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민중신학 다시 읽기] 나의 삶의 자세(안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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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무, 「나의 삶의 자세」, 『현존』 제71호, 현존사, 1976.5.


 

 


삶에는 연습이 없다

 

흔히 듣는 말이지만 나도 인생의 지각생이다. 무슨 일에 있어서든지 형광등처럼 스위치를 눌러도 불이 켜지는 동작이 늦다. 그래서 삶에 연습이 없다는 것도 늦게야 깨달았다.

 

사람들 중에는 학구심이 왕성하다는 표시로서 나는 학생 기분에 산다는 말을 곧잘 한다. 겸손한 말도 되고 구도자적 자세라는 말도 된다. 또는 몸은 늙었어도 언제나 어린애 마음이라는 말도 곧잘 한다. <다 됐다> <다 안다>라는 자세는 확실히 성장의 정지를 말하는 것이다. 언제나 배우고 알겠다는 노력이 왕성한 만큼 젊은 자세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거기 속임수가 있다. 그것은 그러는 동안 언제나 삶의 전선에서 책임을 도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도 만년 학생 기분이었다. 그래서 남의 말을 경청하고 되도록 결론은 짓지 않고 계속 넓게 그리고 많이 흡수하는 것을 미덕으로 알았다. 그런데 그러는 동안 어느듯 50의 고개를 넘었다.

 

오래도록 무슨 일이나 다음을 위한 경험을 쌓기 위한 연습처럼 생각했는데, 하다가 잘못되면 시정하면 될게 아니냐는 마음에서 였다. 그러나 살아온 과정을 보면 연습이란 하나도 없었다. 나는 비록 연습이라고 했어도 그것은 모두 현실이 되어 밖으로부터 나를 규정하는 척도가 됐고 나 자신은 내가 한 <연습> 행위에 대한 책임을 져야했다. 당장에는 몰랐다. 그러나 그런 것이 모두 전과범의 신상 카아드서 반영되듯 내 생에 씻을 수 없는 흔적으로 남아버렸다. 내가 연습이라고 생각한 일들이 나를 몰고 돌이킬 수 없는 길에 들어서게 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젊은이들에게 <삶에는 연습이 없다>라는 말을 반복한다. 고등학교 생활은 대학생을 위한 연습기로 알거나, 처녀시절은 결혼생활을 위한 연습기로 안다. 또 어떤 직장을 가진 이는 그 자리를 어떤 목표를 위해서 길가는 나그네가 잠간 거쳐 갈 나무 그늘 만큼이나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의 삶 자체에는 의미가 없고 자기가 내세운 다른 목표의 그림자에 눌린 음지적 삶이 된다.

 

아니! 삶에는 연습도 없고, 삶은 잠간 거칠 수단이 될 수 없다.

 

생활은 차야 한다. 공백을 두면 곰팡이가 낀다. 삶을 채우기 위해서는 여기 지금의 내가 하는 일, 내가 가진 관계에서 충실히 해야 한다. 다음의 일을 위해 지금의 나의 최선을 보류해도 좋다는 법은 없다. 그럴 때 그 다음의 길은 막혀 버린다.

 

삶에는 연습이 없다. 내일 하늘에 오를 입장권을 손에 쥐었드라도 오늘은 내 선 자리가 내 현실의 전부다. 이것이 늦게 배운 내 삶의 지혜 중 하나다.

 


공성이불거

 

공을 들였으면 거기 머물지 말라. 이것은 노자에게서 배운 말이다. 나는 이것을 일찍부터 내 삶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내가 애써 이루어 놓은 일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런데 내가 만든 것이고 내 공이 든 일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런데 내가 만든 것이고 내 공이 든 일이니 나는 그것에 붙어 덕을 보겠다는 생각은 제가 이룩한 일을 제가 다 뽑아 먹어야 하겠다는 심보다. 그런 모습은 그물을 쳐놓고 거기 걸리는 벌레들을 잡아 먹기 위해 기다리는 거미를 보는 느낌이다.

 

공든 탑이 무너진다는 말이 있지만 무너뜨리는 것은 바로 공 세운 자신일 경우가 많다. 생애를 바쳐서 애써 길러 놓은 자식을 잃은 부모, 피땀 흘려 만들어 놓은 사업을 무너뜨리는 일군 중 많은 경우는 제 세운 공에 집착하여 나 아니면 안되다는 자부심이 행패로 변하기 때문이다. 이미 그럴만한 능력이 없는데도 한사코 제가 드린 공에대한 권리를 주장하다가 안되면 원망과 독기로 세운 것을 헐어버린다.

 

나는 다알리아와 같은 꽃을 싫어한다. 꽃이 흉해서가 아니다. 다 시든 뒤에도 떨어지지 않고 축 늘어 붙어 있는 꼴이 보기 싫기 때문이다. 필 때는 활짝 피고 질 때는 미련없이 깨끗이 지는 꽃이 좋다. 그렇지 않은 것은 새 순을 방해한다.

 

우리는 다알리아 같은 인간을 얼마나 많이 보고 있나! 이미 기력도 없고 아무 것도 감당하지 못하면서도 제 공이 든 일이라고 해서 죽는 날까지 터주대감 노릇 할려는 통에 새 사람의 등장을 가로 막고, 새로운 길은 막아 버리므로 자기와 더부러 만들어진 일 자체도 망치는 것이다.

 

나는 볼품없는 꽃으로 있을 망정 져야 할 때는 깨끗이 지는 꽃이기를 원한다. 그래서 아무리 정성을 바친 일이라도 남이 무어라고 하기 전에 내 할 일이 끝났다고 보여졌을 때는 홀홀히 미련없이 거기를 떠나버리는 <용기>를 기르고 있다. 그래서 큰 일도 못하고 출세도 못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더러운 출세보다 이름없이 개끗히 살다 지는 삶이기를 바란다.

 


더불어 잘 사는 일

 

<잘 살아 보자>, <잘 산다>는 우리나라의 말처럼 모호한 것은 없다. 외국어로는 도저히 번역될 수 없다. <그 사람 잘 살아> 할 때 무얼 말하는가? 대체로 돈도 잘 벌고 세력도 갖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처럼 이기적인 말도 없을 것이다. 거기 윤리적인 고려는 깡그리 빠져 있다.

 

요새는 잘 산다면 거의 돈이 많다는 뜻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돈벌기 위해 수단벙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래서 우리 현실은 잘살겠다는 욕심의 각추전장이 된 인상이다. 잘 사는 사람들은 점점 더 그 터전을 늘리는데 혈안이 되고, 못사는 사람은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격의 원망과 증오심으로 찬다. 잘 사는 경쟁 때문에 이웃집의 가구를 보면 빚을 내서라도 보다 좋은 것 아니면 적어도 그와 같은 것을 장만해야 한다.

 

눈 앞에 게딱지 같은 오막집들이 옹기종기 한데 자기만은 고래같은 집을 짓고 굽어 볼 수 있는 것에서 삶을 즐기고, 주위는 그날 그날의 끼니에 떨고 있는데 그걸 굽어보면서 진수성찬이 맛있게 목구멍에 넘어 가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그것으로 잘 사는 것을 시위할 수 있는 그 심보가 잘 사는 표상이라면 분명히 새로운 <인간족>의 탄생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가끔 <잘 사는 족속>의 집에 가면 큰 집이 텅 비었음에 놀라곤 한다. 삶이 팽창해서 집이 커진 게 아니라, 큰 집을 짓고 그걸 채울만한 삶이 없어 쓸모없는 가구, 안보는 호화판 전집, 어울리지 않는 그림들을 마구 진열했다. 그런 것들은 삶과는 유리된 악세사리라는 것은 얼른 보아 알 수 있다. 이게 다 <잘 산다>는 것을 돈 많다는 것과 직결시키는데서 온 희비극이다.

 

잘 산다는 것은 <더불어 잘 사는 일>이어야 한다. 집 식구가 더불어 하나처럼 같은 호흡을 해야하고 가진 물건과 내 취미가 조화돼야 한다. 그러나 내 주변이 못사는데 나만 잘 살 수는 없다. 주변이 굶주림에 아우성치는데 내 앞의 갑진 음식이 그렇게 소화가 잘 되며 내 눈 앞에 한 장의 연탄이 없어 오들오들 떠는 것을 보면서 <우리 집은 너무 더워서> 자주 문을 열어 찬 공기로 배기하는 것을 자랑으로 하는 따위를 잘 사는 사람이라고 하면 어딘가 잘못되게 하닌가!

 

어떤 사람이 나를 찾아와서 집안을 두리번거리다 하는 말이 <안박사님 처지에 이건 너무합니다>라고 한다. 그 말에 나는 얼른 찌그러진 몇 점의 골동품을 생각하고, “미안합니다. 사실은 저것들은 산 것이 아니라 어떤 제자가 갖다 준 것입니다”고 했드니 그건 동문서답이었다. 그는 우리집이 너무 초라하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내가 그에게는 못사는 것으로 보인 것이다.

 

나는 잘 살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까닭은 나보다 못 사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나는 지금보다 더 좋은 집을 쓰고 더 잘 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면 그만큼 못사는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워 풀이 죽을 것만 같다. 내가 부자가 되어 소유가 많아지드라도 겉은 초라하게 하고 값진 것은 숨기지 모른다. 까닭은 못사는 사람들에게 미안해서!

 

나는 잘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모두 더불어 잘 살기를 원한다. 너를 잘 살게 하는데 내 삶의 행복을 느끼고 그러므로 거기서 내 동일성(identity)을 찾겠다.

 

우리의 문제는 국민소득이 낮은 데 있는게 아니다. 아니! 더불어 사는 풍토가 없기 때문이다.

 


나의 신앙

 

나는 부끄러움 없이 살지 못한다. 까닭은 이기성에서 탈피못했기에! 나는 그리스도교도다. 그러므로 예수의 교훈이나 그의 삶이 나의 생각이나 삶의 기준이 돼 있음은 당연하다. 그런데 그 중에 무엇보다도 나를 사로잡는 것은 예수가 가난한 자, 눌린 자의 친구였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가 그러한 소의자들을 위한 사랑을 설교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입장에 자기를 두고 거기서 자신의 동일성을 찾았다. 그는 주린자, 목마른 자, 나그네, 헐벗은 자, 병든 자, 그리고 감옥에 갇힌 자를 자신과 일치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고 여우도 굴이 있으나, 자신은 머리 둘 곳이 없는 길을 택했으며 그런 행위가 마침내 집권자들의 비위를 상하게 해 정치범의 누명을 써서 처형당하기에 이른 것이다.

 

나는 도저히 그를 모방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나의 부끄러움이며 잘 못 산다는 콤플렉스의 근거다. 그러나 그에게서 나는 사람답게끔 잘 사는 윤리의 근거를 찾았다. 그 제1장은 눌린 자, 가난한 자, 억울한 자의 편에 선다는 것이다. 이것이 더불어 잘 살기 위한 요소다.

 

ㅇ세력들이 횡포를 부린다. 약한자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도 바로 약하기 때문에 제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경우가 속출한다. 부한 기업주들의 횡포에서 서민들은 생존의 위협을 당한다. 공장에서는 품팔이 노동자들이 일한 만큼의 보수를 받지 못하고도 해고가 무서워 손발이 묶여 있다. 웃음을 팔고 몸을 판돈을 포주들이 가로채어도 침묵해야 한다. 불우한 가정에서 났기에 남의 집 식모로 있어야 하는 소녀들이 주부들의 횡포에 받을 돈도 제대로 못 받고 오히려 매질을 당한다. 부모없는 어린 것들에게 돌아갈 양육비를 가로채는 악덕 (자선) 사업가들 때문에 고아들은 배를 주린다. 당하는 자들은 이미 결박된 상태이기에 권리를 찾을 길이 없다. 이런 사실들을 외면하고 종교니 사상이니 떠드는 것은 거짓말이다. 정말 인류의 사랑을 그 중심으로 하는 종교라면 바로 저런 이들의 대변자가 되고 저들의 인권을 찾아주어야 한다. 고발운동, 악덕상품의 불매운동, 억울하게 투옥된 자들을 위한 해방운동은 비록 종교라는 이름을 내세우지 않아도 종교의 본뜻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인간은 설득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존중하며 그렇기 때문 폭력으로 하는 싸움은 반대한다. 인권운동은 폭력적 혁명을 사전에 저지하는 운동이어야 한다. 아무리 화급해도 해방운동은 이성에 호소해야 한다. 그 때문에 수난을 당하는 한이 있어도 이 호소는 중단할 수 없다. 일의 성패는 내가 결정할 수는 없다. 나는 그저 심으련다. 내가 거두기까지 하겠다고 서두를 때 사랑의 운동은 폭력운동으로 둔갑된다.

 

예수는 바로 가난하고 눌린자와 자기를 일치시키는데 삶의 뜻을 제시했다. 그러므로 나도 나의 생의 의미를 이런 데서 찾으려고 한다. 눈 앞에 있는 형제의 수난을 외면하고 천국으로 향하는 직통로는 없다. 남이야 어떻든 내 영혼의 구원만을 위해 발버둥치는 자들이 만일 종교인이라면 그건 종교적 이기주의자다. 이런 이기적인 자들이 수용되는 곳이 천국일진대 나는 거기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겠다. 그런 곳에 예수가 있지는 않을 터이니까.


출처 : 심원 안병무 아키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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