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만원 세대’ N포남이 ‘이대남’ 현상을 이야기하려니 난감하지만

요한(제3시대 연구원)
1. ‘이대남’도 뉴스를 보고 자기가 ‘이대남’임을 알았을 가능성이 있다.
소위 ‘이대남’이라는 용어는 언제부터 유행하게 되었을까?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운영하는 뉴스 빅데이터 분석 엔진 ‘빅카인즈’에 의하면, 이 용어가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2019년 1월로 파악된다.1) 그 이후 2020년 5월까지 15개의 관련 기사가 검색이 되다가, 약 1년 동안 이대남을 키워드로 한 기사는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2021년 4월 7일, 즉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기점으로 해서 4월 한 달간 189건의 기사가 검색된다. 이후 대선까지 이대남은 국민의힘 당대표의 ‘세대포위론’과 ‘페미니즘 혐오’ 프레임을 확산시키는 언어로 언론에 의해 재생산되었다.(용어에 반대하는 논의조차 프레임의 확장에 기여한다.) 서울시장 보궐선거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대남은 문재인 정부에 대한 지지 혹은 반대와 연동하여 담론화되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이대남이라는 단어를 어떤 경로로 접하게 되었을까? 최근 한 조사결과에 의하면 이대남을 “TV뉴스, 신문기사, 온라인기사 등 언론 보도를 통해 접했다고 답한 비율이 73.4%”2)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는 다른 매체경로, 즉 방송 시사·토론 프로그램, sns, 온라인 카페 등을 통해 접한 비율에 비해 두드러지게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빅카인즈를 통해 2019년 1월부터 2022년 3월 10일까지 검색한 이대남 기사의 ‘키워드 연관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대선 직전까지 언론에서 기사를 통해 담론화된 이대남 현상은, ‘반페미니즘’보다는 ‘국민의힘’을 중심으로 연결되는 정당 지지율(당 인사) 및 선거 관련 이슈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 대개 ‘남성 청년의 경험’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던 청년세대 담론이 언론에 의해 ‘반정부 정서’3)로 전환되고,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기점으로 적극적인 투표세력으로 인식되어 의미부여를 받게 된 것이다. 결국 ‘이대남’은 언론과 정당이 불균질한 청년 남성 전체를 선거용으로 젠더 갈라치기하여, 백래시 세력과 동일화한 단어이다. 선거 이후에도 ‘2번남’(그 와중에 ‘이대남’(58.7% 2번남) 못지않은 ‘88만원 세대’(52.8% 2번남)의 보수화는 잘 이야기되고 있지 않다.) 혐오담론이 횡행하는 것을 보면, 그것은 특정 정당만의 방법론도 아닌 것 같다.
그러나 동시에 이번 대선에서 주목할 것은, 부동산 세금을 줄이기 위해 극우정당을 선택하는 거대한 흐름 안에서, 청년 여성들은 그 반대의 흐름을 명확히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거대한 백래시와 퇴행의 흐름 속에서 20대 여성들의 운동은 ‘투표정치’에서 명확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2. 청년담론의 젠더화를 위한 질문 : ‘현대적 젠더갭’은 이제 현실이 되었는가? 아니면 여전히 ‘이대남’은 허상인가?
‘이대남’에 대한 세대론적 해석 비판
‘이대남’을 세대론적으로 해석하는 시각의 출발은 여러 경로가 있겠지만, ‘88만원 세대 담론’으로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우석훈이 저서 『88만원 세대』의 절판을 요청한 것은 ‘88만원 세대’를 둘러싸고 있는 경제적 조건들에 대한 주체적 운동의 부재 때문이었다.4) 이후 ‘거대하고 중심적인 운동’의 부재5) 속에서 세대론은, 언론과 우파(청년에 속하며, 진보라고 자청하는 이들도 포함한 실질적 우파) 저자들에 의해 586 ‘남성 권력’을 인계받으려 하는 청년 ‘남성’ 정체성 정치의 방법론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청년 세대 담론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름은 카를 만하임이다. 다수의 논의들은 카를 만하임의 주장을 인용하며, 계급적 지위에 비견되는 ‘세대 위치’가 잠재적 성격을 넘어 ‘실제 세대’가 되기 위해서는 “역사적-사회적 통일성이라는 공동 운명에 대한 참여”6)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곧 ‘세대’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서 정치·사회적 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며, 세대는 동질적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의 비동시성”7)으로 구성된다는 관점이다. ‘청년세대’가 균일하지 않다는 논의들은 바로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청년세대의 비균질성에 대해서는 대표적으로 최종숙의 연구를 참고할 수 있다. 그의 논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20대 남성의 이념성향은 전통적인 진보-보수의 틀로 규정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쟁점별로 일관성을 띠지 않는다. ②문재인 정부에 대한 국정 지지율 하락과 20대의 보수화 사이에는 관련성이 없다. ③한국 사회의 젠더 문제는 20대만의 문제가 아닌 전 세대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8) 특히 최종숙은 20대 남성이 3040에 비해 성평등 의식이 결코 낮지 않고 오히려 상대적으로 높음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와 거부감’을 갖게 되는 원인을 “페미니즘의 다양한 결을 무시하고 무조건 ‘페미니즘이 문제’라고 보도해 온 언론”9) 환경에서 찾았다.
추지현의 연구에 따르면, 남성 3,435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보수 집단(전체의 20.6%)을 제외하고는 여성에 대한 차별 시정 및 지배적 남성성을 변화시키기 위한 남성들의 참여 확대 정책에도 긍정적”10)인 응답이 확인되었다. 이는 최종숙의 주장을 보충한다고 볼 수 있다. 추지현은 이 글에서, 세대 프레임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남성들의 상이한 경험과 차이를 “가족과 친밀성, 또래문화, 노동과정 등에서 작동하는 젠더불평등”11)을 통해 보아야 함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남성 청년의 성평등 인식이 여성 청년에 비해 떨어진다는 설문조사 결과도 존재한다. ‘성차별 시정’에 대한 동의율은 학력이나 지역, 나이, 정치적 성향에 관계없이 여성이 남성보다 높았으며, 고위직 임원이나 공무원 직종의 여성 진입 촉진에 관한 남성들의 인식은 “필요하지 않음”에 치우쳤다.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결과들은, ‘이대남’이라 부를 수 있는 동일하고 균질한 남성 집단을 설정하는 것이 문제적임을 말해 준다.
투표라는 정치적 계기가 만들어 내는 ‘현대적 젠더갭’
그러나 사회 문화적 현상을 넘어, ‘투표’라는 정치적 선택의 계기는 문제의 양상을 바꾸어버린다. 투표율이라는 통계수치의 가시화 방식은 정체성 정치를 통해 ‘이대남’과 ‘이대녀’를 실재하는 범주로 만들어 냈다. 먼저 2003년부터 2018년까지 시행된 한국종합조사 자료를 활용한 연구는 청년세대 내 이념 격차가 유의미하지 않으며, 가부장적 문화에 대해서는 청년집단 전체가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다고 밝힌다. 이는 세대 내 젠더 격차보다는 젠더 내 세대 격차가 더 유의미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해 주며 앞선 논의들에 정당성을 부여한다.13) 그러나 최근의 서울시장 보궐선거 결과까지 다루고 있는 연구를 참조하면, “‘20대 남성의 보수성’과 ‘20대 여성’의 상대적 진보성이 장기누적자료를 통해 포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14) 이러한 논의는 현재 청년세대 내 ‘현대적 젠더갭’15)의 원인을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나 가부장적 구조질서보다는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백래시의 일환으로 해석하면서, 기존의 연구경향과는 차이를 보인다. 이는 한국사회에서 현재 발견되는 ‘현대적 젠더갭’의 원인이 “구조적 요인보다 문화적 요인”16)에 있다는 주장이다. 원인에 대한 해석과는 별개로, 이 논의를 참고하면 20대 대선 역시 ‘현대적 젠더갭’ 현상의 장기화를 보여주었음을 알 수 있다.
‘이대남’ 프레임이 아닌 ‘청년담론의 젠더화’를 위하여
앞서 살펴본 것처럼 청년 남성의 반페미니즘 경향은 명백하게 ‘백래시’의 성격을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 남성들이 갖는 ‘억울함’17)에는 분명 ‘세대위치’의 측면이 있다. 홍찬숙은 청년 의제가 성평등에서 반페미니즘으로 전환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온라인 환경에서 학습된 여성혐오, 넘어설 수 없는 ‘부모찬스’의 벽, 한국의 이념지형에서 부담스러운 계급 갈등의 유형. 그리고 청년 남성에게는 ‘기성세대 남성과의 대결’보다 ‘젠더 갈등’이 리크스가 적은 갈등 유형이라는 점. 이때 청년 남성들이 느끼는 ‘억울함’의 원인은 물론 사회문화적 변화, 즉 가부장적 지위의 박탈과 연관이 있다.18)
‘규범적 젠더수행의 불가능성’을 지적하는 청년 담론은 이미 2010년대 중반부터 있었다.19) 배은경의 논의를 참고하면 ‘2030’, ‘청년세대’, ‘N포 세대’ 등의 담론에서 청년세대가 포기해야 했던 것은 ‘정상적 생애주기’였으며, 그것은 “근대적 젠더관계에 기반한 남성의” 것이었다. 이러한 젠더 격차의 비가시화 속에서 청년은 ‘여성’(장애·퀴어도 포함해야 한다.)이 사라진 계급격차 문제의 주체로 다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 남성 역시 규범적 남성성의 괴리에 직면했다.20) 이러한 청년 남성들의 괴리는,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의 여성정치가 운동으로써 ‘실제세대’로 인식될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구심점을 찾기 어려운 지점에 놓여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그 ‘틈’을 파고든 것이 ‘하태경·이준석식 트럼피즘’, 즉 젠더갈등 프레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20대 남성들의 박탈감은 “여성과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만이 아니라 이성애규범성에 기대어 잔혹한 낙관주의가 은폐하고자 했던 삶의 위기에 대한 총체적 반응”21)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군대에서 형성되는 헤게모니적 남성성이 문제가 된다. 따라서 동성애 문제 및 “성소수자 군인”의 문제는 바로 이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교란시키는 한 사례가 된다.22) 이에 천착하여 한국의 병역문제와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연결시킨 김엘리는 “한국의 남성성은 서구사회와 다르게 분단이라는 한국의 정치군사적 조건 때문에 냉전적 군사주의와 결별하지 못”23)함을 지적한다. 이로 인해 이전세대보다 성평등적 사고를 지녔지만 동시에 가부장적, 규범적 남성성과 결별하지 못하는 남성성을 ‘하이브리드 남성성’으로 보았다.24) 청년남성의 헤게모니적 남성성 수행불가를 이야기 하는 앞선 논의들과 김엘리 연구의 차이는, 김엘리는 이러한 ‘하이브리드 남성성’이 가진 저항의 측면을 발견하기를 기대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어떻게 헤게모니적 남성성에 저항하는 운동에 남성들이 동참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가 된다.
그밖에 청년정책에 대한 주목할 만한 논점은 다음과 같다. 청년정책이 남성 및 이성애에 근거한 ‘정상가족’의 통과로서 청년을 보고 있기 때문에, 청년기본법에 성소수자 관련 조항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이 지적된 바 있다. 따라서 청년 정책 수립에 젠더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25) 이상의 논의를 요약하면 ‘이대남’이라는 동질적 세대범주는 허상이지만, 그것은 투표라는 양적 데이터로 남는 순간, 실체가 되어버린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단어가 되었다.
3. 대안적 남성성은 가능할까?
대안적 남성성의 상상 자체가 헤게모니적 남성성에 다시 귀속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우리는 ‘정상성’을 기반으로 한 남성성의 규범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이러한 시도를 탐색하는 담론은 문학·문화 비평의 영역에서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그런 남자는 없다』(연세대학교젠더연구소),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오혜진), 『남성성의 각본들』(허윤), 『페미돌로지』(류진희 외) 등) 또한 페미니즘 운동에 뛰어든 남성들 역시 존재한다. “우리는 이대남이 아니란 말입니까”라는 표어로 대선 풍경에서 하나의 환기점을 만든 남성들도 있다.(‘행동하는 보통남자들’은 이후 ‘남성과 함께 하는 페미니즘’에 합류하였다.) 이러한 ‘남성페미니스트 말하기’의 정치적 효과에 관한 고민도 있다. 엄기호는 “보편의 헤게모니와 당파성을 질문하는 것이 여성주의의 전략”26)이기에 남성 페미니스트들이 페미니즘을 보편적 원칙으로 말하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질문하기도 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세대론의 영향이 느껴지며 그 의미가 다소 불명확하기는 하나, ‘좌파’의 존재 의의를 찾는 우석훈의 권고(『슬기로운 좌파생활』)는 발전적으로 전유해 볼 필요가 있다.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체화한 엘리트 지식인들의 가부장적 맑스주의 운동을 발전적으로 비판한 것은 페미니즘이 아니었던가?(『오빠는 필요없다』(전희경))
헤게모니적 남성성의 해체를 위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또 다른 수행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세상이 변했다. 적응하자. ‘남자들의 방’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여성의 신체를 성매매 산업을 매개로 증권화하는 금융자본주의를 거부해야 한다. 모든 성매매의 공간을 마련해주고 있는 부동산 지대의 욕망을 거부해야 한다. 여자도 군대 가라는 말을 하기 전에 여자가 군대 가도 죽지 않을 환경부터 만들자고 요구해야 한다. 트랜스 여성이라는 이유로 군인의 직업 정체성을 부정해버린 군대의 남성성을 거부해야 한다. 게임의 공정한 룰도 중요하지만 게임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인국공 사태가 보여준 비정규직 차별을 반성해야 한다. 노동 자체가 성차별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는 시스템에 화를 내자. 돌봄 노동은 모두가 해야 하는 노동이고, 감정 노동을 누구에게든 당연하게 바라서는 안 된다. 19대 대선 과정에서부터 레인보우 깃발을 무시하고, 세월호 진상규명을 헛공약이 되게 했으며, 차별금지법을 끝내 관철시키지 못한 문재인 정부와 집권 여당을 두고두고 비판해야 한다. 정의당이 노동자 문제보다 페미니즘에만 열중이라는 ‘아재’들을 나무라야 한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지하철을 타는 것에 어떤 반대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민간인 박근혜에게 소주병을 던지기보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해야 한다. 외국인 고용허가제로 인한 노동유연화 정책을 이대로 방치한다면, 곧 대대적인 외국인 혐오세력의 등장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 체계에서 대규모로 관리되며 착취당하는 소, 닭, 돼지, 쥐, 토끼 등에 대해 생각해보자. 반페미니즘이 온건한 가부장적 남성성의 회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환상을 버리고, 페미니스트와 과감히 연대하자. 근대적 남성성은 여성의 타자화를 통해 상상되었으므로, 상상 그만하고 (맨스플레인도 좀 줄이고!) 경청을 해보자. 자본주의적 욕망은 결국 노예 소유주들의 이익을 대의하는 민주주의로 수렴됨을 곱씹어 보자. 이런 것들을 하다 보면 뭔가는 달라지지 않을까?
MB를 답습하거나 (트럼피즘을 통해) 능가하려는 준스톤은 ‘88만원 세대’의 수혜자이며, ‘합리주의’를 표방하여 계급지위를 고수하려는 (세습)능력주의 남성성의 승리자이다.(그는 언제나 공정한 경쟁의 심판자 역할을 자임하지만 정작 그의 정계 입문 계기는 의문에 부쳐져 있다.27)) 확언하건대 ‘경쟁 룰의 공정성’이 잘 구현될수록 세습능력주의의 소수 승리자들의 계급이 공고해질 것이다. 여가부 폐지와 인구가족부(가칭) 신설이 보여주는 것은, 청년 여성의 몸을 인구 재생산 기계로 보고, 청년 남성에게 규범적 이성애 정상가족 신화를 되돌려 주겠다는 차기 정부의 의지다. 각성한 루저는 상층부 계급이 이야기하는 팩트와 현실추수주의의 환상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속지 않는 자들에게 속지 않는다.”28) 요약하면, 대안적 남성성의 구상과 다양한 연대의 경험을 통한 자기 객관화가 우리를 규범적 남성성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라 믿는다.
4. 농담입니다.
한편, 20대 대선의 투표 결과율 96.39%는 무엇을 의미하고 있나?(48.56%+47.83%) 나는 동아시아 4국을 보며 다당제가 오히려 허상이라고 생각한다!!
1) 「[아무튼, 주말] 이대남의 항변 "우리를 여성 혐오자라고 착각하지 마라"」, 조선일보, 2019.01.05.
2) 「'이대남' 용어 접하는 경로, 언론보도 73.4%」, 뉴시스, 2022.03.24.
3) 「이대남이 文에 등돌린 이유... "여성 일자리만 늘어서"」, 머니투데이, 2019.2.13.
4) 「[2030세상읽기]<88만원 세대> 인세를 돌려달라」, 주간경향 오피니언, 2012.04.10.
5) 한편 ‘거대하고 중심적인 운동’의 존재/부재에 대한 집중은 곧 다수의 운동들을 시야에서 가리는 효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6) “그러나 ‘세대위치’는 ‘실제세대’와 동일하지 않다. 단순한 계급 지위가 스스로 의식적으로 구성된 계급과 동일하지 못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실제 세대는 단순한 세대 위치보다 훨씬 더 많은 어떤 것을 뜻한다. 위치 그 자체는 잠재적인 가능성으로서, 드러나거나 삽입되거나 다른 사회적 힘들에 개입되고 수정된 형태로 표현될 수 있을 뿐이다. 단순한 연대기적 동시대성이 유사 세대위치를 구성하는 충분조건이 아니라고 지적했을 때, 우리는 지금부터 다루고자 하는 현상에 벌써 아주 가깝게 다가간 것이다. 동시대에 속하기 위해서, 그 세대위치에 내재된 약점들과 특권들을 수동적으로 겪거나 능동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동일한 역사적-사회적 영역 내에서―동일한 역사적 생활 공동체 내에서―동시대에 태어나야만 한다. 그러나 실제 세대는 특정한 역사적-사회적 통일성 내에서 위와 같이 기술된 단순한 현존하는 이상의 것이어야 한다. 실제 세대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구체적인 연계가 필요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이와 같은 추가적 연계는 이러한 역사적-사회적 통일성이라는 공동 운명에 대한 참여로 기술될 수 있다.” 카를 만하임, 이남석 역, 『세대문제』, 책세상, 64-65쪽.
7) 이는 세대에 관한 카를 만하임의 두 가지 비판 지점을 보면 명확히 알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실증주의적 관점이 생물학적 법칙과 연령층 등 양적인 방법으로 세대를 (단선적 진보개념을 통해) 동일한 집단으로 보았다면, 낭만주의적-역사적 관점은 세대문제를 순수하게 질적으로 파악 가능한 ‘내적 시간의 현존’이라는 ‘환상적’이고 ‘사색적’인 방법으로 파악하게 된다. 그는 이러한 세대의 동시대성이 결국 내적인 동질적-규정성이 된다고 그는 비판한다. 이는 곧 운명이 된다. 이를 통해 그가 기존의 세대 관점을 비판함으로써 밝히고자 한 것은 “동시대의 비동시성”, 즉 “다양한 세대가 동일한 연대기적 시간에 살고 있다”는 점이었다.
8) 최종숙, 「‘20대 남성 현상’ 다시보기 20대와 3040세대의 이념성향과 젠더의식 비교를 중심으로」, 『경제와 사회』, 비판사회학회, 2020, 189쪽.
9) 위의 글, 220쪽.
10) 추지현, 「청년 남성들의 젠더 인식 다층성」, 『한국여성학』 37(4), 한국여성학회, 2021, 188쪽.
11) 위의 글, 189쪽.
12) 이택면, 「20대 청년의 성평등 인식 격차와 정책 과제」, 『여성가족패널브리프』 한국여성정책연구원, 2021, 5-6쪽.
13) 박선경, 「젠더 내 세대격차인가, 세대 내 젠더격차인가? : 청년 여성의 자기평가이념과 정책태도 분석」, 『한국정당학회보』 19(2), 한국정당학회, 2020.
14) 김가영, 「한국 청년세대의 정치적 젠더균열」, 서울대 사회학과 석사학위논문, 2021.
15) 잉글하트와 노리스의 정리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정치적 젠더균열’은 ①여성이 남성보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전통적 젠더갭(Traditional Gender Gap) ②여성과 남성의 차이가 없어지는 해체 혹은 탈정렬(Dealignment) ③여성이 남성보다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현대적 젠더갭(Modern Gender Gap)으로 나눌 수 있다. 위의 글, 5쪽, 참고.
16) 위의 글, 61쪽.
17) 홍찬숙, 「청년의 무엇이 ‘성평등 프레임에서 젠더갈등과 공정성 프레임으로’ 변화한 것인가」, 『젠더리뷰』62권, 한국여성정책연구원, 2021.
18) “오히려 20대 남성들이 억울하게 느끼는 점은, ① 기성세대 남성에게는 당연했던 가부장적 지위가 자신들에게는 박탈되었다는 것(‘루저’-남성성), ② 그런데 자신들 세대의 여성들이 반가부장적 목소리를 냄으로 성 불평등 현실변화의 부담은 자신들의 몫이라는 것(세대 간 불공정성), ③ 게다가 가부장제의 일방적 수혜자인 기성세대 남성, 특히 586 남성이 청년여성의 페미니즘 요구에 동조한다는 것(586세대의 위선)이다.” 위의 글, 35쪽.
19) 배은경, 「‘청년 세대’ 담론의 젠더화를 위한 시론 : 남성성 개념을 중심으로」, 『젠더와 문화』8권 1호, 계명대학교 여성학연구소, 2015.
20) “노동시장의 영역에서 자신의 ‘아버지처럼’ 살지 못하는 청년 남성들은(생계부양 능력의 불안정화), 친밀성의 영역에서는 자신의 ‘아버지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는 요구에 직면한다(돌봄과 관계의 영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는).” 위의 글, 29쪽.
21) 정성조, 「‘청년 세대’ 담론의 비판적 재구성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중심으로」, 『경제와 사회』, 비판사회학회, 2019, 28쪽.
22) 위의 글, 30-33쪽.
23) 김엘리, 「20~30대 남성들의 하이브리드 남성성」, 『한국여성학』36권 1호, 한국여성학회, 2020, 144쪽.
24) “하이브리드 남성성은 근대 남성성의 가부장성을 비판적으로 보면서도 그와 완전히 단절하지 못하는 사회적 현실에서 때로 흉내도 내지만 사회경제적 조건이 뒷받침되지 않자 때로 실패하면서 ‘좀 다른’ 남성성을 수행하려 하는 양상을 지시한다. 따라서 하이브리드 남성성은 단순히 근대적 헤게모니 남성성을 재확립하거나 강화시키는 전략도 아니고 혹은 포스트페미니즘의 한 양상으로서남성권력이 해소되었다는 표상도 아니다.” 위의 글, 165쪽.
25) 김수아, 「청년정책과 청년담론 : 젠더관점의 고찰」, 『이화젠더법학』13권2호, 이화여자대학교 젠더법학연구소, 2021.
26) 권김현영 엮음, 엄기호, 「보편성의 정치와 한국의 남성성」,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교양인, 2017, 184쪽.
27) 「한나라 비대위원 이준석 아버지, 유승민 의원과 친구」, 한겨례인터넷 신문, 2011.12.30.
28) “우리는 라캉이 ‘le Nom-du-père(아버지의 이름)’을 ‘les non-dupes errent(속지 않는 자들이 헤멘다)’라는 경구로 다시 표현했다는 것을 압니다. 속지 않는 자들이란, 사태의 부정적 핵심을 안다고 주장하면서 해방의 가능성을 냉소적으로 부인하는 사람들이죠. 그들이 헤맨다는 건 바로 그런 의미에서입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사기꾼이에요. 라캉은 그런 속지 않는 자들에게 속지 않습니다.” 알랭바디우·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 지음, 현성완 옮김, 『라캉, 끝나지 않은 혁명』, 문학동네, 2017, 52쪽.
ⓒ 웹진 <3era>
‘88만원 세대’ N포남이 ‘이대남’ 현상을 이야기하려니 난감하지만
요한(제3시대 연구원)
1. ‘이대남’도 뉴스를 보고 자기가 ‘이대남’임을 알았을 가능성이 있다.
소위 ‘이대남’이라는 용어는 언제부터 유행하게 되었을까?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운영하는 뉴스 빅데이터 분석 엔진 ‘빅카인즈’에 의하면, 이 용어가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2019년 1월로 파악된다.1) 그 이후 2020년 5월까지 15개의 관련 기사가 검색이 되다가, 약 1년 동안 이대남을 키워드로 한 기사는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2021년 4월 7일, 즉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기점으로 해서 4월 한 달간 189건의 기사가 검색된다. 이후 대선까지 이대남은 국민의힘 당대표의 ‘세대포위론’과 ‘페미니즘 혐오’ 프레임을 확산시키는 언어로 언론에 의해 재생산되었다.(용어에 반대하는 논의조차 프레임의 확장에 기여한다.) 서울시장 보궐선거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대남은 문재인 정부에 대한 지지 혹은 반대와 연동하여 담론화되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이대남이라는 단어를 어떤 경로로 접하게 되었을까? 최근 한 조사결과에 의하면 이대남을 “TV뉴스, 신문기사, 온라인기사 등 언론 보도를 통해 접했다고 답한 비율이 73.4%”2)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는 다른 매체경로, 즉 방송 시사·토론 프로그램, sns, 온라인 카페 등을 통해 접한 비율에 비해 두드러지게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빅카인즈를 통해 2019년 1월부터 2022년 3월 10일까지 검색한 이대남 기사의 ‘키워드 연관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대선 직전까지 언론에서 기사를 통해 담론화된 이대남 현상은, ‘반페미니즘’보다는 ‘국민의힘’을 중심으로 연결되는 정당 지지율(당 인사) 및 선거 관련 이슈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 대개 ‘남성 청년의 경험’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던 청년세대 담론이 언론에 의해 ‘반정부 정서’3)로 전환되고,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기점으로 적극적인 투표세력으로 인식되어 의미부여를 받게 된 것이다. 결국 ‘이대남’은 언론과 정당이 불균질한 청년 남성 전체를 선거용으로 젠더 갈라치기하여, 백래시 세력과 동일화한 단어이다. 선거 이후에도 ‘2번남’(그 와중에 ‘이대남’(58.7% 2번남) 못지않은 ‘88만원 세대’(52.8% 2번남)의 보수화는 잘 이야기되고 있지 않다.) 혐오담론이 횡행하는 것을 보면, 그것은 특정 정당만의 방법론도 아닌 것 같다.
그러나 동시에 이번 대선에서 주목할 것은, 부동산 세금을 줄이기 위해 극우정당을 선택하는 거대한 흐름 안에서, 청년 여성들은 그 반대의 흐름을 명확히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거대한 백래시와 퇴행의 흐름 속에서 20대 여성들의 운동은 ‘투표정치’에서 명확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2. 청년담론의 젠더화를 위한 질문 : ‘현대적 젠더갭’은 이제 현실이 되었는가? 아니면 여전히 ‘이대남’은 허상인가?
‘이대남’에 대한 세대론적 해석 비판
‘이대남’을 세대론적으로 해석하는 시각의 출발은 여러 경로가 있겠지만, ‘88만원 세대 담론’으로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우석훈이 저서 『88만원 세대』의 절판을 요청한 것은 ‘88만원 세대’를 둘러싸고 있는 경제적 조건들에 대한 주체적 운동의 부재 때문이었다.4) 이후 ‘거대하고 중심적인 운동’의 부재5) 속에서 세대론은, 언론과 우파(청년에 속하며, 진보라고 자청하는 이들도 포함한 실질적 우파) 저자들에 의해 586 ‘남성 권력’을 인계받으려 하는 청년 ‘남성’ 정체성 정치의 방법론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청년 세대 담론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름은 카를 만하임이다. 다수의 논의들은 카를 만하임의 주장을 인용하며, 계급적 지위에 비견되는 ‘세대 위치’가 잠재적 성격을 넘어 ‘실제 세대’가 되기 위해서는 “역사적-사회적 통일성이라는 공동 운명에 대한 참여”6)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곧 ‘세대’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서 정치·사회적 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며, 세대는 동질적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의 비동시성”7)으로 구성된다는 관점이다. ‘청년세대’가 균일하지 않다는 논의들은 바로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청년세대의 비균질성에 대해서는 대표적으로 최종숙의 연구를 참고할 수 있다. 그의 논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20대 남성의 이념성향은 전통적인 진보-보수의 틀로 규정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쟁점별로 일관성을 띠지 않는다. ②문재인 정부에 대한 국정 지지율 하락과 20대의 보수화 사이에는 관련성이 없다. ③한국 사회의 젠더 문제는 20대만의 문제가 아닌 전 세대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8) 특히 최종숙은 20대 남성이 3040에 비해 성평등 의식이 결코 낮지 않고 오히려 상대적으로 높음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와 거부감’을 갖게 되는 원인을 “페미니즘의 다양한 결을 무시하고 무조건 ‘페미니즘이 문제’라고 보도해 온 언론”9) 환경에서 찾았다.
추지현의 연구에 따르면, 남성 3,435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보수 집단(전체의 20.6%)을 제외하고는 여성에 대한 차별 시정 및 지배적 남성성을 변화시키기 위한 남성들의 참여 확대 정책에도 긍정적”10)인 응답이 확인되었다. 이는 최종숙의 주장을 보충한다고 볼 수 있다. 추지현은 이 글에서, 세대 프레임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남성들의 상이한 경험과 차이를 “가족과 친밀성, 또래문화, 노동과정 등에서 작동하는 젠더불평등”11)을 통해 보아야 함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남성 청년의 성평등 인식이 여성 청년에 비해 떨어진다는 설문조사 결과도 존재한다. ‘성차별 시정’에 대한 동의율은 학력이나 지역, 나이, 정치적 성향에 관계없이 여성이 남성보다 높았으며, 고위직 임원이나 공무원 직종의 여성 진입 촉진에 관한 남성들의 인식은 “필요하지 않음”에 치우쳤다.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결과들은, ‘이대남’이라 부를 수 있는 동일하고 균질한 남성 집단을 설정하는 것이 문제적임을 말해 준다.
투표라는 정치적 계기가 만들어 내는 ‘현대적 젠더갭’
그러나 사회 문화적 현상을 넘어, ‘투표’라는 정치적 선택의 계기는 문제의 양상을 바꾸어버린다. 투표율이라는 통계수치의 가시화 방식은 정체성 정치를 통해 ‘이대남’과 ‘이대녀’를 실재하는 범주로 만들어 냈다. 먼저 2003년부터 2018년까지 시행된 한국종합조사 자료를 활용한 연구는 청년세대 내 이념 격차가 유의미하지 않으며, 가부장적 문화에 대해서는 청년집단 전체가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다고 밝힌다. 이는 세대 내 젠더 격차보다는 젠더 내 세대 격차가 더 유의미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해 주며 앞선 논의들에 정당성을 부여한다.13) 그러나 최근의 서울시장 보궐선거 결과까지 다루고 있는 연구를 참조하면, “‘20대 남성의 보수성’과 ‘20대 여성’의 상대적 진보성이 장기누적자료를 통해 포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14) 이러한 논의는 현재 청년세대 내 ‘현대적 젠더갭’15)의 원인을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나 가부장적 구조질서보다는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백래시의 일환으로 해석하면서, 기존의 연구경향과는 차이를 보인다. 이는 한국사회에서 현재 발견되는 ‘현대적 젠더갭’의 원인이 “구조적 요인보다 문화적 요인”16)에 있다는 주장이다. 원인에 대한 해석과는 별개로, 이 논의를 참고하면 20대 대선 역시 ‘현대적 젠더갭’ 현상의 장기화를 보여주었음을 알 수 있다.
‘이대남’ 프레임이 아닌 ‘청년담론의 젠더화’를 위하여
앞서 살펴본 것처럼 청년 남성의 반페미니즘 경향은 명백하게 ‘백래시’의 성격을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 남성들이 갖는 ‘억울함’17)에는 분명 ‘세대위치’의 측면이 있다. 홍찬숙은 청년 의제가 성평등에서 반페미니즘으로 전환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온라인 환경에서 학습된 여성혐오, 넘어설 수 없는 ‘부모찬스’의 벽, 한국의 이념지형에서 부담스러운 계급 갈등의 유형. 그리고 청년 남성에게는 ‘기성세대 남성과의 대결’보다 ‘젠더 갈등’이 리크스가 적은 갈등 유형이라는 점. 이때 청년 남성들이 느끼는 ‘억울함’의 원인은 물론 사회문화적 변화, 즉 가부장적 지위의 박탈과 연관이 있다.18)
‘규범적 젠더수행의 불가능성’을 지적하는 청년 담론은 이미 2010년대 중반부터 있었다.19) 배은경의 논의를 참고하면 ‘2030’, ‘청년세대’, ‘N포 세대’ 등의 담론에서 청년세대가 포기해야 했던 것은 ‘정상적 생애주기’였으며, 그것은 “근대적 젠더관계에 기반한 남성의” 것이었다. 이러한 젠더 격차의 비가시화 속에서 청년은 ‘여성’(장애·퀴어도 포함해야 한다.)이 사라진 계급격차 문제의 주체로 다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 남성 역시 규범적 남성성의 괴리에 직면했다.20) 이러한 청년 남성들의 괴리는,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의 여성정치가 운동으로써 ‘실제세대’로 인식될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구심점을 찾기 어려운 지점에 놓여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그 ‘틈’을 파고든 것이 ‘하태경·이준석식 트럼피즘’, 즉 젠더갈등 프레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20대 남성들의 박탈감은 “여성과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만이 아니라 이성애규범성에 기대어 잔혹한 낙관주의가 은폐하고자 했던 삶의 위기에 대한 총체적 반응”21)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군대에서 형성되는 헤게모니적 남성성이 문제가 된다. 따라서 동성애 문제 및 “성소수자 군인”의 문제는 바로 이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교란시키는 한 사례가 된다.22) 이에 천착하여 한국의 병역문제와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연결시킨 김엘리는 “한국의 남성성은 서구사회와 다르게 분단이라는 한국의 정치군사적 조건 때문에 냉전적 군사주의와 결별하지 못”23)함을 지적한다. 이로 인해 이전세대보다 성평등적 사고를 지녔지만 동시에 가부장적, 규범적 남성성과 결별하지 못하는 남성성을 ‘하이브리드 남성성’으로 보았다.24) 청년남성의 헤게모니적 남성성 수행불가를 이야기 하는 앞선 논의들과 김엘리 연구의 차이는, 김엘리는 이러한 ‘하이브리드 남성성’이 가진 저항의 측면을 발견하기를 기대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어떻게 헤게모니적 남성성에 저항하는 운동에 남성들이 동참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가 된다.
그밖에 청년정책에 대한 주목할 만한 논점은 다음과 같다. 청년정책이 남성 및 이성애에 근거한 ‘정상가족’의 통과로서 청년을 보고 있기 때문에, 청년기본법에 성소수자 관련 조항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이 지적된 바 있다. 따라서 청년 정책 수립에 젠더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25) 이상의 논의를 요약하면 ‘이대남’이라는 동질적 세대범주는 허상이지만, 그것은 투표라는 양적 데이터로 남는 순간, 실체가 되어버린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단어가 되었다.
3. 대안적 남성성은 가능할까?
대안적 남성성의 상상 자체가 헤게모니적 남성성에 다시 귀속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우리는 ‘정상성’을 기반으로 한 남성성의 규범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이러한 시도를 탐색하는 담론은 문학·문화 비평의 영역에서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그런 남자는 없다』(연세대학교젠더연구소),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오혜진), 『남성성의 각본들』(허윤), 『페미돌로지』(류진희 외) 등) 또한 페미니즘 운동에 뛰어든 남성들 역시 존재한다. “우리는 이대남이 아니란 말입니까”라는 표어로 대선 풍경에서 하나의 환기점을 만든 남성들도 있다.(‘행동하는 보통남자들’은 이후 ‘남성과 함께 하는 페미니즘’에 합류하였다.) 이러한 ‘남성페미니스트 말하기’의 정치적 효과에 관한 고민도 있다. 엄기호는 “보편의 헤게모니와 당파성을 질문하는 것이 여성주의의 전략”26)이기에 남성 페미니스트들이 페미니즘을 보편적 원칙으로 말하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질문하기도 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세대론의 영향이 느껴지며 그 의미가 다소 불명확하기는 하나, ‘좌파’의 존재 의의를 찾는 우석훈의 권고(『슬기로운 좌파생활』)는 발전적으로 전유해 볼 필요가 있다.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체화한 엘리트 지식인들의 가부장적 맑스주의 운동을 발전적으로 비판한 것은 페미니즘이 아니었던가?(『오빠는 필요없다』(전희경))
헤게모니적 남성성의 해체를 위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또 다른 수행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세상이 변했다. 적응하자. ‘남자들의 방’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여성의 신체를 성매매 산업을 매개로 증권화하는 금융자본주의를 거부해야 한다. 모든 성매매의 공간을 마련해주고 있는 부동산 지대의 욕망을 거부해야 한다. 여자도 군대 가라는 말을 하기 전에 여자가 군대 가도 죽지 않을 환경부터 만들자고 요구해야 한다. 트랜스 여성이라는 이유로 군인의 직업 정체성을 부정해버린 군대의 남성성을 거부해야 한다. 게임의 공정한 룰도 중요하지만 게임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인국공 사태가 보여준 비정규직 차별을 반성해야 한다. 노동 자체가 성차별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는 시스템에 화를 내자. 돌봄 노동은 모두가 해야 하는 노동이고, 감정 노동을 누구에게든 당연하게 바라서는 안 된다. 19대 대선 과정에서부터 레인보우 깃발을 무시하고, 세월호 진상규명을 헛공약이 되게 했으며, 차별금지법을 끝내 관철시키지 못한 문재인 정부와 집권 여당을 두고두고 비판해야 한다. 정의당이 노동자 문제보다 페미니즘에만 열중이라는 ‘아재’들을 나무라야 한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지하철을 타는 것에 어떤 반대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민간인 박근혜에게 소주병을 던지기보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해야 한다. 외국인 고용허가제로 인한 노동유연화 정책을 이대로 방치한다면, 곧 대대적인 외국인 혐오세력의 등장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 체계에서 대규모로 관리되며 착취당하는 소, 닭, 돼지, 쥐, 토끼 등에 대해 생각해보자. 반페미니즘이 온건한 가부장적 남성성의 회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환상을 버리고, 페미니스트와 과감히 연대하자. 근대적 남성성은 여성의 타자화를 통해 상상되었으므로, 상상 그만하고 (맨스플레인도 좀 줄이고!) 경청을 해보자. 자본주의적 욕망은 결국 노예 소유주들의 이익을 대의하는 민주주의로 수렴됨을 곱씹어 보자. 이런 것들을 하다 보면 뭔가는 달라지지 않을까?
MB를 답습하거나 (트럼피즘을 통해) 능가하려는 준스톤은 ‘88만원 세대’의 수혜자이며, ‘합리주의’를 표방하여 계급지위를 고수하려는 (세습)능력주의 남성성의 승리자이다.(그는 언제나 공정한 경쟁의 심판자 역할을 자임하지만 정작 그의 정계 입문 계기는 의문에 부쳐져 있다.27)) 확언하건대 ‘경쟁 룰의 공정성’이 잘 구현될수록 세습능력주의의 소수 승리자들의 계급이 공고해질 것이다. 여가부 폐지와 인구가족부(가칭) 신설이 보여주는 것은, 청년 여성의 몸을 인구 재생산 기계로 보고, 청년 남성에게 규범적 이성애 정상가족 신화를 되돌려 주겠다는 차기 정부의 의지다. 각성한 루저는 상층부 계급이 이야기하는 팩트와 현실추수주의의 환상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속지 않는 자들에게 속지 않는다.”28) 요약하면, 대안적 남성성의 구상과 다양한 연대의 경험을 통한 자기 객관화가 우리를 규범적 남성성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라 믿는다.
4. 농담입니다.
한편, 20대 대선의 투표 결과율 96.39%는 무엇을 의미하고 있나?(48.56%+47.83%) 나는 동아시아 4국을 보며 다당제가 오히려 허상이라고 생각한다!!
1) 「[아무튼, 주말] 이대남의 항변 "우리를 여성 혐오자라고 착각하지 마라"」, 조선일보, 2019.01.05.
2) 「'이대남' 용어 접하는 경로, 언론보도 73.4%」, 뉴시스, 2022.03.24.
3) 「이대남이 文에 등돌린 이유... "여성 일자리만 늘어서"」, 머니투데이, 2019.2.13.
4) 「[2030세상읽기]<88만원 세대> 인세를 돌려달라」, 주간경향 오피니언, 2012.04.10.
5) 한편 ‘거대하고 중심적인 운동’의 존재/부재에 대한 집중은 곧 다수의 운동들을 시야에서 가리는 효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6) “그러나 ‘세대위치’는 ‘실제세대’와 동일하지 않다. 단순한 계급 지위가 스스로 의식적으로 구성된 계급과 동일하지 못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실제 세대는 단순한 세대 위치보다 훨씬 더 많은 어떤 것을 뜻한다. 위치 그 자체는 잠재적인 가능성으로서, 드러나거나 삽입되거나 다른 사회적 힘들에 개입되고 수정된 형태로 표현될 수 있을 뿐이다. 단순한 연대기적 동시대성이 유사 세대위치를 구성하는 충분조건이 아니라고 지적했을 때, 우리는 지금부터 다루고자 하는 현상에 벌써 아주 가깝게 다가간 것이다. 동시대에 속하기 위해서, 그 세대위치에 내재된 약점들과 특권들을 수동적으로 겪거나 능동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동일한 역사적-사회적 영역 내에서―동일한 역사적 생활 공동체 내에서―동시대에 태어나야만 한다. 그러나 실제 세대는 특정한 역사적-사회적 통일성 내에서 위와 같이 기술된 단순한 현존하는 이상의 것이어야 한다. 실제 세대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구체적인 연계가 필요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이와 같은 추가적 연계는 이러한 역사적-사회적 통일성이라는 공동 운명에 대한 참여로 기술될 수 있다.” 카를 만하임, 이남석 역, 『세대문제』, 책세상, 64-65쪽.
7) 이는 세대에 관한 카를 만하임의 두 가지 비판 지점을 보면 명확히 알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실증주의적 관점이 생물학적 법칙과 연령층 등 양적인 방법으로 세대를 (단선적 진보개념을 통해) 동일한 집단으로 보았다면, 낭만주의적-역사적 관점은 세대문제를 순수하게 질적으로 파악 가능한 ‘내적 시간의 현존’이라는 ‘환상적’이고 ‘사색적’인 방법으로 파악하게 된다. 그는 이러한 세대의 동시대성이 결국 내적인 동질적-규정성이 된다고 그는 비판한다. 이는 곧 운명이 된다. 이를 통해 그가 기존의 세대 관점을 비판함으로써 밝히고자 한 것은 “동시대의 비동시성”, 즉 “다양한 세대가 동일한 연대기적 시간에 살고 있다”는 점이었다.
8) 최종숙, 「‘20대 남성 현상’ 다시보기 20대와 3040세대의 이념성향과 젠더의식 비교를 중심으로」, 『경제와 사회』, 비판사회학회, 2020, 189쪽.
9) 위의 글, 220쪽.
10) 추지현, 「청년 남성들의 젠더 인식 다층성」, 『한국여성학』 37(4), 한국여성학회, 2021, 188쪽.
11) 위의 글, 189쪽.
12) 이택면, 「20대 청년의 성평등 인식 격차와 정책 과제」, 『여성가족패널브리프』 한국여성정책연구원, 2021, 5-6쪽.
13) 박선경, 「젠더 내 세대격차인가, 세대 내 젠더격차인가? : 청년 여성의 자기평가이념과 정책태도 분석」, 『한국정당학회보』 19(2), 한국정당학회, 2020.
14) 김가영, 「한국 청년세대의 정치적 젠더균열」, 서울대 사회학과 석사학위논문, 2021.
15) 잉글하트와 노리스의 정리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정치적 젠더균열’은 ①여성이 남성보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전통적 젠더갭(Traditional Gender Gap) ②여성과 남성의 차이가 없어지는 해체 혹은 탈정렬(Dealignment) ③여성이 남성보다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현대적 젠더갭(Modern Gender Gap)으로 나눌 수 있다. 위의 글, 5쪽, 참고.
16) 위의 글, 61쪽.
17) 홍찬숙, 「청년의 무엇이 ‘성평등 프레임에서 젠더갈등과 공정성 프레임으로’ 변화한 것인가」, 『젠더리뷰』62권, 한국여성정책연구원, 2021.
18) “오히려 20대 남성들이 억울하게 느끼는 점은, ① 기성세대 남성에게는 당연했던 가부장적 지위가 자신들에게는 박탈되었다는 것(‘루저’-남성성), ② 그런데 자신들 세대의 여성들이 반가부장적 목소리를 냄으로 성 불평등 현실변화의 부담은 자신들의 몫이라는 것(세대 간 불공정성), ③ 게다가 가부장제의 일방적 수혜자인 기성세대 남성, 특히 586 남성이 청년여성의 페미니즘 요구에 동조한다는 것(586세대의 위선)이다.” 위의 글, 35쪽.
19) 배은경, 「‘청년 세대’ 담론의 젠더화를 위한 시론 : 남성성 개념을 중심으로」, 『젠더와 문화』8권 1호, 계명대학교 여성학연구소, 2015.
20) “노동시장의 영역에서 자신의 ‘아버지처럼’ 살지 못하는 청년 남성들은(생계부양 능력의 불안정화), 친밀성의 영역에서는 자신의 ‘아버지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는 요구에 직면한다(돌봄과 관계의 영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는).” 위의 글, 29쪽.
21) 정성조, 「‘청년 세대’ 담론의 비판적 재구성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중심으로」, 『경제와 사회』, 비판사회학회, 2019, 28쪽.
22) 위의 글, 30-33쪽.
23) 김엘리, 「20~30대 남성들의 하이브리드 남성성」, 『한국여성학』36권 1호, 한국여성학회, 2020, 144쪽.
24) “하이브리드 남성성은 근대 남성성의 가부장성을 비판적으로 보면서도 그와 완전히 단절하지 못하는 사회적 현실에서 때로 흉내도 내지만 사회경제적 조건이 뒷받침되지 않자 때로 실패하면서 ‘좀 다른’ 남성성을 수행하려 하는 양상을 지시한다. 따라서 하이브리드 남성성은 단순히 근대적 헤게모니 남성성을 재확립하거나 강화시키는 전략도 아니고 혹은 포스트페미니즘의 한 양상으로서남성권력이 해소되었다는 표상도 아니다.” 위의 글, 165쪽.
25) 김수아, 「청년정책과 청년담론 : 젠더관점의 고찰」, 『이화젠더법학』13권2호, 이화여자대학교 젠더법학연구소, 2021.
26) 권김현영 엮음, 엄기호, 「보편성의 정치와 한국의 남성성」,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교양인, 2017, 184쪽.
27) 「한나라 비대위원 이준석 아버지, 유승민 의원과 친구」, 한겨례인터넷 신문, 2011.12.30.
28) “우리는 라캉이 ‘le Nom-du-père(아버지의 이름)’을 ‘les non-dupes errent(속지 않는 자들이 헤멘다)’라는 경구로 다시 표현했다는 것을 압니다. 속지 않는 자들이란, 사태의 부정적 핵심을 안다고 주장하면서 해방의 가능성을 냉소적으로 부인하는 사람들이죠. 그들이 헤맨다는 건 바로 그런 의미에서입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사기꾼이에요. 라캉은 그런 속지 않는 자들에게 속지 않습니다.” 알랭바디우·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 지음, 현성완 옮김, 『라캉, 끝나지 않은 혁명』, 문학동네, 2017, 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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