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여름, 기획 기사] 기독교운동의 균열에서 읽어내는 한국 사회운동의 균열(황용연)

2022-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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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운동의 균열에서 읽어내는 한국 사회운동의 균열


황용연(제3시대 연구기획위원장, 무지개센터 대표)

 

1.


20대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서 [뉴스앤조이]에는 ‘민주당 기독교지부라는 오명’을 지적하는 글이 실렸고 [에큐메니안]에는 ‘기독교운동 선배들 지금 다 어디 있냐’고 묻는 글이 실렸습니다. 두 글 모두 기독교운동의 주류가 민주당 후보 지지에 올인하면서 국민의 힘 후보를 주술, 신천지 등의 단어로 악마화하는 데 정신 팔려있는 거 아니냐는 글이었죠. 두 글 모두 공개적 지평에서의 반론은 없었지만, 전자 같은 경우는 SNS에서는 상당히 논란이 되었습니다.

 

통칭 에큐메니칼 운동과 사회참여 복음주의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양쪽 모두에서 무언가 균열의 징조가 보였던 셈인데요. 이 균열에서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까에 주목해 본 것이 제247차 월례포럼의 발제문이었습니다. 발제문에서는 먼저 현재 상황에 이르기까지의 에큐메니칼 운동과 사회참여 복음주의 운동의 전사를 간단하게 짚어 보고 현재 상황에서 나타나는 균열의 양상을 짚어 보았습니다.

 


2.


에큐메니칼 운동의 뿌리는 대략 세 가지 정도로 추적 가능합니다.


(1) 일제 시기~해방 후의 그리스도교적 민족주의 시도: 김재준, 문익환, 강원용, 함석헌 등

(2) 학원 기독학생회 운동(KSCF)의 진보적 전환: WCC의 비판적 근대화 대응 담론의 영향으로 사회참여적 성격 강화

(3) 산업전도 운동의 산업선교 운동으로의 전환: 노동자 전도로 시작했던 운동이 노동자들의 현실과 부딪치면서 성격 전환

 

에큐메니칼 운동은 지금도 전통적인 신앙에 뭔가 어긋나는 거 아니냐는 의구심을 받는 경우가 있지만, 앞에서 언급한 세 운동의 공통점은 적어도 그 출발점에는 전통적인 신앙에 헌신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헌신의 대상이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넓어진 거죠. 분단과 개발독재로 인해 근대화의 비전이 산업화와 민주화로 분열하고 대안 근대화에 대한 상상이 민중이란 용어로 응결될 때, 한국의 기독교 에큐메니칼 운동은 그 응결에 꽤 많이 관여하였고 민중은 신앙의 지평 안팎을 넘나드는 헌신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민중신학이라는 새로운 사유도 탄생하였고 이 새로운 사유에는 전통적 신앙에 대한 몰입과 헌신에 거리를 두게 하는 요소들도 꽤 많이 포함되었지요. 한편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에큐메니칼 운동 내에는 NCCK 등으로 대표되는 공식 기구 운동과 지금은 기독교사회선교연대회의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조직연합운동의 양대 운동이 정립됩니다.

 

한편 이른바 보수주의적 기독교는 대체로 개발독재 정권과 유착해 왔지만 그 안에서 1980년대 후반 주류 보수주의 진영에서 조심스럽게 탈피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보기에 에큐메니칼 운동은 신앙의 지평 안팎을 너무 자유롭게 넘나든다 싶었던 거죠. 그래서 이 사회참여 복음주의 흐름에는 대체로 신앙적인 몰입/헌신 효과를 주로 하여 사회참여 이슈를 그러한 몰입/헌신 효과의 연장선상에서 소화하려 하는 경향이 깊게 깔려 있습니다.

 


3.


1987년 이후의 민주화와 소비자본주의의 발달은 한국 근대화에 대한 시민의 만족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작용하고, 이에 따라 민중이라는 용어로 집약되었던 대항 근대화의 설득력이 약화됩니다. 그러면서 민중의 자리를 시민이 대체하게 되죠. 이는 사회비판적 사유의 분화와 주류 교체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되면서 민중 용어를 사용하던 사회운동 전반이 쇠퇴합니다. 그리고 민중이 시민으로 대체되면서 체제 변혁의 언어보다 "상식에 기반한 운동"을 내세우는 언어가 발전하고, 이 언어가 리버럴 진영과 보수 진영 간의 경계짓기를 정당화하는 새로운 언어가 됩니다. 그러면서 경계짓기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사회운동과 사회비판적 사유의 이러한 변화에 일정 부분 힘입어 김대중/노무현의 리버럴 정부가 출범했는데요. 이들 정부하에서 리버럴 진영과 진보 진영의 구분이 본격적으로 가시화됩니다. 리버럴 진영은 기존에 존재하던 리버럴 정당+반독재운동에서 반보수운동으로 전환한 일부 세력+일부 시민운동 세력+“상식에 기반한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 등으로 구성되는데요. 이 진영의 내부에는 그 이전의 반독재/반보수 운동의 정서와 새롭게 형성된 “리버럴=진보”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는 정서가 겹쳐 있었습니다. 반면 이 시기부터 리버럴 진영과 긴장관계를 뚜렷이 드러내기 시작한 진보 진영은 민중 용어를 보전하고 있던 노동운동과 여타 사회운동을 중심으로 “리버럴=진보”에 대한 믿음의 그늘에 노동자와 일하는 사람들의 희생이 존재함을 폭로한다는 입장에 주로 섰습니다.

 

이런 상황을 맞은 에큐메니칼 운동에서는 기독교 사회운동의 정체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종종 나왔고 아직도 명확한 답이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일부는 민중의 시민으로의 전환에 호응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일부는 리버럴 정권에 참여하기도 했고요. 일부는 여전히 민중에 천착했지만 활동가 개개인의 선택인 측면이 강합니다. 이 시기부터 기독교 사회운동에 영성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 것도(영성 고유의 가치와는 별도로) 정체성에 대한 질문의 답을 얻기 힘든 상황과 관련이 있다고 보이지요. 기구 운동의 차원에서는 공식 기구 운동은 해외원조에 더 이상 의지할 수 없게 되면서 보수적 기구와의 협력/긴장관계에 신경을 써야 하게 되었고 연합기구 운동은 민중 용어의 쇠퇴 과정을 같이 겪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사회운동의 이러한 정체는 민중신학에도 영향을 미쳐 이후 지금까지 민중신학은 민중신학자를 자임하는 사람들의 각개약진의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지요.

 

한편 신앙운동의 저류를 유지하고 시민의 등장에 호응했던 사회참여 복음주의 운동은 교회개혁 이슈가 부각되면서 대중성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교회개혁 이슈에 대한 고민이 진전되면서 이 이슈가 보수적 신앙 전반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문제라는 공감대가 이루어졌고, 그에 따라 신앙적인 몰입/헌신 효과를 유지하면서 이루어지는 대안적 신앙의 요청이 생겼습니다. 그에 따라 ‘하나님 나라’ 개념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신앙적/신학적 시도의 범위가 좀 더 넓어지면서 사회참여 복음주의 운동에서는 아카데미 형태로 진행되는 강좌 사업이 발전하게 됩니다.

 


4.


위와 같은 일들을 겪은 후 다가온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시기에 한국의 정치사회적 상황은 크게 두 가지 양상을 보입니다. 시작 직후부터 광우병 쇠고기 문제로 인한 촛불시위가 벌어졌던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정치로 인해 리버럴 진영(과 하위파트너 구실을 할 때가 많았던 진보 진영까지)과 보수 진영의 갈등이 사회 전반적으로 상당히 심화되었고 중요 선거 때마다 양 진영의 총력전 양상이 심해졌습니다. 이러한 총력전 양상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면서 더욱 심화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 사건이 한국 사회에 대한 전방위적인 절망으로 의미화됨으로써 박근혜 정부의 신망이 결정적 타격을 받고 반보수정권적인 정치적 각성이 더욱 심화되었기 때문이지요. 그리하여 결국 최순실 사태와 2016년 촛불시위를 거쳐 첫 대통령 탄핵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리버럴 진영과 보수 진영의 총력전 양상이 한국사회의 전반적인 구도로 인식되는 가운데에서도 그 총력전 구도와 일정하게 분리된 이슈 중심적인 독자적 운동들이 존재했습니다. 장애인운동과 성소수자운동 등 각종 소수자운동들의 독자적 발전이 이어졌고 2015년 무렵 시작된 페미니즘 리부트 운동이 소수자운동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전개되기도 했습니다(물론 그 반대 경향도 있었지만...) 또한 자본의 흐름이 공간 재편에 집중되면서 본격화된 젠트리피케이션에 저항하는 운동이 각개 현장별로 일어났고, 노동운동에서도 민주노총 등의 내셔널 센터가 정체를 보인 가운데 사업장별/이슈별로 각개 투쟁이 진행되는 양상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이슈 중심적 독자적 운동들은 사회 전반적인 총력전 양상과는 약간 다른 지점에서 참여자들의 의식화 계기로 작용했고요.

 

앞에서 서술한 총력전 양상을 통한 사회의식의 정립 경로와 이슈 중심적 독자적 운동을 통한 사회의식의 정립 경로는 촛불시위와 박근혜 탄핵의 시점까지는 별 문제없이 공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촛불시위와 박근혜 탄핵은 한편으로는 리버럴 진영의 총력전의 승리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동안 한국 사회에 쌓여온 모든 모순들의 해결을 요구할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가 생기는 계기이기도 했죠. 문재인 정부 초반기 최고의 동력을 제공했던 (남)-북-미 평화 체제 구축 노력이 소강상태에 들어간 시점부터, 총력전을 통한 사회의식의 정립 경로와 독자적 운동을 통한 사회의식의 정립 경로 사이에 균열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전자의 경로에 많이 관여된 이들은 특히 ‘적폐와 그 반대편’이라는 갈등 구조를 깊이 내면화하여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립합니다. 반면 후자의 경로에 많이 관여된 이들 중 적어도 일부에게는 독자적 운동이 벌어지는 각각의 이슈/현장에서 노출되는 문제의 책임이 ‘적폐세력’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적폐의 반대편’도 주력이 되어 운영하고 있는 한국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있다는 느낌이 더욱 강해집니다.

 

이런 총력전 양상의 영향력에서 에큐메니칼 운동과 사회참여 복음주의 운동 역시 자유롭지 못했죠. 그러면서도 또한 양쪽 모두에서 이슈 중심적 독자적 운동에 관한 관심들도 일어났습니다. 에큐메니칼 운동에서는 기본적으로 청년 신학생들이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기독교적 현장 저항 운동을 일으키면서 이 운동을 비롯한 이슈 중심적 독자적 운동에 동조하는 분위기를 만들었고, 페미니즘 이슈의 경우 교회 내 성폭력 문제를 매개로 여성 활동가들의 적극적 활동이 있었습니다. 사회참여 복음주의 운동에서는 주로 아카데미 강좌 사업에서 페미니즘과 소수자운동에 관한 관심이 적극적으로 표출되는 양상을 보입니다. 그런데 전반적으로 보면 에큐메니칼 운동에서는 이슈 중심적 독자적 운동이 주로 ‘하는 사람이 하는’ 운동의 양상이었다면(예를 들어 에큐메니칼 운동의 대표적 교회로 꼽히는 한 교회에 찾아오는 청년교인은 주로 페미니즘/소수자운동의 당사자나 앨라이인데, 정작 교회 전체적으로는 그런 문제에 대해 굼뜬 모습을 보인다거나), 사회참여 복음주의 운동에서는 독자적 운동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주류까지는 아니어도 중요 행위자 중의 하나로 인식되었던 것 같아요.

 

이런 차이를 보이는 이유를 찾자면, 에큐메니칼 운동은 반독재에서 반보수로 전환한 경우나 개인적 판단에 의해 민중 용어를 고수하는 경우 등의 영향력이 꽤 존재하기 때문에, 그 영향력에 선뜻 들어맞지 않는 소수자운동 등의 독자적 운동에 다가가는데 어느 정도의 장애물이 생긴 것이 아닌가 합니다. 반면 일반 사회운동과 일정한 거리두기를 하고 있었던 사회참여 복음주의 진영에는 그 거리두기가 오히려 장애물을 제거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 것 아닐까 합니다.

 


5.


‘적폐와 그 반대편’이라는 구조 인식을 내면화한 사람들이 조국 사태를 계기로 이 사태를 적폐세력의 음모로 해석하여 강하게 결집하는 경향이 심화된 가운데, 에큐메니칼 운동과 사회참여 복음주의 운동 모두의 주된 입장은 이 경향에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편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슈 중심의 독자적 운동에 대한 관심을 표출해 온 사람들이 조국 사태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를 계속 냈습니다.


이런 현상이 계속 이어진 결과, 서두에 인용한 것과 같은 균열까지 나타났다고 할 수 있겠죠. 에큐메니칼 운동과 사회참여 복음주의 운동의 주류가 민주당 후보 지지에 올인하는 가운데 젠트리피케이션 저항 운동과 소수자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민주당 후보와 국민의 힘 후보를 모두 비토하는 흐름에 참여했습니다. 민중신학자로서 민중이라는 말을 두고 이 균열의 양상을 살펴 본다면, 민중 용어의 용례도 반독재운동에서의 상상된 주체로서의 민중을 반보수운동으로의 전환 이후에도 무의식적으로 그냥 사용하는 경우, 반보수운동만으로 민중의 의미를 한정하지는 않으려 하지만 실질적으로 반보수운동의 급진화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경우, 이슈 중심의 독자적 운동이 시민 위주의 체계에서 이탈할 때 그 이탈의 자리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일 수 있는(그러나 사실 별로 쓰이지는 않는) 경우로 균열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가지 특기할 점은 국민의 힘 후보에 대해 기독교권에서 주술/신천지 등을 언급하는 비판이 등장해서 에큐메니칼과 사회참여 복음주의 가릴 것 없이 여당 지지자들에게 상당히 널리 퍼졌고 심지어 선거 막판에는 일반인 대상으로까지 퍼졌다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 타종교에 관대한 것으로 인지되었던 에큐메니칼 운동 관련 인사들이 이러한 비판을 제안/호응하는 것이 아이러니하다는 비평과, 성서의 주술 금지 언급을 바로 끌어와서 정치적 비판에 사용하는 양태가 성서의 동성애에 대한 비판적 언급을 바로 끌어와서 차별금지법 반대에 사용하는 양태와 어떤 차이가 있느냐는 비판이 제기되었습니다. 이러한 비판도 역시 에큐메니칼과 사회참여 복음주의를 막론하고 반차별 운동과 페미니즘 등에 적극적인 사람들 중심으로 나왔죠. 성서를 매개로 진행된 언행에 대해서 사회참여 복음주의 인사들에게도 비판이 나왔다는 점은 사회참여 복음주의 운동 일부의 ‘복음주의’ 정체성(성서/신앙에 대한 몰입/헌신을 강조하는 정체성)에 일정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징후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다른 시각으로 보면 이슈 중심적 독자적 운동과의 만남의 경험으로 성서/신앙에 대한 몰입/헌신의 대상이 넓어진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요.

 


6.


그래서 지금까지 전개된 논의를 토대로 할 때, 신앙적/신학적 몰입/헌신의 효과가 사회적 상황과 맞물려 강화되면서 몰입/헌신의 대상이 확대되는 현상을 에큐메니칼 운동이 일찍이 겪었고, 그 현상에 의해 정립된 프레임이 오히려 에큐메니칼 운동에 오래 남아 새로운 확대에 일정한 장애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이와 달리 그 프레임과 거리두기를 하고 있었던 사회참여 복음주의 운동 일부에서 이슈 중심의 독자적 운동의 자극으로 인해 새롭게 몰입/헌신의 대상이 확대되는 현상이 생겼고, 그 자극이 동시에 에큐메니칼 운동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민중을 내세운 대항 근대화 운동이 한국 자본주의의 만족도 상승을 맞아 그 영향력이 쇠퇴한 것은 동시에 그 때까지 존재했던 사회비판적 경향으로의 총체적 의식화 경로의 쇠퇴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 이후 시민운동이나 “상식에 기반한 운동”, 총력전 구도 등이 어느 정도 의식화 경로의 역할을 하기도 했으나 이제 뚜렷이 한계가 드러났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 이번 대선에서 드러난 균열 현상이라 하겠지요.

 

이 글에서 에큐메니칼 운동과 사회참여 복음주의 운동이라는 두 범주를 중심으로 기독교운동에서 나타난 의식 변화를 추적한 이유는, 사회비판적 의식화를 촉진하기 위한 기독교운동을 포함한 사회운동의 적절한 행동이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었는데요. 일단 지금 시점에서는 이슈 중심의 독자적 운동이 갖는 의식화의 효과에서 출발하는 것이 충분조건은 아니더라도 필수조건은 맞아 보입니다.

 


7.


제247차 월례포럼에서 위와 같은 내용의 발제를 하고 난 후 토론이 있었는데요. 토론자분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셨던 것이 기독교운동 내에서는 조국 사태보다도 오히려 박원순 사태의 영향력이 더 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태 이후로 박원순에 대해 동정적인 사람들과 비판적인 사람들 사이에 말이 잘 통하지 않게 되었고 그 구분선이 세대론적으로, 즉 민주화 투쟁 경험이 있는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로 그어진다는 지적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토론자 중의 한 분은 자신이 현재 하고 있는 역할 중 하나는 윗세대의 영향이 (스스로 무엇이든 해 보고자 하는) 아랫세대에 미치지 않게 차단하는 역할이라는 말씀을 하시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해서는 모든 운동을 다 해야 한다는 백화점식 운동의 경향이 아직 남아 있고, 그것 때문에 힘에 부치기도 하지만 현장 중심의 마인드를 지속하고 있다는 점에는 긍지를 느낀다는 말씀이 있었고요. 사회참여 복음주의 운동에 대해서는 내부 논쟁이 없지는 않았으나 강정마을/세월호/개별적 노동투쟁 등에는 참여할 수 있다는 합의가 있었던 상태를 지속해 왔는데, 퀴어/젠더 문제가 역시 경계선이 되었고 조국/박원순/차별금지법 이슈 등에서 내부 갈등을 확인했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런 내부 갈등에서 빚어지는 고민들이 새로운 신앙 운동으로 어떻게 이어져야 할지의 문제가 존재한다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저는 흔히 세대론이라고 지칭되는 이야기들을 세대라고 말하기보다는 경향이라고 말하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하는 편인데요. 그런 입장에서 세대의 차이를 민주화 투쟁 경험이 있다/없다라는 경험의 차이로 읽어낸 의견에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민주화 투쟁 경험 대신 다른 어떤 경험이 현재 사회적 의식화를 어떻게 이끌고 있는가이겠죠. 일단 이슈 중심의 독자적 운동의 경험이라는 답이 하나 나왔다고 한다면, 그 외의 답은 어떠해야 하는 것인가라는 고민이 앞으로의 과제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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