다. 그래도 엄마가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 남의 험담이나 설교식의 잔소리가 아니라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나도 익숙해져서, 그 진의를 생각하며 들을 말은 듣고 흘릴 말은 흘려보낸다.
청소년기를 지날 무렵 내 귀에 걸린 엄마의 말씀 중에, “엄마가 열심히 사는 이유는 너희 세대가 나보다 더 나은 삶을 살라고……”가 기억에 남는다. 그래서 나는 해방둥이 엄마 세대가 쌓아 놓은 토대 위에서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면서 10대와 20대를 보냈다. 엄마의 말씀처럼 내 인생을 풍요롭게 해 준 수많은 조건은 내 개인적인 노력의 산물이 아닌 ‘선물’이다. 자산과 유전자도 상속되지만 정신적 유산의 상속, 사회적 시스템의 상속은 한 가문을 넘어서 전 사회가 참여한다. 자연스럽게 내가 받은 선물을 독점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이는 현재 내가 누리는 혜택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인식하는 기독교적 ‘은혜’ 또는 ‘은총’과도 일맥상통하는데, 세대를 가로질러 나에게 온 은총의 선물, 내가 한 일은 거의 없는데 나에게 온 뜻밖의 선물 중 하나는 ‘여성안수’였다.
나는 여성안수를 아직 인정하지 않은 교단의 신학교에 입학해서 바로 그해 가을에 열렸던 교단 총회에서 여성안수 법안이 통과되는 것을 목격했다. 처음에는 목사가 될 생각이 없던 터라 여성안수가 되든지 안 되든지 나에겐 별 상관이 없다고 여겼다. 그런데 신학교에서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강한 확신을 가진 여성들을 만나고 생각이 바뀌었다. 나 개인을 생각할 때 바라는 것이 거의 없었으나 내 친구들을 생각할 때, 큰 흐름을 생각할 때 여성안수에는 여성의 자아실현보다 더 큰 사회적이고 신학적 의미가 있기에, 나는 총회 현장에서 열리는 시위에 참여했다. 이러한 여성안수를 계기로 교회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더 커지게 될 것이며, 목회에 대한 이해와 성서 이해에 새로운 변화가 생기면서 다양성을 조금 더 획득할 것이고, 자라나는 세대는 더 많은 다양성을 수용하게 되리라 기대했다. 이듬해 겨울에 열린 여신학생 수련회에서 여성목사가 집례한 첫 성찬식에 참여한 감동은 쉬이 잊히지 않았다.
작용과 반작용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역사의 변곡점을 지나면서 나는 교회 여성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기독여성운동의 한 자락에 참여하게 되었다. 직접 현장에 들어가서 인물을 만나고 운동을 경험하는 것은, 기록된 역사로는 알 수 없는 역사적 실재를 접하는 방법이다. 또한 여성신학은 ‘행동하는 신학’이므로 이론과 실천을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기도 했다. 내가 하는 일은 여성들의 모임에 참여해서 주로 그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말을 듣고, 그것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곰곰이 생각하고 추적하는 일이었다. 우리나라 현대사의 한복판에서 뒤에서 밀고 앞에서 끌고 간 기라성 같은 선배들을 만났고, 기록된 역사의 주인공으로 남을 여성 지도자들을 만났다. 여성의 역사에 접근할 때나 여성 단체에서 활동할 때, 엄마의 화법을 익힌 것이 도움이 된다. 비슷한 이야기를 몇 시간째 듣고 있으면, 효율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적당한 시점에 자리를 뜨고 말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내가 듣고 싶은 말이 나올 때까지, 아니면 나에게 필요한 영감이 떠오를 때까지 계속 듣는 지구력 같은 게 생겼다.
나는 영웅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개인적 주체로서 여성을 발견한 시대를 지나서 이제 그런 여성들이 서로 연결되어 만들어 놓은 사회적 시스템, ‘여자 사회’를 발견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그 역할을 맡지 않았더라면, 그 단체의 직위를 맡지 않았더라면 기라성 같은 여성 선배들의 이름이 이만큼 알려졌을까? 여성 단체가 만들어지고 여성의 연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나는 이우정, 박순경, 공덕귀, 김옥라, 조아라, 주선애 등 현대사를 만들어 간 여성들을 존경하면서도, 그들의 길을 준비해 둔 엘리사벳과 마리아 같은 수많은 무명의 여성을 기록된 역사로 재현하고 싶은 열망이 생겨서 ‘전도부인’의 역사를 연구했다.
전도부인들은 ‘부인전도회’의 일원이었고, 부인전도회는 모든 기독여성 단체의 모체로서 여기에서 다양한 여성 단체가 분화되어 나왔다. 처음 한국교회는 여자들이 엮어 놓은 둥지같이 안전하고 든든한 곳을 요람 삼아 자라났고, 사회개혁과 문화변혁을 가져 온 여성운동이 태동했다. 기독여성들은 사회로 진출했고 ‘배운 여성’으로서 사회에 공헌했으나 교회는 이 여성들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여러 종류의 기독여성 단체들이 표방하는 바와 대중적인 한국교회의 가르침 사이의 간격은 좁혀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내가 속한 교단에서는 ‘인권’이라는 말조차 생경하게 여기고 거부하기 때문에 여전도회 임원들이 연합활동을 할 때 인권위원장을 맡지 않으려는 해프닝도 있었다. 여성의 변화는 일직선이 아니라 지그재그 갈지자 형상으로 우리 엄마의 화법과 닮았다.
나를 기독여성운동의 역사로 이끌었던 여성안수가 법제화된 지 30년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 4,000명에 육박하는 우리 교단의 안수받은 여성 목회자들은 운동의 구심점을 잃었다. 제도적 차별이 없어졌기 때문에 굳이 여성이 연대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기득권을 누리는 사람들이 오래된 단체의 대표가 된 경우가 많다. 관계를 끊는 확실한 방법은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는 것이라 했던가. 타인과 함께하는 유연성도 잃어가고 있다. 여전도회와 여교역자회의 관계가 끊어지고, 여성 사이에도 차이를 가지고 구분하면서 계급화가 일어났다. 남성 지도자와 가까이 지내는 편이 권력을 얻는 더 확실한 길이 된다. 노회의 정치적 생리를 금세 터득한 여성 목사들이 여성 단체의 임원을 맡아서 직함 하나에 권위 하나를 얹고, 총회 헌법에 있는 목사의 종류를 위계적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생겼다. 자신이 세운 공이 크다고 주장하며 원로 대우를 보장하라는 어느 여목사님에게 그와 같은 시대를 살고 함께 일했던 다른 여목사님은 백여 년 동안 마룻바닥에 엎드려 기도한 여전도사의 눈물이 그 일을 낳았다고 일침을 놓았다. 아직 똑바른 정신을 이어주는 존경하는 원로가 남아 있기에 나는 단체활동의 가치를 체감한다.
‘Causeway’라는 이름의 국제 여성 평화사절단이 1974년 우리나라에 방문해서 기독여성들과 만난 기록을 본 적이 있다. 낮은 습지 위로 사람이 다닐 수 있는 둑길, 가교를 만든다는 취지의 사절단인 ‘Causeway’는 당시 한국교회여성연합회 회장이었던 이우정과 만나서 원폭 피해자 문제를 국제적 평화운동으로 올려놓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신학적으로 훈련받은 여성으로서 특권을 나누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갈지자로 가다가 빠질 수 있는 기독여성운동의 늪 위에서도, 여성이 신학할 수 있는 길은 너무나 분명하다. 몇몇 여교역자들은 작은 그룹을 형성해서 여성목회를 주제로 삼아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상호 배움터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교회의 사회적 위상이 추락하고 교회 안에서 성차별이 사라지지 않은 오늘날, 여성이 목회자가 되는 것은 그리 큰 권력을 생산하지 않는다. 그래도 교회의 변화를 위해 작은 전략을 세울 때 여성신학적 기반은 유용한 지혜를 제공한다.
ⓒ 웹진 〈3era〉
여성신학적 단상
가교(Causeway)
김은정(연세대 국학연구원)
우리 엄마는 극 외향적인 성향을 가진 분으로, 친구 사귀기를 좋아하고, 함께 있으면 끊임없이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우리 아이들은 내 귀에 소음 제어(noise canceling) 기능이 자연적으로 탑재되어 있는 것 같다고 하는데, 이는 수다스러운 엄마의 장녀로 자란 덕분이다. 엄마의 이야기는 주로 주변 사람들의 사는 이야기다. “누구네는 이렇게 저렇게 재미나게 산다”로 시작해서, “그땐 그랬지, 내가 그랬지”의 추억 회상으로, 교회 목사님의 훌륭한 점을 열거하는 이야기로 진행되기도 해서 핵심을 잡기가 쉽지 않다. 논조는 비판보다 감탄이 주를 이룬다. 내 나름대로 엄마의 이야기의 큰 주제를 잡아 보면, 그것은 ‘좋은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요새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후의 추억을 반복해서 말씀하시는데, 잘 들어 보면 엄마가 바라는 것을 알겠다. 엄마도 할머니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죽음을 맞고 싶다는 소망이다. 당위보다 소망을 말하는 화법은 억압적이지 않으면서 자연스러운 당부가 된다. 어릴 때는 그런 화법이 나랑 친구를 비교하는 것 같아 발끈해서 그 애를 데려와서 키워 보라고 버럭하기도 했다. 그래도 엄마가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 남의 험담이나 설교식의 잔소리가 아니라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나도 익숙해져서, 그 진의를 생각하며 들을 말은 듣고 흘릴 말은 흘려보낸다.
청소년기를 지날 무렵 내 귀에 걸린 엄마의 말씀 중에, “엄마가 열심히 사는 이유는 너희 세대가 나보다 더 나은 삶을 살라고……”가 기억에 남는다. 그래서 나는 해방둥이 엄마 세대가 쌓아 놓은 토대 위에서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면서 10대와 20대를 보냈다. 엄마의 말씀처럼 내 인생을 풍요롭게 해 준 수많은 조건은 내 개인적인 노력의 산물이 아닌 ‘선물’이다. 자산과 유전자도 상속되지만 정신적 유산의 상속, 사회적 시스템의 상속은 한 가문을 넘어서 전 사회가 참여한다. 자연스럽게 내가 받은 선물을 독점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이는 현재 내가 누리는 혜택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인식하는 기독교적 ‘은혜’ 또는 ‘은총’과도 일맥상통하는데, 세대를 가로질러 나에게 온 은총의 선물, 내가 한 일은 거의 없는데 나에게 온 뜻밖의 선물 중 하나는 ‘여성안수’였다.
나는 여성안수를 아직 인정하지 않은 교단의 신학교에 입학해서 바로 그해 가을에 열렸던 교단 총회에서 여성안수 법안이 통과되는 것을 목격했다. 처음에는 목사가 될 생각이 없던 터라 여성안수가 되든지 안 되든지 나에겐 별 상관이 없다고 여겼다. 그런데 신학교에서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강한 확신을 가진 여성들을 만나고 생각이 바뀌었다. 나 개인을 생각할 때 바라는 것이 거의 없었으나 내 친구들을 생각할 때, 큰 흐름을 생각할 때 여성안수에는 여성의 자아실현보다 더 큰 사회적이고 신학적 의미가 있기에, 나는 총회 현장에서 열리는 시위에 참여했다. 이러한 여성안수를 계기로 교회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더 커지게 될 것이며, 목회에 대한 이해와 성서 이해에 새로운 변화가 생기면서 다양성을 조금 더 획득할 것이고, 자라나는 세대는 더 많은 다양성을 수용하게 되리라 기대했다. 이듬해 겨울에 열린 여신학생 수련회에서 여성목사가 집례한 첫 성찬식에 참여한 감동은 쉬이 잊히지 않았다.
작용과 반작용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역사의 변곡점을 지나면서 나는 교회 여성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기독여성운동의 한 자락에 참여하게 되었다. 직접 현장에 들어가서 인물을 만나고 운동을 경험하는 것은, 기록된 역사로는 알 수 없는 역사적 실재를 접하는 방법이다. 또한 여성신학은 ‘행동하는 신학’이므로 이론과 실천을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기도 했다. 내가 하는 일은 여성들의 모임에 참여해서 주로 그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말을 듣고, 그것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곰곰이 생각하고 추적하는 일이었다. 우리나라 현대사의 한복판에서 뒤에서 밀고 앞에서 끌고 간 기라성 같은 선배들을 만났고, 기록된 역사의 주인공으로 남을 여성 지도자들을 만났다. 여성의 역사에 접근할 때나 여성 단체에서 활동할 때, 엄마의 화법을 익힌 것이 도움이 된다. 비슷한 이야기를 몇 시간째 듣고 있으면, 효율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적당한 시점에 자리를 뜨고 말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내가 듣고 싶은 말이 나올 때까지, 아니면 나에게 필요한 영감이 떠오를 때까지 계속 듣는 지구력 같은 게 생겼다.
나는 영웅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개인적 주체로서 여성을 발견한 시대를 지나서 이제 그런 여성들이 서로 연결되어 만들어 놓은 사회적 시스템, ‘여자 사회’를 발견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그 역할을 맡지 않았더라면, 그 단체의 직위를 맡지 않았더라면 기라성 같은 여성 선배들의 이름이 이만큼 알려졌을까? 여성 단체가 만들어지고 여성의 연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나는 이우정, 박순경, 공덕귀, 김옥라, 조아라, 주선애 등 현대사를 만들어 간 여성들을 존경하면서도, 그들의 길을 준비해 둔 엘리사벳과 마리아 같은 수많은 무명의 여성을 기록된 역사로 재현하고 싶은 열망이 생겨서 ‘전도부인’의 역사를 연구했다.
전도부인들은 ‘부인전도회’의 일원이었고, 부인전도회는 모든 기독여성 단체의 모체로서 여기에서 다양한 여성 단체가 분화되어 나왔다. 처음 한국교회는 여자들이 엮어 놓은 둥지같이 안전하고 든든한 곳을 요람 삼아 자라났고, 사회개혁과 문화변혁을 가져 온 여성운동이 태동했다. 기독여성들은 사회로 진출했고 ‘배운 여성’으로서 사회에 공헌했으나 교회는 이 여성들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여러 종류의 기독여성 단체들이 표방하는 바와 대중적인 한국교회의 가르침 사이의 간격은 좁혀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내가 속한 교단에서는 ‘인권’이라는 말조차 생경하게 여기고 거부하기 때문에 여전도회 임원들이 연합활동을 할 때 인권위원장을 맡지 않으려는 해프닝도 있었다. 여성의 변화는 일직선이 아니라 지그재그 갈지자 형상으로 우리 엄마의 화법과 닮았다.
나를 기독여성운동의 역사로 이끌었던 여성안수가 법제화된 지 30년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 4,000명에 육박하는 우리 교단의 안수받은 여성 목회자들은 운동의 구심점을 잃었다. 제도적 차별이 없어졌기 때문에 굳이 여성이 연대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기득권을 누리는 사람들이 오래된 단체의 대표가 된 경우가 많다. 관계를 끊는 확실한 방법은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는 것이라 했던가. 타인과 함께하는 유연성도 잃어가고 있다. 여전도회와 여교역자회의 관계가 끊어지고, 여성 사이에도 차이를 가지고 구분하면서 계급화가 일어났다. 남성 지도자와 가까이 지내는 편이 권력을 얻는 더 확실한 길이 된다. 노회의 정치적 생리를 금세 터득한 여성 목사들이 여성 단체의 임원을 맡아서 직함 하나에 권위 하나를 얹고, 총회 헌법에 있는 목사의 종류를 위계적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생겼다. 자신이 세운 공이 크다고 주장하며 원로 대우를 보장하라는 어느 여목사님에게 그와 같은 시대를 살고 함께 일했던 다른 여목사님은 백여 년 동안 마룻바닥에 엎드려 기도한 여전도사의 눈물이 그 일을 낳았다고 일침을 놓았다. 아직 똑바른 정신을 이어주는 존경하는 원로가 남아 있기에 나는 단체활동의 가치를 체감한다.
‘Causeway’라는 이름의 국제 여성 평화사절단이 1974년 우리나라에 방문해서 기독여성들과 만난 기록을 본 적이 있다. 낮은 습지 위로 사람이 다닐 수 있는 둑길, 가교를 만든다는 취지의 사절단인 ‘Causeway’는 당시 한국교회여성연합회 회장이었던 이우정과 만나서 원폭 피해자 문제를 국제적 평화운동으로 올려놓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신학적으로 훈련받은 여성으로서 특권을 나누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갈지자로 가다가 빠질 수 있는 기독여성운동의 늪 위에서도, 여성이 신학할 수 있는 길은 너무나 분명하다. 몇몇 여교역자들은 작은 그룹을 형성해서 여성목회를 주제로 삼아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상호 배움터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교회의 사회적 위상이 추락하고 교회 안에서 성차별이 사라지지 않은 오늘날, 여성이 목회자가 되는 것은 그리 큰 권력을 생산하지 않는다. 그래도 교회의 변화를 위해 작은 전략을 세울 때 여성신학적 기반은 유용한 지혜를 제공한다.
ⓒ 웹진 〈3e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