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고통은 무엇을 표현하는가?
금융화 시대 민중신학을 위한 서설

정용택(제3시대 연구실장)
들어가며
“민중신학의 현재적 쟁점들”이라는 제목으로 발행될 <웹진 3era> 이번 여름호에서 편집장님이 내게 요청한 주제는 “민중신학의 세대론적 재전개”였다. 사실 그 주제에 관해선 이미 웹진 3era에서 두 차례에 걸쳐 시론적으로 다룬 바 있고, 보다 상세한 논점을 다른 지면에서 제기한 바 있다. 필자가 보기에 민중신학을 세대론적으로 재(再)전개하는 작업의 일차적인 관건은 결국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2020년대의 한국 자본주의 사회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필자는 이를 자본주의 시대구분 및 시대진단의 과제로 정식화하였는데, 금융화(financialization)라 불리는 현상이 중요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오늘날 학계에서 금융화는 기본적으로 경제 전체에서 ‘새로운 금융기구와 새로운 금융시장의 발생’과 더불어 실물경제 또는 산업부문에 비하여 금융부문이 갖는 의미와 역할이 상대적으로 훨씬 더 커지게 된 현상을 가리킨다(하비, 1994: 243).
하지만 한국 사회를 포함하여 1980년대 이래로 동시대 세계에 금융화가 초래한 거대한 변화는 단순히 경제 영역에만 한정되지 않으며, 정치적·사회적·문화적 영역을 넘어 종교와 신앙의 영역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결정적으로 민중신학의 각 세대들이 언제나 당대 한국사회의 위기구조를 그 시대 특유의 ‘고통 구조의 확대재생산 체제’이자 ‘고통의 불균등한 배분 체제’로 인식하려 했던 한에서(김진호, 2001: 272), 1997년 이래로 한국 자본주의의 금융화 현상은 사회적 고통에 관한 민중신학적 연구에서도 핵심적인 의미를 갖는 위기구조라 할 수 있다. 금융화 시대 한국사회의 위기구조에서 비롯되는 사회적 고통의 구체적인 양상들에 관해선 다음 호 연재에서 본격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선 일단 왜 오늘날 사회적 고통이 금융화와 만날 수밖에 없는지를 ‘가치’(value) 범주의 도입을 통해 짚어보고자 한다.
사회적 고통에서 금융화로 가기 위해 무엇보다도 가치라 불리는 경제학적·윤리학적 범주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는 금융화가 자본주의 그 자체가 갖는 논리에 따라 전개되는 과정, 즉 “사용가치의 실질적 창출 및 유통으로부터 가치를 모순적으로 분리시킴으로써 가치증식하려는 자본의 경향”, 곧 자본의 자립화 운동의 극단적 양상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본의 자립화(autonomization)의 금융적 차원으로서 금융화란 “증권, 채권, 주식, 파생상품, 금융자산 일반의 거래”가 비금융기업의 생산과정, 생산현장의 노동과정, 정부부문, 가계 및 개인행위자들의 행위원리, 그리고 행위의 지향점에까지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역사적인 현상을 넘어 “그 자체의 물질적 토대로부터 스스로를 ‘자립화’하는 자본의 본유적인 경향”을 암시한다(Teixeira & Rotta, 2012; Rotta & Teixeira, 2018). 이처럼 사회적 고통으로부터 먼저 가치의 범주가 갖는 의미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선 금융화된 자본주의 시대 한국사회의 위기구조에서 비롯되는 사회적 고통에 관한 체계적 접근이 어려우며, 그러한 접근이 이론적 타당성을 얻지 못하면 민중신학의 세대론적 재(再)전개 프로젝트 역시 실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오늘은 먼저 고통과 가치의 관계를 살펴보는 데 집중하고자 한다.
표현된 것과 말해진 것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세계의 비참』(The Weight of the World: Social Suffering in Contemporary Society)의 말미에 일종의 방법론적 부록으로 덧붙인 「추신」에서 그의 연구팀이 인터뷰했던 고통의 주체들에 관해 매우 의미심장한 발언을 한 바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사회인들이 배우지 않아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해, 그들이 자신의 불만이나 불편함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를 당연히 알고 있는가 하면, 결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주 자발적인 선언이라는 것도, 감추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겉으로 말하는 것과는 실은 전혀 다른 것을 표현하고 있을 수가 있다. (부르디외, 2002: 1483; 강조는 인용자)
일단 자신의 인터뷰이들이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표현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부르디외가 추정하는 대목을 주목해보자. 그러니까, 부르디외는 지금 ‘표현된 것’(what is expressed)과 ‘말해진 것’(what is said)을 구별하고 있는 셈이다(Lovell, 2007: 73). 말해진 것과 표현된 것은 어떻게 다른가? 둘을 구별하는 기준은 ‘언어’이다. 개인이 행위주체로 인정받을 수 있게 해주는 공적 언어, 즉 공적 영역에서 “말할 수 있는 능력”과 연관된 ‘담론 자원’(discursive resources)의 유무에서 ‘말해진 것’과 ‘표현된 것’이 갈라진다. 공적 영역에서의 의사소통이 언어라는 매체를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담론 자원’은 공적 영역에 대한 실질적인 접근을 좌우하는 근본적 요소이다(齋藤純一, 2009: 33). 그런 의미에서, 노동자 구역의 주민들, 프랑스 북부의 두 청년, 미국 흑인 게토 안에서의 허슬러, 할렘가의 푸에르토리코인 마약 딜러, 임시직 노동자, 중앙우체국의 여직원, 공장의 여직공, 실업 여성, 걸인 부부, 베아른 지방의 두 농부, 아랍인 청년, 파리 교외의 여고생들, 나이트클럽 문지기, 이민 노동자, 입원한 여환자 등에 이르는, 부르디외와 그의 동료들이 인터뷰했던 사회적 고통의 다양한 주체들이 말하는 것과 다른 것을 표현하고 있다는 부르디외의 진술은 그들이 공적 언어로 자신들의 고통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이 책에 참여한 연구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부르디외의 가장 저명한 제자이기도 한 사회학자 바캉(Loïc Wacquant)은 부르디외가 1990년대 들어서 ‘사회적 고통’의 경험에 관한 연구에 착수한 것은 사회학의 윤리적 개념화, 혹은 사회학의 소크라테스적 기능에 대한 그의 고민에서 비롯되었다고 진단한다. 말 그대로 사회학자를 구조의 피해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말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산파이자 정신분석가처럼 자리매김했다는 것이다. 그는 부르디외의 시도가 사회학자를 자기 시대의 병을 따져 묻고 새로운 인식을 촉발시키는 소크라테스적 의미에서 일종의 산파였다고 평가한다. 부르디외는 이에 답하면서 자신이 가졌던 연구의 목표를 다음과 같이 들려준다.
이 연구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비개인적이라는 발상에 전제를 두고 있다. 많은 수의 가장 내밀한 드라마, 뿌리 깊은 불편함, 여성들과 남성들이 경험하는 자기만의 고통은 노동과 주택 시장의 구조, 학교 체계의 무자비한 제재, 또는 경제적·사회적 상속 메커니즘 안에 새겨진 객관적 모순, 제약과 이중구속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목표는 말로 표현되지 않은, 억압된 담론을 떠오르게 만드는 것이다. (부르디외‧바캉, 2015: 328, 강조는 인용자)
민중신학자들이 자신들의 역할을 민중의 고통에 대한 증언자의 역할이라 보았던 것과 유사하게, 부르디외가 고통 연구의 정치적인 기능이 ‘대변인’의 기능이라 보았던 것이 정확히 그런 의미에서다. 그에게 있어서 사회적 고통이라는 문제계는 일반적으로 제도 정치의 심의와 사회운동의 이슈에서 고려되지 않는 다양한 사회 문제들을 식별하기 위해 도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자본과 노동의 전지구적 이동, 복지국가의 해체를 배경으로 한 유연화된 신자유주의적 노동 조건하에서 노동자들의 불안의 심화와 더불어 선진자본주의 사회에서 우울증과 정신적 혼란의 급증은 그동안 정치의 공론장이나 사회정책 부문에서 잘 조명되지 않던 새로운 사회 문제들로 부상했다. 부르디외가 학문적으로 개입하고자 했던 지점이 바로 이렇게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고통들이 정치적 영역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로서 제대로 인지되고 못하고 있는 현실이었다. 그에게 사회적 고통은 그 자체로는 사회 문제이지만, 그 원인과 효과에 측면에서 보자면, 인지적인 문제인 동시에 정치적 문제였던 것이다. 부르디외는 왜 “사회적 고통, 비참, 불편, 또는 원한”에 대한 탐색적인 연구에 착수했던 것인지도 결국 거기서 그 답이 드러난다.
그래서 『세계의 비참』의 「추신」 첫머리에서부터 부르디외는 정치가들을 신랄하게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계는 지금 정치가들만의 세계와 내부의 경쟁자, 내부의 문제들, 자신들의 목적 등에만 눈을 돌리고 있으며, 외부로 향한 문을 서서히 닫아 가고 있는 중”이며, 기자들은 “내부 혹은 외부 권력의 압력이나 검열, 특히 경쟁심, 그리고 경쟁심으로 인한 시간 다툼 등을 구속을 받고 있는” 한에서 그들 역시 정치계와 마찬가지로 대중들의 사회적 고통에는 무관심하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이제 남은 것은 지식인들인데,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들을 수 없는 것”을 보고 들어야 할 그들조차도 “이민자 문제에 대해, 주거 정책에 대해, 노사 관계에 대해, 관료주의에 대해, 그리고 정치계에 대해” 떠들기만 할 뿐, 즉 “겉으로 드러난 환자의 증상과 호소만 무조건 접수”하고 있을 뿐, “사회적 위기의 진짜 원인들을 알고, 이해하기 원하는 사회과학”처럼 “사물이나 현상의 본질을 꿰뚫”어 보진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부르디외는 “경제적 구조와 사회적 구조들 속에 ‘내재된 폭력’과 비참한 삶으로부터,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나타나는 작은 폭력들과 모든 사소한 불행들로부터 비롯된 사회적 고통에 관해 가장 원초적 표현들을 사용해 가며 그것을 과장하기에만 급급한” 의견학자들의 수준을 넘어, “많은 사람들의 자유와 정당한 행복 추구, 자아 성취 등을 해치는 진짜 사회적·경제적 요인들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록 “삶을 고통스럽고 심지어 살 수 없을 정도로까지 만드는 구조들을 제대로 인식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그 구조들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모순들을 밝혀낸다고 해서, 그것이 곧 그 모순들을 해결하는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고통의 사회학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고통의 책임을 자기 자신이 아니라 사회적 원인에서 찾을 수 있게 함으로써 그들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게 해주고, 또한 내밀하고 비밀스러운 형태를 포함하여 온갖 다양한 모습으로 출현하는 불행들의 출처, 즉 집단적으로 은폐되어 온 사회적 출처를 널리 드러내” 줄 수는 있다고 주장한다. 부르디외의 ‘고통의 사회학’은 바로 이러한 그의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요컨대, 부르디외의 사회적 고통 연구는 인간이 겪고 있는 사회적으로 비참한 삶에 에 대한 관심과 주의를 끌어냈다. 기존의 사회 비판적 연구의 주류가 사회 안에서 물질적 재화의 불평등한 재분배에 관심을 가져왔다면, 부르디외는 빈곤, 계급 또는 인종에 따른 행위주체들 고통의 감정들―굴욕, 분노, 실망, 원한 등―을 포함하여, 지배와 억압의 살아있는 구체적 경험들에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다. 즉, 성찰적이기보다는 차라리 비(非)성찰적인 또는 전(前)반성적인 현상으로서 일상에서 ‘당연시되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에 관심을 기울인 것이다. 더 이상 고통이 사유 불가능하고 표현 불가능한 개인적 차원의 내밀한 문제가 아니라, 사회학적으로 분석되고 재현되고 논의될 수 있는, 아니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사회학의 핵심적 테마로 그 중요성을 끌어올린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형태의 핵심적 제도
그러나 아직도 모르겠는 것이 있다
과실이나 결과를 탐하지 않고
불의와 폭력에 맞서다 이름 없이 스러지는
더 수많은 이들의 선한 의지는
도대체 어디서 발원하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송경동 시(詩), 「토대」 중에서
그렇다면, 왜 그들은 고통을 말할 수 없는가? 부르디외는 그 이유를 이미 먼저 언급했다. “그들이 자신의 불만이나 불편함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를”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공적 언어로 자신들의 고통을 소통 가능하게 말할 수 있는 능력, 즉 담론 자원이 부재한다. 하지만, 그들이 고통을 공적 언어로 말할 수 없다고 해서 그들과의 대화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공적 영역에서 소통 가능한 분절된 언어로 자신들의 고통을 전달하진 못해도, 혹은 사회적 고통의 원인을 진단할 수 있는 공적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지 못하더라도, 그들은 자신들의 고통의 실재성을 다른 방식으로 충분히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르디외의 이러한 생각은 악셀 호네트의 인정이론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패러다임의 언어이론적 버전과는 다른 대안적 버전”에 해당하는) “사회적 불의의식의 가능한 표현형식”(호네트, 2009: 150)에 관한 착상과도 긴밀히 조응한다. 부르디외와 호네트는 어떤 근거에서 표현된 것의 핵심이 말해진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추정하는가? 부르디외에게 그 답이 하비투스(habitus) 개념에 놓여 있다면, 호네트에게는 배링턴 무어로부터 빌려온 ‘불의의식(不義意識)’(Unrechtsbewußtsein) 또는 ‘불의의 지각양식’이라는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정형화되지 못한 것, 그리고 정형화될 수 없는 불만들은 정치 조직에 의해 지각될 수 없으며, 따라서 책임 있게 취급될 수도 없다. 정치 조직들은 기껏해야 “사회적인 것”이라는 진부한 범주를 갖고 이러한 불만에 대해 생각할 뿐이다; 정치 기구들은 표현되지 못한, 다시 말해 대개의 경우 표현될 수 없었던 위기들을 생각해 본답시고 ‘사회 문제’의 낡고 진부한 부분만 다루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정치 기구들이 그러한 위기들을 제대로 지각할 수도, 담당할 수도 없음을 굳이 말해 무엇하랴. (호네트, 2014: 185; 부르디외, 2002: 1522)
호네트가 부르디외를 인용한 위의 단락에서 “정형화되지 못한 것, 그리고 정형화될 수 없는 불만들”이라는 진술은 앞서의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표현하고” 있다는 “불만이나 불편함”에 관한 언급과 연결되며, 호네트 자신의 용어로는 ‘불의의 지각양식들’에 관한 설명과 연관된다. 호네트에 따르면, “사회 하층민들의 규범적 요구들은 적극적으로 제기된 정의관념에서 보다는 전형적 불의의 지각양식들에서 간접적으로 더 잘 드러난다”(호네트, 2009: 155). 주변화된 집단들의 ‘불의의 지각양식’에 대한 호네트의 강조는 그러한 집단들의 개별 구성원들의 도덕적 경험이 좀처럼 실체적으로 공식화되진 않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정의에 대한 명확한 직관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는 확신에 근거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규범적 기대가 배반당했을 때, 즉 자신들이 정당하게 받을만하다고 여기는 인정을 거부당했을 때, 언제든지 그와 같은 도덕적 불의의 경험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호네트에게 “그와 같은 정의감의 규범적 핵심은 모든 연구에서 자신들이 지닌 존엄성, 영예 또는 불가침성에 대한 존중의 요구와 연관된 기대다”(호네트, 2009: 123). 호네트는 그런 상황 속에서 인간주체들이 전형적으로 겪는 도덕적 불의의 경험을 사회적 무시의 감정이라 규정한다. 필자는 그것을 ‘사회적 고통’에 대한 개념 규정에서 그대로 적용한 바 있다. 그렇기에 호네트는 프레이저와의 논쟁에서 부르디외를 인용하면서, 사회적 불의에 대한 참조점은 프레이저가 의지하는 “사회운동과 정치적 행위자들이 암묵적으로 가정하는 대중적 패러다임”(프레이저, 2014: 30)이 아니라, 불의로서 주체들에게 경험된 것으로서, 정치적 언어로 명료하게 분절되지 않는 어떤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할 수 있었다. 호네트는, 비판이론의 준거점으로 작용하는 사회적 불의에 대한 참조점이 “사회적 요구에 대해 구조적으로 저항하는 인간의 심리”라는 전(前)학문적이고 전(前)정치적인 도덕성의 심층 수준에 놓여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호네트, 2014: 364; 호네트, 2009: 110).1)
그렇다면 비록 고통의 주체들이 정형화된 방식으로 말하고 있진 못하지만 불의의 지각양식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는 그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위에서 인용했던 문장에서, 부르디외는 그에 관한 한 가지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한글판보다는 영역판에서 더욱 명시적으로 드러나는데, 부르디외에 따르면 “그들의 불만이나 그들의 불안의 핵심 원칙들(core principles)”을 고통의 주체들은 공적 언어로 말하고 있진 않지만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한글판과 영문판의 서술을 종합하면, 비록 사회적 고통의 주체들은 “자신의 불만이나 불편함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즉 “그들의 불만이나 그들의 불안의 핵심 원칙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할 수는 없지만 표현할 수는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이 말할 수 없지만 표현하고 있는, 불만이나 불편함이 비롯되는 핵심 원칙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이야기인데, 도대체 그것이 무엇일까? 부르디외보다는 좀 더 구체적이긴 하지만, 호네트는 여전히 모호한 용어로 그것을 말한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형태의 핵심적 제도(die Kerninstitutionen der kapitalistischen Gesellschaftsform)가 형성되는 데 아주 더 큰 중요성을 갖는 것은 이와 다른 발전 과정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형태의 도덕적 질서를 위한 기본 토대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호네트, 2014: 214)
자본주의 사회형태의 핵심적 제도(the core institutions of the capitalist form of society)! 호네트와 마르크스를 (재)접합시키고자 하는 많은 연구자들이 주목해온 이 표현은 적어도 호네트 자신에게선 그다지 심도 있게 성찰되고 있진 않다(Deranty, 2010; Renault, 2011; Schmidt am Busch, 2008; Schmidt am Busch, 2010; Schmidt am Busch, 2015). 호네트에게 그것은 단지 그가 계속 말해온 사회적 인정관계의 구조를 가리킬 뿐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호네트는 헤겔 법철학의 가족, 시민사회, 국가에 대한 설명 틀을 전유하여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형성 과정에서 인정관계의 구조가 사랑, 권리, 연대라는 세 가지의 인정 유형에 상응하는 세 가지의 인정질서(가족으로 대표되는 친밀성의 영역, 권리를 보장하는 시민사회의 영역, 연대성을 제도화한 국가의 영역)의 제도적 분화로 발전해왔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행위주체들이 사회적 고통에 저항할 수 있는 근거로 작용하는 근본적인 인정 기대, 또는 도덕적 불의의식은 호네트가 ‘자본주의 사회형태의 핵심적 제도’라 명명한 것의 심층적인 제도적 수준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하지만, 가족‧시민사회‧국가와 같은 인정질서의 영역이 곧바로 사회적 고통을 발생시키는 자본주의 사회형태의 핵심적 제도라고 보긴 어렵다. 그 세 가지 영역이 그 자체로 자본주의 사회형태는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전(前)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이미 존재했던 그러한 영역들을 자본주의적 사회형태로 변형시키는 핵심적 제도는 따로 있기 때문이다.
보편적으로 잘못된 가치전도의 세계2)
사회적 고통이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가에 대한 우리의 질문은 이제 호네트와 부르디외가 명확히 제시하지 못한 지점, 즉 불의의 지각양식을 통해서 표현되고 있는 고통 발생의 ‘핵심 원칙’, 또는 ‘자본주의 사회형태의 핵심적 제도’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구체화된다. 물론 그 답은 여전히 고통에 있다. 부르디외와 호네트가 공통적으로 지적하듯이, 제도적 틀에서 생산되는 고통들 가운데는 개인들이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명료한 공적 언어로 분절해내지 못하면서도, 그 상황을 불의한 것으로 명확히 인지하고 있는 그러한 유형의 도덕적 경험이 존재한다. 이러한 경우에, 불의를 생산하는 것은 바로 현 상황에서 특정한 규범적 원칙들에 의해 틀지어져 있는 사회질서 그 자체이다. 따라서 제도적 틀을 규정하고 있는 규범이나 규칙들이 근본적인 인정 기대와 모순을 이루고 있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그러한 불의는 기존의 제도적 규칙 및 규범을 통해선 불의한 것으로 서술될 수 없기 때문에 문제적이다. 이는 불의를 규정하는 보편성의 최종심급이 되어야 할 법이나 국가, 혹은 시민사회 전체가 이미 규범적으로 그릇된 상태에 빠져 있는 상황을 암시한다. 아도르노식(式)으로 말하자면, ‘총체적 현혹연관’(total delusion)에 빠져 있기에 규범적 이상과 현실 간의 괴리에 근거한 내재적 비판조차 불가능해지는 상황인 것이다.3)
프랑스 철학자 리오타르는 이러한 상황을 ‘잘못’(wrong; [佛]tort)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는데, 놀랍게도 이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사회적 고통을 설명하기 위해 민중신학에서 제시된 ‘한(恨)’, 즉 언표화 불가능한 고통의 개념과 유사한 사회적 맥락을 반영하고 있다(서남동, 1983: 44, 109; 안병무, 1988: 290; 김진호, 2006: 238; 김진호, 2013: 364).
잘못이란, 손해의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는 수단을 상실한 손해일 것이다. 만약 희생자가 생명을 잃거나 모든 자유를 잃는다면, 또는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을 공개적으로 표현할 자유, 아니면 단순히 이러한 손해에 대하여 증언할 권리를 잃는다면, 그것도 아니라면 단순히 증언의 문장 자체가 권위를 잃는다면, 이는 사실일 것이다. 이 모든 경우에서, 손해로 인한 상실에 대해, 타자에게, 특히 법정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리는 것의 불가능성이 추가된다. (리오타르, 2015: 23)
리오타르에게 ‘잘못’이란 합리적으로 혹은 법리적으로 시비를 가릴 수 있는 소송의 영역을 초과하는, 즉 법정에서 그 진실을 증언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어떤 절대적인 ‘불의’나 ‘피해’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잘못’은 사회 전체가 이미 잘못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공정한 게임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를 가리킨다. 그래서 리오타르가 이러한 ‘잘못’이 “감정의 침묵, 고통에 의해 표현된다”고 말할 때, 그는 부르디외와 호네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고 총체적인 수준에서 “증명의 불가능성에 의해 표시”되는 고통의 상황을 사유하고 있음이 드러난다(리오타르, 2015: 31). 적어도 이러한 ‘잘못’의 상태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것이 결국 표현하고 있는 ‘핵심 원칙’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데 있어선 호네트나 부르디외보다 그는 훨씬 더 멀리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마르크스의 초기 텍스트 가운데 하나인 「헤겔 법철학 비판을 위하여」(1844)에서 ‘잘못’이라는 개념의 중요한 역사적 용례를 발견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종결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계속할 것인가? 마르크스는 1843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뿌리 깊은 굴레에 얽매어 있는 한 계급, 결코 시민사회의 계급이 아닌 시민사회의 한 계급, 모든 신분들의 해체인 한 신분, 자신의 보편적 고통 때문에 보편적 성격을 지니고 있고 특수한 잘못이 아니라 잘못 그 자체(ein Unrecht schlechthin)가 그들에게 자행되기 때문에 어떤 특수한 권리도 요구하지 않는 한 영역”(「헤겔 법철학 비판을 위하여」, 14쪽). 잘못은 감정의 침묵, 고통에 의해 표현된다. 이것은 모든 문장의 우주 및 그것들의 모든 연쇄가 자본(하지만 자본은 하나의 장르인가?)의 유일한 목적성에 종속되어 있거나 종속될 수 있고 그 목적성에 따라 판단된다는 사실에서 생겨난다. […] 따라서 자본이 문장들에 가하는 잘못은 보편적 잘못일 것이다. 비록 잘못이 보편적이지 않다고 해도(잘못이 보편적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이것은 하나의 이념이다), 어떤 쟁론을 표시하는 침묵하는 감정은 여전히 들려야 할 것으로 남아 있다. 사유 앞에서의 책임이 그것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쟁론의 감정으로서 마르크스주의는 종결되지 않았다. (리오타르, 2015: 297, 강조는 인용자)
리오타르는 ‘잘못’이라 불리는 극단적인 사회적 고통의 상황을 환기시킴으로써, 우리를 마르크스의 세계, 곧 ‘보편적 잘못’의 세계로 다시 돌려보낸다. 바로 ‘자본’의 세계이다. 자본의 세계는 자본의 목적성인 ‘교환원리’가 지배하는 세계를 말한다. 자본의 교환원리는 철학적으로 동일성의 원칙을 전제로 한다. 바꿔 말하면, 모든 교환관계는 곧 동일성 원칙을 구현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교환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우선 교환에 참여하고 있는 서로 다른 사물들이 어떻게든 동질적이거나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자본주의적 교환관계에 동일성 원칙이 적용됨으로써, 동일하지 않은 모든 것들이 동일한 것으로, 즉 교환이 가능한 ‘상품’으로 변화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러한 동일시는 다양한 실재의 대상을 가리키는 ‘사용가치’를 억압하고, 교환가치라는 하나의 동일한 개념 아래로 포섭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 사회형태가 확립하고 있는 이 동일성의 원칙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가치법칙’이라 부른다.
문제는 바로 그러한 가치법칙이 시장과 조직이라는 자본주의의 두 가지 주요한 제도들을 공동-결정하고 상호-매개하는 근본적인 규범이자 규칙이며, “사회적 삶 전체의 토대에 존재하는 공통된 가치”(오를레앙, 2016: 368), 즉 경제적 가치로 표현된 모든 자본주의 사회형태들(가치, 상품, 화폐, 자본, 추상노동, 임금노동, 잉여가치, 신용, 자본-이윤(이자), 토지-지대, 노동-임금, 그외 자본의 다양한 그림자 형태들)을 구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제도 그 자체라는 점이다. “가치는 공통의 삶을 허용하는 집단적 산물이다. 가치는 제도적 성격을 갖는다”(같은 글, 369). 사회적 고통을 생산‧구성‧표현하고 있는 제도적 틀 안에, “즉, 명성과 사회적 인정의 규범 이면에는 이해관계와 타자의 욕망을 포획함으로써 이해관계를 표출해 줄 수 있는 힘이 존재”(같은 글, 168)하는데, 그것이 바로 모든 가치들 위에 군림하는 ‘경제적 가치’라는 것이다. “경제적 가치는 사회적 성격을 갖는 힘이다. 특히 경제적 가치의 경우에는 사물에 대한 구매력이라는 형태를 취하는 타자에 대한 권력이고, 그 원천은 유동성에 대한 개인들의 욕망을 보편적으로 포획하는 데 있다”(같은 글, 219).
사회적 고통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를 해명하는 데 ‘가치’(價値, value)가 왜 그토록 중요한가? 교환원리를 지배하는 가치법칙의 ‘가치’라는 개념이 “엄청나게 다양한 실재 대상들을 동일한 용어나 관념 밑에 포섭하려는 강력한 동일성의 형식”(제임슨, 2000: 81)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결코 ‘화폐적 (교환)가치’와 동일시될 수 없는, 따라서 화폐와 교환될 수 없는 많은 것들의 고유한 ‘가치’를 가치법칙에서의 가치는 파괴해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가치가 윤리학적 개념인 동시에 경제학적인 개념이라는 모순적인 현실, 즉 질(質)의 문제를 다루는 윤리학적 가치 개념이 양(量)의 문제를 상대하는 경제학적 가치 개념에 포획되어 있는 그야말로 가치전도(價値顚倒)의 현실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관리주의 사회란 경제적 가치, 정확히는 화폐적 교환가치에 의해 모든 사회적 삶의 가치들이 양적으로 측정되어 상품으로 교환되는 사회, 또한 그러한 과정이 물신화(物神化)됨으로써 보편적 타당성을 획득하는 병리학적 사회형태에 다름 아니다.
가치에 대한 논의는 자본주의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양식—즉, 그것을 떠받치는 사회적 규범—을 넘어(Knafo, 2007: 101), 고통이 제도적 틀 안에서 사회적으로 생산‧구성‧표현되는 양식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회적 고통의 주체들이 말하지 못하고 있지만, 불의의 지각양식을 통해, 고통의 경험에 수반되는 도덕적 감정들, 수치심, 모멸감, 한(恨), 분노 등을 통해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는 사회형태의 숨겨진 핵심 원칙을 ‘가치’의 지점에서 비판적으로 분석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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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흥미롭게도 마크스주의자인 발리바르 역시 자신의 스승 알튀세르가 기각시켰던 소외 개념을 복권시키면서, 적대의 제거불가능한 근본적 차원에 대해 말할 때 호네트와 비슷한 생각을 드러내고 있다. “무엇보다도 적대는, 착취가 개인들과 집단들에게 견딜 수 없는 어떤 것이라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비록 자본주의가 노동력에 ‘실재적 포섭’의 형식을 부과―즉 노동력의 상품으로의 변형―하는데 실제로 성공한다 해도, 이 과정에는 언제나 현실적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최종적인 분석에서, 인간노동의 형태(개인적‧집단적인 형태 모두에서)는 상품의 조건으로는 환원불가능한(irreducible) 것으로 남아있는데, 정확히 바로 그것이 우리가 ‘견딜 수 없는 것’(the unbearable)이라는 이름으로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다”(Balibar, 1996: 117).
2) 이 절의 내용은 졸고, 「왜 고통이 중요하며, 왜 고통이 문제인가?」(『민중신학, 고통의 시대를 읽다』, 분도출판사, 2018, 215-240쪽)의 일부분(특히 227-231쪽)을 이 글의 맥락에 맞게 고쳐 쓴 것임을 밝혀둔다.
3) 어떻게 그런 상황이 발생했는가? 아도르노에게, 총체적 현혹연관은 현대사회가 교환의 합리성이라는 동일한 기준에 따라 빈틈없이 관리되는 기능적 연관관계의 통일적인 체계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현대사회를 기능적 연관관계로 만드는 핵심적 메커니즘은 바로 자본주의적 교환원리(Tauschprinzip) 또는 교환관계(Tauschverhältnis)이다. 쉽게 말해서, 교환원리/교환관계는 각기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동일하지 않은 모든 것을 교환이 가능한 대체물로 만들면서 종국적으로는 동일한 것으로 관리하는 메커니즘이라 할 수 있다(아도르노, 1999: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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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고통은 무엇을 표현하는가?
금융화 시대 민중신학을 위한 서설
정용택(제3시대 연구실장)
들어가며
“민중신학의 현재적 쟁점들”이라는 제목으로 발행될 <웹진 3era> 이번 여름호에서 편집장님이 내게 요청한 주제는 “민중신학의 세대론적 재전개”였다. 사실 그 주제에 관해선 이미 웹진 3era에서 두 차례에 걸쳐 시론적으로 다룬 바 있고, 보다 상세한 논점을 다른 지면에서 제기한 바 있다. 필자가 보기에 민중신학을 세대론적으로 재(再)전개하는 작업의 일차적인 관건은 결국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2020년대의 한국 자본주의 사회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필자는 이를 자본주의 시대구분 및 시대진단의 과제로 정식화하였는데, 금융화(financialization)라 불리는 현상이 중요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오늘날 학계에서 금융화는 기본적으로 경제 전체에서 ‘새로운 금융기구와 새로운 금융시장의 발생’과 더불어 실물경제 또는 산업부문에 비하여 금융부문이 갖는 의미와 역할이 상대적으로 훨씬 더 커지게 된 현상을 가리킨다(하비, 1994: 243).
하지만 한국 사회를 포함하여 1980년대 이래로 동시대 세계에 금융화가 초래한 거대한 변화는 단순히 경제 영역에만 한정되지 않으며, 정치적·사회적·문화적 영역을 넘어 종교와 신앙의 영역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결정적으로 민중신학의 각 세대들이 언제나 당대 한국사회의 위기구조를 그 시대 특유의 ‘고통 구조의 확대재생산 체제’이자 ‘고통의 불균등한 배분 체제’로 인식하려 했던 한에서(김진호, 2001: 272), 1997년 이래로 한국 자본주의의 금융화 현상은 사회적 고통에 관한 민중신학적 연구에서도 핵심적인 의미를 갖는 위기구조라 할 수 있다. 금융화 시대 한국사회의 위기구조에서 비롯되는 사회적 고통의 구체적인 양상들에 관해선 다음 호 연재에서 본격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선 일단 왜 오늘날 사회적 고통이 금융화와 만날 수밖에 없는지를 ‘가치’(value) 범주의 도입을 통해 짚어보고자 한다.
사회적 고통에서 금융화로 가기 위해 무엇보다도 가치라 불리는 경제학적·윤리학적 범주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는 금융화가 자본주의 그 자체가 갖는 논리에 따라 전개되는 과정, 즉 “사용가치의 실질적 창출 및 유통으로부터 가치를 모순적으로 분리시킴으로써 가치증식하려는 자본의 경향”, 곧 자본의 자립화 운동의 극단적 양상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본의 자립화(autonomization)의 금융적 차원으로서 금융화란 “증권, 채권, 주식, 파생상품, 금융자산 일반의 거래”가 비금융기업의 생산과정, 생산현장의 노동과정, 정부부문, 가계 및 개인행위자들의 행위원리, 그리고 행위의 지향점에까지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역사적인 현상을 넘어 “그 자체의 물질적 토대로부터 스스로를 ‘자립화’하는 자본의 본유적인 경향”을 암시한다(Teixeira & Rotta, 2012; Rotta & Teixeira, 2018). 이처럼 사회적 고통으로부터 먼저 가치의 범주가 갖는 의미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선 금융화된 자본주의 시대 한국사회의 위기구조에서 비롯되는 사회적 고통에 관한 체계적 접근이 어려우며, 그러한 접근이 이론적 타당성을 얻지 못하면 민중신학의 세대론적 재(再)전개 프로젝트 역시 실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오늘은 먼저 고통과 가치의 관계를 살펴보는 데 집중하고자 한다.
표현된 것과 말해진 것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세계의 비참』(The Weight of the World: Social Suffering in Contemporary Society)의 말미에 일종의 방법론적 부록으로 덧붙인 「추신」에서 그의 연구팀이 인터뷰했던 고통의 주체들에 관해 매우 의미심장한 발언을 한 바 있다.
일단 자신의 인터뷰이들이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표현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부르디외가 추정하는 대목을 주목해보자. 그러니까, 부르디외는 지금 ‘표현된 것’(what is expressed)과 ‘말해진 것’(what is said)을 구별하고 있는 셈이다(Lovell, 2007: 73). 말해진 것과 표현된 것은 어떻게 다른가? 둘을 구별하는 기준은 ‘언어’이다. 개인이 행위주체로 인정받을 수 있게 해주는 공적 언어, 즉 공적 영역에서 “말할 수 있는 능력”과 연관된 ‘담론 자원’(discursive resources)의 유무에서 ‘말해진 것’과 ‘표현된 것’이 갈라진다. 공적 영역에서의 의사소통이 언어라는 매체를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담론 자원’은 공적 영역에 대한 실질적인 접근을 좌우하는 근본적 요소이다(齋藤純一, 2009: 33). 그런 의미에서, 노동자 구역의 주민들, 프랑스 북부의 두 청년, 미국 흑인 게토 안에서의 허슬러, 할렘가의 푸에르토리코인 마약 딜러, 임시직 노동자, 중앙우체국의 여직원, 공장의 여직공, 실업 여성, 걸인 부부, 베아른 지방의 두 농부, 아랍인 청년, 파리 교외의 여고생들, 나이트클럽 문지기, 이민 노동자, 입원한 여환자 등에 이르는, 부르디외와 그의 동료들이 인터뷰했던 사회적 고통의 다양한 주체들이 말하는 것과 다른 것을 표현하고 있다는 부르디외의 진술은 그들이 공적 언어로 자신들의 고통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이 책에 참여한 연구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부르디외의 가장 저명한 제자이기도 한 사회학자 바캉(Loïc Wacquant)은 부르디외가 1990년대 들어서 ‘사회적 고통’의 경험에 관한 연구에 착수한 것은 사회학의 윤리적 개념화, 혹은 사회학의 소크라테스적 기능에 대한 그의 고민에서 비롯되었다고 진단한다. 말 그대로 사회학자를 구조의 피해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말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산파이자 정신분석가처럼 자리매김했다는 것이다. 그는 부르디외의 시도가 사회학자를 자기 시대의 병을 따져 묻고 새로운 인식을 촉발시키는 소크라테스적 의미에서 일종의 산파였다고 평가한다. 부르디외는 이에 답하면서 자신이 가졌던 연구의 목표를 다음과 같이 들려준다.
민중신학자들이 자신들의 역할을 민중의 고통에 대한 증언자의 역할이라 보았던 것과 유사하게, 부르디외가 고통 연구의 정치적인 기능이 ‘대변인’의 기능이라 보았던 것이 정확히 그런 의미에서다. 그에게 있어서 사회적 고통이라는 문제계는 일반적으로 제도 정치의 심의와 사회운동의 이슈에서 고려되지 않는 다양한 사회 문제들을 식별하기 위해 도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자본과 노동의 전지구적 이동, 복지국가의 해체를 배경으로 한 유연화된 신자유주의적 노동 조건하에서 노동자들의 불안의 심화와 더불어 선진자본주의 사회에서 우울증과 정신적 혼란의 급증은 그동안 정치의 공론장이나 사회정책 부문에서 잘 조명되지 않던 새로운 사회 문제들로 부상했다. 부르디외가 학문적으로 개입하고자 했던 지점이 바로 이렇게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고통들이 정치적 영역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로서 제대로 인지되고 못하고 있는 현실이었다. 그에게 사회적 고통은 그 자체로는 사회 문제이지만, 그 원인과 효과에 측면에서 보자면, 인지적인 문제인 동시에 정치적 문제였던 것이다. 부르디외는 왜 “사회적 고통, 비참, 불편, 또는 원한”에 대한 탐색적인 연구에 착수했던 것인지도 결국 거기서 그 답이 드러난다.
그래서 『세계의 비참』의 「추신」 첫머리에서부터 부르디외는 정치가들을 신랄하게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계는 지금 정치가들만의 세계와 내부의 경쟁자, 내부의 문제들, 자신들의 목적 등에만 눈을 돌리고 있으며, 외부로 향한 문을 서서히 닫아 가고 있는 중”이며, 기자들은 “내부 혹은 외부 권력의 압력이나 검열, 특히 경쟁심, 그리고 경쟁심으로 인한 시간 다툼 등을 구속을 받고 있는” 한에서 그들 역시 정치계와 마찬가지로 대중들의 사회적 고통에는 무관심하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이제 남은 것은 지식인들인데,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들을 수 없는 것”을 보고 들어야 할 그들조차도 “이민자 문제에 대해, 주거 정책에 대해, 노사 관계에 대해, 관료주의에 대해, 그리고 정치계에 대해” 떠들기만 할 뿐, 즉 “겉으로 드러난 환자의 증상과 호소만 무조건 접수”하고 있을 뿐, “사회적 위기의 진짜 원인들을 알고, 이해하기 원하는 사회과학”처럼 “사물이나 현상의 본질을 꿰뚫”어 보진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부르디외는 “경제적 구조와 사회적 구조들 속에 ‘내재된 폭력’과 비참한 삶으로부터,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나타나는 작은 폭력들과 모든 사소한 불행들로부터 비롯된 사회적 고통에 관해 가장 원초적 표현들을 사용해 가며 그것을 과장하기에만 급급한” 의견학자들의 수준을 넘어, “많은 사람들의 자유와 정당한 행복 추구, 자아 성취 등을 해치는 진짜 사회적·경제적 요인들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록 “삶을 고통스럽고 심지어 살 수 없을 정도로까지 만드는 구조들을 제대로 인식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그 구조들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모순들을 밝혀낸다고 해서, 그것이 곧 그 모순들을 해결하는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고통의 사회학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고통의 책임을 자기 자신이 아니라 사회적 원인에서 찾을 수 있게 함으로써 그들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게 해주고, 또한 내밀하고 비밀스러운 형태를 포함하여 온갖 다양한 모습으로 출현하는 불행들의 출처, 즉 집단적으로 은폐되어 온 사회적 출처를 널리 드러내” 줄 수는 있다고 주장한다. 부르디외의 ‘고통의 사회학’은 바로 이러한 그의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요컨대, 부르디외의 사회적 고통 연구는 인간이 겪고 있는 사회적으로 비참한 삶에 에 대한 관심과 주의를 끌어냈다. 기존의 사회 비판적 연구의 주류가 사회 안에서 물질적 재화의 불평등한 재분배에 관심을 가져왔다면, 부르디외는 빈곤, 계급 또는 인종에 따른 행위주체들 고통의 감정들―굴욕, 분노, 실망, 원한 등―을 포함하여, 지배와 억압의 살아있는 구체적 경험들에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다. 즉, 성찰적이기보다는 차라리 비(非)성찰적인 또는 전(前)반성적인 현상으로서 일상에서 ‘당연시되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에 관심을 기울인 것이다. 더 이상 고통이 사유 불가능하고 표현 불가능한 개인적 차원의 내밀한 문제가 아니라, 사회학적으로 분석되고 재현되고 논의될 수 있는, 아니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사회학의 핵심적 테마로 그 중요성을 끌어올린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형태의 핵심적 제도
그러나 아직도 모르겠는 것이 있다
과실이나 결과를 탐하지 않고
불의와 폭력에 맞서다 이름 없이 스러지는
더 수많은 이들의 선한 의지는
도대체 어디서 발원하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송경동 시(詩), 「토대」 중에서
그렇다면, 왜 그들은 고통을 말할 수 없는가? 부르디외는 그 이유를 이미 먼저 언급했다. “그들이 자신의 불만이나 불편함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를”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공적 언어로 자신들의 고통을 소통 가능하게 말할 수 있는 능력, 즉 담론 자원이 부재한다. 하지만, 그들이 고통을 공적 언어로 말할 수 없다고 해서 그들과의 대화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공적 영역에서 소통 가능한 분절된 언어로 자신들의 고통을 전달하진 못해도, 혹은 사회적 고통의 원인을 진단할 수 있는 공적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지 못하더라도, 그들은 자신들의 고통의 실재성을 다른 방식으로 충분히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르디외의 이러한 생각은 악셀 호네트의 인정이론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패러다임의 언어이론적 버전과는 다른 대안적 버전”에 해당하는) “사회적 불의의식의 가능한 표현형식”(호네트, 2009: 150)에 관한 착상과도 긴밀히 조응한다. 부르디외와 호네트는 어떤 근거에서 표현된 것의 핵심이 말해진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추정하는가? 부르디외에게 그 답이 하비투스(habitus) 개념에 놓여 있다면, 호네트에게는 배링턴 무어로부터 빌려온 ‘불의의식(不義意識)’(Unrechtsbewußtsein) 또는 ‘불의의 지각양식’이라는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호네트가 부르디외를 인용한 위의 단락에서 “정형화되지 못한 것, 그리고 정형화될 수 없는 불만들”이라는 진술은 앞서의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표현하고” 있다는 “불만이나 불편함”에 관한 언급과 연결되며, 호네트 자신의 용어로는 ‘불의의 지각양식들’에 관한 설명과 연관된다. 호네트에 따르면, “사회 하층민들의 규범적 요구들은 적극적으로 제기된 정의관념에서 보다는 전형적 불의의 지각양식들에서 간접적으로 더 잘 드러난다”(호네트, 2009: 155). 주변화된 집단들의 ‘불의의 지각양식’에 대한 호네트의 강조는 그러한 집단들의 개별 구성원들의 도덕적 경험이 좀처럼 실체적으로 공식화되진 않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정의에 대한 명확한 직관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는 확신에 근거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규범적 기대가 배반당했을 때, 즉 자신들이 정당하게 받을만하다고 여기는 인정을 거부당했을 때, 언제든지 그와 같은 도덕적 불의의 경험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호네트에게 “그와 같은 정의감의 규범적 핵심은 모든 연구에서 자신들이 지닌 존엄성, 영예 또는 불가침성에 대한 존중의 요구와 연관된 기대다”(호네트, 2009: 123). 호네트는 그런 상황 속에서 인간주체들이 전형적으로 겪는 도덕적 불의의 경험을 사회적 무시의 감정이라 규정한다. 필자는 그것을 ‘사회적 고통’에 대한 개념 규정에서 그대로 적용한 바 있다. 그렇기에 호네트는 프레이저와의 논쟁에서 부르디외를 인용하면서, 사회적 불의에 대한 참조점은 프레이저가 의지하는 “사회운동과 정치적 행위자들이 암묵적으로 가정하는 대중적 패러다임”(프레이저, 2014: 30)이 아니라, 불의로서 주체들에게 경험된 것으로서, 정치적 언어로 명료하게 분절되지 않는 어떤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할 수 있었다. 호네트는, 비판이론의 준거점으로 작용하는 사회적 불의에 대한 참조점이 “사회적 요구에 대해 구조적으로 저항하는 인간의 심리”라는 전(前)학문적이고 전(前)정치적인 도덕성의 심층 수준에 놓여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호네트, 2014: 364; 호네트, 2009: 110).1)
그렇다면 비록 고통의 주체들이 정형화된 방식으로 말하고 있진 못하지만 불의의 지각양식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는 그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위에서 인용했던 문장에서, 부르디외는 그에 관한 한 가지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한글판보다는 영역판에서 더욱 명시적으로 드러나는데, 부르디외에 따르면 “그들의 불만이나 그들의 불안의 핵심 원칙들(core principles)”을 고통의 주체들은 공적 언어로 말하고 있진 않지만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한글판과 영문판의 서술을 종합하면, 비록 사회적 고통의 주체들은 “자신의 불만이나 불편함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즉 “그들의 불만이나 그들의 불안의 핵심 원칙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할 수는 없지만 표현할 수는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이 말할 수 없지만 표현하고 있는, 불만이나 불편함이 비롯되는 핵심 원칙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이야기인데, 도대체 그것이 무엇일까? 부르디외보다는 좀 더 구체적이긴 하지만, 호네트는 여전히 모호한 용어로 그것을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형태의 핵심적 제도(the core institutions of the capitalist form of society)! 호네트와 마르크스를 (재)접합시키고자 하는 많은 연구자들이 주목해온 이 표현은 적어도 호네트 자신에게선 그다지 심도 있게 성찰되고 있진 않다(Deranty, 2010; Renault, 2011; Schmidt am Busch, 2008; Schmidt am Busch, 2010; Schmidt am Busch, 2015). 호네트에게 그것은 단지 그가 계속 말해온 사회적 인정관계의 구조를 가리킬 뿐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호네트는 헤겔 법철학의 가족, 시민사회, 국가에 대한 설명 틀을 전유하여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형성 과정에서 인정관계의 구조가 사랑, 권리, 연대라는 세 가지의 인정 유형에 상응하는 세 가지의 인정질서(가족으로 대표되는 친밀성의 영역, 권리를 보장하는 시민사회의 영역, 연대성을 제도화한 국가의 영역)의 제도적 분화로 발전해왔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행위주체들이 사회적 고통에 저항할 수 있는 근거로 작용하는 근본적인 인정 기대, 또는 도덕적 불의의식은 호네트가 ‘자본주의 사회형태의 핵심적 제도’라 명명한 것의 심층적인 제도적 수준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하지만, 가족‧시민사회‧국가와 같은 인정질서의 영역이 곧바로 사회적 고통을 발생시키는 자본주의 사회형태의 핵심적 제도라고 보긴 어렵다. 그 세 가지 영역이 그 자체로 자본주의 사회형태는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전(前)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이미 존재했던 그러한 영역들을 자본주의적 사회형태로 변형시키는 핵심적 제도는 따로 있기 때문이다.
보편적으로 잘못된 가치전도의 세계2)
사회적 고통이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가에 대한 우리의 질문은 이제 호네트와 부르디외가 명확히 제시하지 못한 지점, 즉 불의의 지각양식을 통해서 표현되고 있는 고통 발생의 ‘핵심 원칙’, 또는 ‘자본주의 사회형태의 핵심적 제도’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구체화된다. 물론 그 답은 여전히 고통에 있다. 부르디외와 호네트가 공통적으로 지적하듯이, 제도적 틀에서 생산되는 고통들 가운데는 개인들이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명료한 공적 언어로 분절해내지 못하면서도, 그 상황을 불의한 것으로 명확히 인지하고 있는 그러한 유형의 도덕적 경험이 존재한다. 이러한 경우에, 불의를 생산하는 것은 바로 현 상황에서 특정한 규범적 원칙들에 의해 틀지어져 있는 사회질서 그 자체이다. 따라서 제도적 틀을 규정하고 있는 규범이나 규칙들이 근본적인 인정 기대와 모순을 이루고 있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그러한 불의는 기존의 제도적 규칙 및 규범을 통해선 불의한 것으로 서술될 수 없기 때문에 문제적이다. 이는 불의를 규정하는 보편성의 최종심급이 되어야 할 법이나 국가, 혹은 시민사회 전체가 이미 규범적으로 그릇된 상태에 빠져 있는 상황을 암시한다. 아도르노식(式)으로 말하자면, ‘총체적 현혹연관’(total delusion)에 빠져 있기에 규범적 이상과 현실 간의 괴리에 근거한 내재적 비판조차 불가능해지는 상황인 것이다.3)
프랑스 철학자 리오타르는 이러한 상황을 ‘잘못’(wrong; [佛]tort)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는데, 놀랍게도 이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사회적 고통을 설명하기 위해 민중신학에서 제시된 ‘한(恨)’, 즉 언표화 불가능한 고통의 개념과 유사한 사회적 맥락을 반영하고 있다(서남동, 1983: 44, 109; 안병무, 1988: 290; 김진호, 2006: 238; 김진호, 2013: 364).
리오타르에게 ‘잘못’이란 합리적으로 혹은 법리적으로 시비를 가릴 수 있는 소송의 영역을 초과하는, 즉 법정에서 그 진실을 증언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어떤 절대적인 ‘불의’나 ‘피해’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잘못’은 사회 전체가 이미 잘못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공정한 게임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를 가리킨다. 그래서 리오타르가 이러한 ‘잘못’이 “감정의 침묵, 고통에 의해 표현된다”고 말할 때, 그는 부르디외와 호네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고 총체적인 수준에서 “증명의 불가능성에 의해 표시”되는 고통의 상황을 사유하고 있음이 드러난다(리오타르, 2015: 31). 적어도 이러한 ‘잘못’의 상태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것이 결국 표현하고 있는 ‘핵심 원칙’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데 있어선 호네트나 부르디외보다 그는 훨씬 더 멀리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마르크스의 초기 텍스트 가운데 하나인 「헤겔 법철학 비판을 위하여」(1844)에서 ‘잘못’이라는 개념의 중요한 역사적 용례를 발견한다.
리오타르는 ‘잘못’이라 불리는 극단적인 사회적 고통의 상황을 환기시킴으로써, 우리를 마르크스의 세계, 곧 ‘보편적 잘못’의 세계로 다시 돌려보낸다. 바로 ‘자본’의 세계이다. 자본의 세계는 자본의 목적성인 ‘교환원리’가 지배하는 세계를 말한다. 자본의 교환원리는 철학적으로 동일성의 원칙을 전제로 한다. 바꿔 말하면, 모든 교환관계는 곧 동일성 원칙을 구현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교환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우선 교환에 참여하고 있는 서로 다른 사물들이 어떻게든 동질적이거나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자본주의적 교환관계에 동일성 원칙이 적용됨으로써, 동일하지 않은 모든 것들이 동일한 것으로, 즉 교환이 가능한 ‘상품’으로 변화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러한 동일시는 다양한 실재의 대상을 가리키는 ‘사용가치’를 억압하고, 교환가치라는 하나의 동일한 개념 아래로 포섭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 사회형태가 확립하고 있는 이 동일성의 원칙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가치법칙’이라 부른다.
문제는 바로 그러한 가치법칙이 시장과 조직이라는 자본주의의 두 가지 주요한 제도들을 공동-결정하고 상호-매개하는 근본적인 규범이자 규칙이며, “사회적 삶 전체의 토대에 존재하는 공통된 가치”(오를레앙, 2016: 368), 즉 경제적 가치로 표현된 모든 자본주의 사회형태들(가치, 상품, 화폐, 자본, 추상노동, 임금노동, 잉여가치, 신용, 자본-이윤(이자), 토지-지대, 노동-임금, 그외 자본의 다양한 그림자 형태들)을 구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제도 그 자체라는 점이다. “가치는 공통의 삶을 허용하는 집단적 산물이다. 가치는 제도적 성격을 갖는다”(같은 글, 369). 사회적 고통을 생산‧구성‧표현하고 있는 제도적 틀 안에, “즉, 명성과 사회적 인정의 규범 이면에는 이해관계와 타자의 욕망을 포획함으로써 이해관계를 표출해 줄 수 있는 힘이 존재”(같은 글, 168)하는데, 그것이 바로 모든 가치들 위에 군림하는 ‘경제적 가치’라는 것이다. “경제적 가치는 사회적 성격을 갖는 힘이다. 특히 경제적 가치의 경우에는 사물에 대한 구매력이라는 형태를 취하는 타자에 대한 권력이고, 그 원천은 유동성에 대한 개인들의 욕망을 보편적으로 포획하는 데 있다”(같은 글, 219).
사회적 고통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를 해명하는 데 ‘가치’(價値, value)가 왜 그토록 중요한가? 교환원리를 지배하는 가치법칙의 ‘가치’라는 개념이 “엄청나게 다양한 실재 대상들을 동일한 용어나 관념 밑에 포섭하려는 강력한 동일성의 형식”(제임슨, 2000: 81)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결코 ‘화폐적 (교환)가치’와 동일시될 수 없는, 따라서 화폐와 교환될 수 없는 많은 것들의 고유한 ‘가치’를 가치법칙에서의 가치는 파괴해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가치가 윤리학적 개념인 동시에 경제학적인 개념이라는 모순적인 현실, 즉 질(質)의 문제를 다루는 윤리학적 가치 개념이 양(量)의 문제를 상대하는 경제학적 가치 개념에 포획되어 있는 그야말로 가치전도(價値顚倒)의 현실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관리주의 사회란 경제적 가치, 정확히는 화폐적 교환가치에 의해 모든 사회적 삶의 가치들이 양적으로 측정되어 상품으로 교환되는 사회, 또한 그러한 과정이 물신화(物神化)됨으로써 보편적 타당성을 획득하는 병리학적 사회형태에 다름 아니다.
가치에 대한 논의는 자본주의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양식—즉, 그것을 떠받치는 사회적 규범—을 넘어(Knafo, 2007: 101), 고통이 제도적 틀 안에서 사회적으로 생산‧구성‧표현되는 양식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회적 고통의 주체들이 말하지 못하고 있지만, 불의의 지각양식을 통해, 고통의 경험에 수반되는 도덕적 감정들, 수치심, 모멸감, 한(恨), 분노 등을 통해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는 사회형태의 숨겨진 핵심 원칙을 ‘가치’의 지점에서 비판적으로 분석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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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흥미롭게도 마크스주의자인 발리바르 역시 자신의 스승 알튀세르가 기각시켰던 소외 개념을 복권시키면서, 적대의 제거불가능한 근본적 차원에 대해 말할 때 호네트와 비슷한 생각을 드러내고 있다. “무엇보다도 적대는, 착취가 개인들과 집단들에게 견딜 수 없는 어떤 것이라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비록 자본주의가 노동력에 ‘실재적 포섭’의 형식을 부과―즉 노동력의 상품으로의 변형―하는데 실제로 성공한다 해도, 이 과정에는 언제나 현실적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최종적인 분석에서, 인간노동의 형태(개인적‧집단적인 형태 모두에서)는 상품의 조건으로는 환원불가능한(irreducible) 것으로 남아있는데, 정확히 바로 그것이 우리가 ‘견딜 수 없는 것’(the unbearable)이라는 이름으로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다”(Balibar, 1996: 117).
2) 이 절의 내용은 졸고, 「왜 고통이 중요하며, 왜 고통이 문제인가?」(『민중신학, 고통의 시대를 읽다』, 분도출판사, 2018, 215-240쪽)의 일부분(특히 227-231쪽)을 이 글의 맥락에 맞게 고쳐 쓴 것임을 밝혀둔다.
3) 어떻게 그런 상황이 발생했는가? 아도르노에게, 총체적 현혹연관은 현대사회가 교환의 합리성이라는 동일한 기준에 따라 빈틈없이 관리되는 기능적 연관관계의 통일적인 체계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현대사회를 기능적 연관관계로 만드는 핵심적 메커니즘은 바로 자본주의적 교환원리(Tauschprinzip) 또는 교환관계(Tauschverhältnis)이다. 쉽게 말해서, 교환원리/교환관계는 각기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동일하지 않은 모든 것을 교환이 가능한 대체물로 만들면서 종국적으로는 동일한 것으로 관리하는 메커니즘이라 할 수 있다(아도르노, 1999: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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