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성장과 생태(신)학의 새로운 지평:
바울의 ‘메시아적 삶’의 구조로 사회-생태 변혁 사유하기
신익상(성공회대학교)
이 글에서는 ‘사회-생태 변혁을 위한 개념 틀’을 소개하고 이 틀을 통해 기후-생태 위기 대응의 대표적인 두 담론인 탈성장(degrowth)과 탈동조(decoupling) 사이의 선택 문제를 전향적으로 다룬다. 이 전향적 접근은 탈성장과 탈동조의 종합을 제안하는 것인데, 이 개념 틀 내에서는 ‘어떻게’ 종합하는가 하는 방법의 차원이 구조와 실천을 매개할 중간 수준을 묘사하는 문제가 된다. 이 지점에서 탈성장과 탈동조의 종합을 위해 바울의 ‘메시아적 삶’의 구조를 시론(試論)의 차원에서 도입하려고 한다. 즉, 바울의 ‘메시아적 삶’의 구조를 권력과 정치의 구조에 적용함으로써 신학이 지구적 단위의 급박한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현안 논의에 이론이나 담론의 ‘실제적인 기여’를 제공할 가능성을 탐험하려는 것이다.
1. 사회-생태 변혁을 위한 개념 틀(CF_SET): 거시 수준, 미시 수준, 중간 수준
‘사회-생태 변혁을 위한 개념 틀’(A Conceptual Framework for a Social-Ecological Transformation, 이하 CF_SET)이 제안된 이유는 지속 불가능한 궤적을 그리고 있는 기존 사회-생태 구조를 근원적으로 바꾸기 위한 여러 노력을 평가하여 그 한계를 발견하고 대안을 찾는 방식을 제시하기 위해서다. 대안적 실천들이 다양하게 일어나는 것에 찬물을 끼얹지 않고 오히려 격려하면서 말이다.
이를 위해 스테파니 지버스-글로츠바흐(Stephanie Sievers-Glotzbach)와 줄리아 췌르지히(Julia Tschersich)는 ‘사회-생태 변혁’(Social-Ecological Transformation, 이하 SET)을 추구하는 몇 가지 방식들을 검토하여 이러한 접근들이 갖는 빈틈을 찾아낸다. 그들이 찾아낸 빈틈은 “충분한 규범적 개입”1)의 부족, 즉 ‘변혁의 방향’ 차원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기존 연구의 이러한 빈틈을 메우기 위해 스테파니와 줄리아가 개발한 것이 바로 CF_SET, “미시 수준의 개별적 변화 과정들을 거시 수준의 더 광범위한 시스템의 변화들과 연결하기”2) 위한 개념 틀이다(〈그림1〉 참조).
CF_SET에서 거시 수준은 SET의 규범적 ‘목표’를 표시한다. 목표는 두 가지다 ― 생태적 기능의 지속과 사회 구조의 심오한 변화. 지구 생태계의 파괴가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산업 문명에 의해 가속되고 있는바, 이 생태계가 지속가능하려면 생태계 파괴의 원인인 인류 사회 구조가 온통 변화해야 한다. 이 수준의 변혁은 기존 구조에 도전함으로써 세대 간, 세대 내 불평등과 부정의를 극복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세대 내 불평등과 부정의는 공시적 차원의 문제이며 세대 간 불평등과 부정의는 통시적 차원의 문제로서 이 목표는 공간과 시간을 씨줄과 날줄로 삼는 통합적 정의 실현 성취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시 수준은 SET을 위한 변화 프로세스들이 지닌 변혁적 성격이 드러나는 수준이다. 이 수준에서는 변화를 향한 구체적인 ‘행동’이 일어난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들은 정의롭고 회복탄력성이 있으나 기존 패러다임 밖에서 발생한다. 그 예로는 로컬과 지역 공간 규모로 전개되는 사회 운동, 사회적 기업, 시민사회 이니셔티브, 행위자 네트워크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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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사회-생태 변혁을 위한 개념 틀(CF_SET)3) |
여기서 문제는 미시 수준과 거시 수준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느냐에 있다. 미시 수준의 구체적 변화 프로세스들이 거시 수준의 규범적 목표와 어떻게 상호작용할 수 있을까? 열쇠는 중간 수준에 있다.
중간 수준은 변화 프로세스들의 변혁적 영향을 강조함으로써 SET 개념의 미시적 차원과 거시적 차원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 중간 수준은 이니셔티브가 기존 구조에 도전하고(상황 형성으로서의 힘/권력) 새로운 형태의 행위를 촉진함으로써(행동 형성으로서의 힘/권력) 변혁적 힘/권력을 얻고 널리 퍼진 힘/권력의 관계를 변경하는 데 성공했는지를 측정한다(깊이). 특정 제도들의 상대적인 불안정성을 재구조화하고 힘/권력과 권위를 재분배하는 것은 공인된 사회 패러다임들을 체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심오한 변혁을 끌어내는 핵심 요소다.4)
힘/권력의 배치는 제도를 통해 이루어진다. 변화를 위한 실천들은 제도를 통해 기존의 패러다임을 거슬러 구조적 변화의 상황을 형성하는 힘/권력으로 작용하고, 다시 이렇게 변화된 구조는 역시 제도를 통해 변혁적 성격을 지닌 변화 프로세스들을 촉진하는 행동 형성의 힘/권력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힘/권력의 작용이 선순환함으로써 미시 수준과 거시 수준이 연결되며 SET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물론, 중간 수준은 일종의 ‘복잡한 중간’(messy middle)일 수 있다. 돌파구를 찾기 어려운, 그래서 불확실성과 불안으로 인해 회의주의에 빠지기 쉬운 공간일 수 있다. 따라서, 관건은 어떻게 제도가 불확실성과 무기력함을 넘어서는 힘/권력의 역할을 할 수 있느냐가 될 것이다.
2. ‘탈성장’을 CF_SET의 거시 수준에 위치시키기
기후-생태 위기 대응을 위한 기존의 연구 프로그램들이 CF_SET의 거시 수준에 충분히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 중요한 원인으로 차마 포기하지 못하는 ‘성장주의’를 지목할 수 있다는 사실은 기후-생태 위기 대응을 위한 사회-생태 변혁의 거시적 지향을 어떻게 구체화해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한다. 여기서 관건은 성장주의를 어느 정도까지 포기할 것이냐다. 이른바 탈동조(decoupling)와 탈성장(degrowth) 논쟁이다.
지속가능발전목표(SDGs)는 물론 ‘그린 뉴딜’ 류의 주요 골자를 이루는 ‘탈동조’란 계속 성장주의를 추구하면서도 환경 압력은 줄여나가도록 할 수 있다는 의미다. 단적으로, 성장하면서도 온실가스는 줄여나갈 수 있다는 주장이다. 탈동조주의자들은 효율성과 생산성의 향상이 물질・에너지 사용의 축소를 가져온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이 가정은 제본스의 역설(Jevons Paradox)에 의해 반박될 수 있다. 제본스의 역설이란 “자원을 이용해 효율성을 높이는 기술 변화는 자원 소비율을 낮추는 게 아니라 오히려 높”5)이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심리적으로 효율성이 높아지면 물질이나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만, 오히려 접근성이 확대되어 소비가 더 높아지게 된다.
탈동조는 CF_SET의 거시 구조 내에서 사회 구조의 심오한 변화에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만 끝나지 않고, 그 결과로 생태적 기능의 지속 또한 가능하지 않게 한다. 하지만, 기후위기 상황에서 사회 구조의 변혁은 생태적 지속가능성을 보장할 정도로 진행되어야 한다. 인류 사회와 지구 생태계는 그 어느 때보다 긴밀하게 되먹임(feedback) 구조로 연동되어 있어서, 한쪽의 변화는 다른 쪽의 변화를 촉발하면서 전체 생태계 시스템의 준평형 상태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 이런 식으로 성장주의는 CF_SET의 거시 구조가 지향하는 두 기둥, 즉 생태적 기능의 지속과 사회 구조의 심오한 변혁 양쪽 모두에 걸림돌이 된다.
그렇다면, 성장주의 자체를 벗어날 수 있는 방향으로의 전환을 모색해야 한다. 이러한 모색 중 하나가 바로 ‘탈성장’이다. 성장주의와의 결별을 위해 탈성장은 GDP 기반의 풍요 관념에서 벗어나 사회적이고 생태적인 가치 영역을 확대해 나가고자 한다. 그런데, 이렇듯 탈성장이 성장주의와의 완전한 결별이라면, “최종적으로 시스템 전체를 바꿀 필요가 있다.”6) 그리고, 만일 사회 시스템 전환이 탈성장의 최종 목표라면, 기후-생태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이 바로 현재의 사회 시스템임을 고려할 때, 탈성장은 CF_SET의 거시 수준에서 사회 구조의 심오한 변화를 이끌어갈 강력한 개념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우선, 탈성장은 ‘생태적 기능의 지속’과 무리 없이 연결될 수 있다. 또한, 안전, 정의, 공정을 통해서 생명 세계 내 모든 존재의 복지를 추구한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세대 내/세대 간 정의 실현도 추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럼, 이제 더는 긴 말 할 것 없이 탈성장을 향해 가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정말 이것으로 끝인가?
CF_SET의 거시 수준을 형성함에 있어 완벽할 것만 같은 탈성장인데, 그 앞을 ‘탈성장 딜레마’가 막고 나선다. ‘탈성장 딜레마’란 탈성장의 심각한 난제를 가리키는 말로, 그것을 현실화하기는 힘들다는 대중적 인식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멋진 꿈인들 무슨 소용인가? 탈성장이 CF_SET의 거시 수준에 놓여 SET의 목표가 될 경우, 그 어느 때보다 거시 수준과 미시 수준의 역동적 연결 문제가 대두한다.
탈성장 딜레마는 기존 사회 구조로부터 새로운 사회 구조로의 전격적인 변혁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확인케 한다. 탈동조는 지금까지 인류가 쌓아온 가장 성공적인 체제, 즉 기술 혁신을 통한 성장주의 체제를 통해 기후-생태 위기 또한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기반으로 한다. 그 체제가 기후-생태 위기의 근원적 원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잘할 수 있는 일을 더욱 잘하기만 하면, 우리가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일을 해낼 수 있을까?
이 대목에서 한번 현실주의와 이상주의를 통전시키는 길을 찾아보자. 이는 탈동조가 지배적인 상황에서 앞으로 탈성장 논의의 방향이 어떻게 되어야 할지를 고민하는 것과 같다. 첫째, 탈성장이 CF_SET의 거시 수준으로 설정되는 경우 거시 수준과 미시 수준의 거리를 해소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둘째, 그 대안으로 탈동조와 탈성장의 통합적 접근을 수용한다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서로 연결되어 있는 이 두 문제는 모두 CF_SET의 중간 수준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문제로 수렴한다고 할 수 있다. 중간 수준이 거시 수준과 미시 수준의 매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물론, ‘탈성장과 탈동조의 통합적 접근’이 왜 거시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중간 수준의 문제일까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이유는 명백하다. 일반적으로 탈동조는 CF_SET의 거시 수준을 충분히 만족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앞에서 이미 확인했다. 따라서, 탈동조를 거시 수준에서 논하기는 어렵다. 다만, 이 개념이 국가 간/국가 내 정책과 제도를 통해 구체화되어 왔고 지금도 진행 중이므로, CF_SET에서 고려할 수 있는 영역은 중간 수준이다. 즉, 탈동조의 제도적이고 정책적인 측면이 중간 수준에서 고려되는 것이 합리적이다.
결국, 탈동조와 탈성장의 통합적 접근 문제는 거시 수준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형성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기후-생태 위기 시대에 이러한 통합적 접근을 통해서 어떻게 ‘사회-생태 변혁’(SET)을 성취할 것이냐 하는 이행의 방법론 문제로 다루어야 한다. 이제 탈동조+탈성장은 중간 수준과 거시 수준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관련되며 변혁의 방법론을 형성할 수 있는지의 문제가 된다. 어떻게 탈동조의 정책과 제도를 통해 탈성장의 사회-생태 구조로 이행할 수 있느냐의 문제라는 말이다. 즉, 거시 수준과 관련하여 중간 수준을 어떻게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하느냐가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탈동조의 제도적이고 정책적인 요소들을 중간 수준에 배치해서 다룰 때, 이것이 어떻게 탈성장이라는 거시 수준의 지향과 통합될 수 있을지를 거시 수준과 미시 수준의 매개로서의 중간 수준이라는 차원에서 묘사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어떻게 하면 이 제도로부터 새로운 제도로 넘어갈 수 있을까? 이 질문을 움켜쥐고 신학으로 무대를 옮겨보자. 신학은 이 질문에 무엇으로 답할 수 있을까? ‘메시아적인 삶’이다.
3. 메시아적 삶의 정치적 구조: 탈동조와 탈성장의 연계를 위한 시론(試論)
메시아적인 삶이 어떤 삶인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성서의 본문은 고린도전서 7장 29~31절이다. 이 본문에서 핵심은 ‘마치 ~이 아닌/없는 것처럼’이라는 권유다. 이 세계에 속해 있지 않은 것처럼 이 세계에 속하는 삶. 이 세계의 외형(형식)을 입고 있지만 그 외형(형식)에 좌우되지 않는 삶. ‘마치 ~이 아닌/없는 것처럼’은 종말과 지금의 삶과의 관계를 명확하게 한다. 종말에 대한 대망으로 현재가 헛되게 소비되거나 포기되는 게 아니라, 고난스러운 현실 속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냄으로써 오히려 현재가 새로운 의미와 가치로 풍성하게 된다. 종말에 대한 예감이 오히려 현재의 삶을 가득 채우는 잠재력이 되는 것이 바로 ‘메시아적인 삶’이다. ‘메시아적인 삶’은 이 세상을 떠나서 살아갈 어떤 삶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 속에서 살아내는 삶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메시아적인 삶’은 사회 구조에 관한 성찰과 비판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정치와 관련된 것이며 그 삶이 기거하는 시간으로서의 메시아적 시간은 역사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대상이다. ‘마치 ~이 아닌/없는 것처럼’은 적어도 기독교 신앙에 들어선 이들에게는 역사 안에서 자기 자신과 긴장 상태에 놓이도록 한다. ‘메시아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지금의 시간을 메시아적인 시간으로 받아들여 매 순간을 소중하게 산다. 역사 안에서 역사에 충실한 삶을 살아간다. 어떻게 충실하게 살아가는가? 이 세상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여건과 상황 속에 있으면서도 그러한 여건과 상황을 넘어서서 새로운 의미와 가치로 변화시키며 산다. 이것이 바로 ‘마치 ~이 아닌/없는 것처럼’ 사는 삶, 자기 자신과의 긴장 속에서 사는 삶이다. 이 긴장이 기존의 의미와 가치가 그 형식을 유지함에도 더는 효력을 갖지 않도록 한다. 이렇듯 기존의 의미와 가치는 효력이 정지되고 새로운 의미와 가치가 획득되는 방식은 깊은 자기 성찰이 기존의 사회적 형태에 대한 성찰로 확장하는 혁명적인 삶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마치 ~이 아닌/없는 것처럼’이라는 메시아적인 삶의 태도가 제시하는 방식이다.
중간 수준에서 문제가 무엇이었던가를 다시 상기해보자. 현재의 제도와 정책이 변화하기란 쉽지 않기에, 사회-생태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회의주의와 열패감에 빠지기 쉽다는 문제였다. 그렇기에, 현재의 제도와 정책이 힘의 선순환을 이루면서 사회-생태 변화에 참여함으로써 스스로를 변모해 갈 수 있도록 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요청된다. 메시아적인 삶의 양식은 이를 가능케 하는 방법을 제공할 수 있다. 메시아적인 삶은 현재의 일상적인 삶이 갖추고 있는 형식을 유지하면서, 그 형식이 기존에 추구하던 내용을 멈추고 새로운 내용을 실현해 나가는 삶이기 때문이다. 기왕의 제도와 정책을 따르면서, 그 제도와 정책의 부조리를 성찰적 접근을 통해 멈추어 내고, 새로운 정책과 제도로의 이행을 위한 절차를 새로운 정책과 제도를 향한 목표 속에서 밟아나가는 것. 이것이 ‘마치 ~이 아닌/없는 것처럼’의 태도로 중간 수준에서 메시아적인 삶의 양식을 실현하는 길일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제도와 정책의 지난한 변모 과정을 기존의 제도와 정책 속에서 정치적이고 혁명적인 방식으로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마치 ~이 아닌/없는 것처럼’은 현세적 시스템이 실질적으로 효력을 끼치지 못하게 만들고, 그래서 그 시스템의 지속이 형식적으로는 유지되나 기존의 영향력은 폐지되도록 한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제도와 정책이 새로운 제도와 정책으로 이행할 계기를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메시아적인 삶의 양식을 갖춘 힘(권력)은 현재 또는 기존의 제도와 정책하에서라도 구체적인 실천들과 사회-생태 변화를 매개하는 실질적인 힘이 된다.
바울의 ‘메시아적 삶’의 구조에 대해 오늘날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해석학적 자원이 사회-생태 변혁을 위한 기획과 이론에 일정한 역할을 할 가능성을 탐구하는 작업은 생태학과 생태신학 모두에게 새로운 지평을 연다고 할 수 있다. 일종의 지평 융합 형태로 말이다. 생태학은 ‘긴장’이라는 개념을 통해 생태계가 갖는 자기 생성성을 스스로의 이론에 적용할 수 있는 여러 풍부한 경로 중 가치 있는 하나의 ‘깊은’ 경로로서 기독교 문해력의 힘을 빌려올 수 있다. 또한, 바로 이 동일한 과정을 통해 생태신학은 변증과 독백의 길을 벗어나 기독교 문해력의 힘을 제공함으로써 실제적 사회 변혁에 동참하는 구체적 이론으로 거듭날 수 있다.
1) Stephanie Sievers-Glotzbach and Julia Tschersich, “Overcoming the process-structure divide in conceptions of Social-Ecological Transformation: Assessing the transformative character and impact of change processes,” Ecological Economics 164(2019), Article 106361.
2) Ibid.
3) Ibid.
4) Ibid.
5) 자코모 달리사, 페데리코 데미리아, 요르고스 칼리스 엮음/강이현 옮김, 『탈성장 개념어 사전』 (홍성: 그물코, 2018), 219.
6) 사이토 코헤이/김영현 옮김,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기후위기 시대의 자본론』 (고양: 다다서재, 2021), 264.
ⓒ 웹진 <제3시대>
탈성장과 생태(신)학의 새로운 지평:
바울의 ‘메시아적 삶’의 구조로 사회-생태 변혁 사유하기
신익상(성공회대학교)
이 글에서는 ‘사회-생태 변혁을 위한 개념 틀’을 소개하고 이 틀을 통해 기후-생태 위기 대응의 대표적인 두 담론인 탈성장(degrowth)과 탈동조(decoupling) 사이의 선택 문제를 전향적으로 다룬다. 이 전향적 접근은 탈성장과 탈동조의 종합을 제안하는 것인데, 이 개념 틀 내에서는 ‘어떻게’ 종합하는가 하는 방법의 차원이 구조와 실천을 매개할 중간 수준을 묘사하는 문제가 된다. 이 지점에서 탈성장과 탈동조의 종합을 위해 바울의 ‘메시아적 삶’의 구조를 시론(試論)의 차원에서 도입하려고 한다. 즉, 바울의 ‘메시아적 삶’의 구조를 권력과 정치의 구조에 적용함으로써 신학이 지구적 단위의 급박한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현안 논의에 이론이나 담론의 ‘실제적인 기여’를 제공할 가능성을 탐험하려는 것이다.
1. 사회-생태 변혁을 위한 개념 틀(CF_SET): 거시 수준, 미시 수준, 중간 수준
‘사회-생태 변혁을 위한 개념 틀’(A Conceptual Framework for a Social-Ecological Transformation, 이하 CF_SET)이 제안된 이유는 지속 불가능한 궤적을 그리고 있는 기존 사회-생태 구조를 근원적으로 바꾸기 위한 여러 노력을 평가하여 그 한계를 발견하고 대안을 찾는 방식을 제시하기 위해서다. 대안적 실천들이 다양하게 일어나는 것에 찬물을 끼얹지 않고 오히려 격려하면서 말이다.
이를 위해 스테파니 지버스-글로츠바흐(Stephanie Sievers-Glotzbach)와 줄리아 췌르지히(Julia Tschersich)는 ‘사회-생태 변혁’(Social-Ecological Transformation, 이하 SET)을 추구하는 몇 가지 방식들을 검토하여 이러한 접근들이 갖는 빈틈을 찾아낸다. 그들이 찾아낸 빈틈은 “충분한 규범적 개입”1)의 부족, 즉 ‘변혁의 방향’ 차원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기존 연구의 이러한 빈틈을 메우기 위해 스테파니와 줄리아가 개발한 것이 바로 CF_SET, “미시 수준의 개별적 변화 과정들을 거시 수준의 더 광범위한 시스템의 변화들과 연결하기”2) 위한 개념 틀이다(〈그림1〉 참조).
CF_SET에서 거시 수준은 SET의 규범적 ‘목표’를 표시한다. 목표는 두 가지다 ― 생태적 기능의 지속과 사회 구조의 심오한 변화. 지구 생태계의 파괴가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산업 문명에 의해 가속되고 있는바, 이 생태계가 지속가능하려면 생태계 파괴의 원인인 인류 사회 구조가 온통 변화해야 한다. 이 수준의 변혁은 기존 구조에 도전함으로써 세대 간, 세대 내 불평등과 부정의를 극복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세대 내 불평등과 부정의는 공시적 차원의 문제이며 세대 간 불평등과 부정의는 통시적 차원의 문제로서 이 목표는 공간과 시간을 씨줄과 날줄로 삼는 통합적 정의 실현 성취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시 수준은 SET을 위한 변화 프로세스들이 지닌 변혁적 성격이 드러나는 수준이다. 이 수준에서는 변화를 향한 구체적인 ‘행동’이 일어난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들은 정의롭고 회복탄력성이 있으나 기존 패러다임 밖에서 발생한다. 그 예로는 로컬과 지역 공간 규모로 전개되는 사회 운동, 사회적 기업, 시민사회 이니셔티브, 행위자 네트워크 등을 들 수 있다.
〈그림1〉 사회-생태 변혁을 위한 개념 틀(CF_SET)3)
여기서 문제는 미시 수준과 거시 수준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느냐에 있다. 미시 수준의 구체적 변화 프로세스들이 거시 수준의 규범적 목표와 어떻게 상호작용할 수 있을까? 열쇠는 중간 수준에 있다.
힘/권력의 배치는 제도를 통해 이루어진다. 변화를 위한 실천들은 제도를 통해 기존의 패러다임을 거슬러 구조적 변화의 상황을 형성하는 힘/권력으로 작용하고, 다시 이렇게 변화된 구조는 역시 제도를 통해 변혁적 성격을 지닌 변화 프로세스들을 촉진하는 행동 형성의 힘/권력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힘/권력의 작용이 선순환함으로써 미시 수준과 거시 수준이 연결되며 SET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물론, 중간 수준은 일종의 ‘복잡한 중간’(messy middle)일 수 있다. 돌파구를 찾기 어려운, 그래서 불확실성과 불안으로 인해 회의주의에 빠지기 쉬운 공간일 수 있다. 따라서, 관건은 어떻게 제도가 불확실성과 무기력함을 넘어서는 힘/권력의 역할을 할 수 있느냐가 될 것이다.
2. ‘탈성장’을 CF_SET의 거시 수준에 위치시키기
기후-생태 위기 대응을 위한 기존의 연구 프로그램들이 CF_SET의 거시 수준에 충분히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 중요한 원인으로 차마 포기하지 못하는 ‘성장주의’를 지목할 수 있다는 사실은 기후-생태 위기 대응을 위한 사회-생태 변혁의 거시적 지향을 어떻게 구체화해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한다. 여기서 관건은 성장주의를 어느 정도까지 포기할 것이냐다. 이른바 탈동조(decoupling)와 탈성장(degrowth) 논쟁이다.
지속가능발전목표(SDGs)는 물론 ‘그린 뉴딜’ 류의 주요 골자를 이루는 ‘탈동조’란 계속 성장주의를 추구하면서도 환경 압력은 줄여나가도록 할 수 있다는 의미다. 단적으로, 성장하면서도 온실가스는 줄여나갈 수 있다는 주장이다. 탈동조주의자들은 효율성과 생산성의 향상이 물질・에너지 사용의 축소를 가져온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이 가정은 제본스의 역설(Jevons Paradox)에 의해 반박될 수 있다. 제본스의 역설이란 “자원을 이용해 효율성을 높이는 기술 변화는 자원 소비율을 낮추는 게 아니라 오히려 높”5)이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심리적으로 효율성이 높아지면 물질이나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만, 오히려 접근성이 확대되어 소비가 더 높아지게 된다.
탈동조는 CF_SET의 거시 구조 내에서 사회 구조의 심오한 변화에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만 끝나지 않고, 그 결과로 생태적 기능의 지속 또한 가능하지 않게 한다. 하지만, 기후위기 상황에서 사회 구조의 변혁은 생태적 지속가능성을 보장할 정도로 진행되어야 한다. 인류 사회와 지구 생태계는 그 어느 때보다 긴밀하게 되먹임(feedback) 구조로 연동되어 있어서, 한쪽의 변화는 다른 쪽의 변화를 촉발하면서 전체 생태계 시스템의 준평형 상태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 이런 식으로 성장주의는 CF_SET의 거시 구조가 지향하는 두 기둥, 즉 생태적 기능의 지속과 사회 구조의 심오한 변혁 양쪽 모두에 걸림돌이 된다.
그렇다면, 성장주의 자체를 벗어날 수 있는 방향으로의 전환을 모색해야 한다. 이러한 모색 중 하나가 바로 ‘탈성장’이다. 성장주의와의 결별을 위해 탈성장은 GDP 기반의 풍요 관념에서 벗어나 사회적이고 생태적인 가치 영역을 확대해 나가고자 한다. 그런데, 이렇듯 탈성장이 성장주의와의 완전한 결별이라면, “최종적으로 시스템 전체를 바꿀 필요가 있다.”6) 그리고, 만일 사회 시스템 전환이 탈성장의 최종 목표라면, 기후-생태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이 바로 현재의 사회 시스템임을 고려할 때, 탈성장은 CF_SET의 거시 수준에서 사회 구조의 심오한 변화를 이끌어갈 강력한 개념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우선, 탈성장은 ‘생태적 기능의 지속’과 무리 없이 연결될 수 있다. 또한, 안전, 정의, 공정을 통해서 생명 세계 내 모든 존재의 복지를 추구한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세대 내/세대 간 정의 실현도 추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럼, 이제 더는 긴 말 할 것 없이 탈성장을 향해 가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정말 이것으로 끝인가?
CF_SET의 거시 수준을 형성함에 있어 완벽할 것만 같은 탈성장인데, 그 앞을 ‘탈성장 딜레마’가 막고 나선다. ‘탈성장 딜레마’란 탈성장의 심각한 난제를 가리키는 말로, 그것을 현실화하기는 힘들다는 대중적 인식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멋진 꿈인들 무슨 소용인가? 탈성장이 CF_SET의 거시 수준에 놓여 SET의 목표가 될 경우, 그 어느 때보다 거시 수준과 미시 수준의 역동적 연결 문제가 대두한다.
탈성장 딜레마는 기존 사회 구조로부터 새로운 사회 구조로의 전격적인 변혁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확인케 한다. 탈동조는 지금까지 인류가 쌓아온 가장 성공적인 체제, 즉 기술 혁신을 통한 성장주의 체제를 통해 기후-생태 위기 또한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기반으로 한다. 그 체제가 기후-생태 위기의 근원적 원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잘할 수 있는 일을 더욱 잘하기만 하면, 우리가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일을 해낼 수 있을까?
이 대목에서 한번 현실주의와 이상주의를 통전시키는 길을 찾아보자. 이는 탈동조가 지배적인 상황에서 앞으로 탈성장 논의의 방향이 어떻게 되어야 할지를 고민하는 것과 같다. 첫째, 탈성장이 CF_SET의 거시 수준으로 설정되는 경우 거시 수준과 미시 수준의 거리를 해소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둘째, 그 대안으로 탈동조와 탈성장의 통합적 접근을 수용한다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서로 연결되어 있는 이 두 문제는 모두 CF_SET의 중간 수준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문제로 수렴한다고 할 수 있다. 중간 수준이 거시 수준과 미시 수준의 매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물론, ‘탈성장과 탈동조의 통합적 접근’이 왜 거시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중간 수준의 문제일까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이유는 명백하다. 일반적으로 탈동조는 CF_SET의 거시 수준을 충분히 만족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앞에서 이미 확인했다. 따라서, 탈동조를 거시 수준에서 논하기는 어렵다. 다만, 이 개념이 국가 간/국가 내 정책과 제도를 통해 구체화되어 왔고 지금도 진행 중이므로, CF_SET에서 고려할 수 있는 영역은 중간 수준이다. 즉, 탈동조의 제도적이고 정책적인 측면이 중간 수준에서 고려되는 것이 합리적이다.
결국, 탈동조와 탈성장의 통합적 접근 문제는 거시 수준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형성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기후-생태 위기 시대에 이러한 통합적 접근을 통해서 어떻게 ‘사회-생태 변혁’(SET)을 성취할 것이냐 하는 이행의 방법론 문제로 다루어야 한다. 이제 탈동조+탈성장은 중간 수준과 거시 수준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관련되며 변혁의 방법론을 형성할 수 있는지의 문제가 된다. 어떻게 탈동조의 정책과 제도를 통해 탈성장의 사회-생태 구조로 이행할 수 있느냐의 문제라는 말이다. 즉, 거시 수준과 관련하여 중간 수준을 어떻게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하느냐가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탈동조의 제도적이고 정책적인 요소들을 중간 수준에 배치해서 다룰 때, 이것이 어떻게 탈성장이라는 거시 수준의 지향과 통합될 수 있을지를 거시 수준과 미시 수준의 매개로서의 중간 수준이라는 차원에서 묘사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어떻게 하면 이 제도로부터 새로운 제도로 넘어갈 수 있을까? 이 질문을 움켜쥐고 신학으로 무대를 옮겨보자. 신학은 이 질문에 무엇으로 답할 수 있을까? ‘메시아적인 삶’이다.
3. 메시아적 삶의 정치적 구조: 탈동조와 탈성장의 연계를 위한 시론(試論)
메시아적인 삶이 어떤 삶인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성서의 본문은 고린도전서 7장 29~31절이다. 이 본문에서 핵심은 ‘마치 ~이 아닌/없는 것처럼’이라는 권유다. 이 세계에 속해 있지 않은 것처럼 이 세계에 속하는 삶. 이 세계의 외형(형식)을 입고 있지만 그 외형(형식)에 좌우되지 않는 삶. ‘마치 ~이 아닌/없는 것처럼’은 종말과 지금의 삶과의 관계를 명확하게 한다. 종말에 대한 대망으로 현재가 헛되게 소비되거나 포기되는 게 아니라, 고난스러운 현실 속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냄으로써 오히려 현재가 새로운 의미와 가치로 풍성하게 된다. 종말에 대한 예감이 오히려 현재의 삶을 가득 채우는 잠재력이 되는 것이 바로 ‘메시아적인 삶’이다. ‘메시아적인 삶’은 이 세상을 떠나서 살아갈 어떤 삶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 속에서 살아내는 삶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메시아적인 삶’은 사회 구조에 관한 성찰과 비판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정치와 관련된 것이며 그 삶이 기거하는 시간으로서의 메시아적 시간은 역사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대상이다. ‘마치 ~이 아닌/없는 것처럼’은 적어도 기독교 신앙에 들어선 이들에게는 역사 안에서 자기 자신과 긴장 상태에 놓이도록 한다. ‘메시아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지금의 시간을 메시아적인 시간으로 받아들여 매 순간을 소중하게 산다. 역사 안에서 역사에 충실한 삶을 살아간다. 어떻게 충실하게 살아가는가? 이 세상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여건과 상황 속에 있으면서도 그러한 여건과 상황을 넘어서서 새로운 의미와 가치로 변화시키며 산다. 이것이 바로 ‘마치 ~이 아닌/없는 것처럼’ 사는 삶, 자기 자신과의 긴장 속에서 사는 삶이다. 이 긴장이 기존의 의미와 가치가 그 형식을 유지함에도 더는 효력을 갖지 않도록 한다. 이렇듯 기존의 의미와 가치는 효력이 정지되고 새로운 의미와 가치가 획득되는 방식은 깊은 자기 성찰이 기존의 사회적 형태에 대한 성찰로 확장하는 혁명적인 삶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마치 ~이 아닌/없는 것처럼’이라는 메시아적인 삶의 태도가 제시하는 방식이다.
중간 수준에서 문제가 무엇이었던가를 다시 상기해보자. 현재의 제도와 정책이 변화하기란 쉽지 않기에, 사회-생태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회의주의와 열패감에 빠지기 쉽다는 문제였다. 그렇기에, 현재의 제도와 정책이 힘의 선순환을 이루면서 사회-생태 변화에 참여함으로써 스스로를 변모해 갈 수 있도록 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요청된다. 메시아적인 삶의 양식은 이를 가능케 하는 방법을 제공할 수 있다. 메시아적인 삶은 현재의 일상적인 삶이 갖추고 있는 형식을 유지하면서, 그 형식이 기존에 추구하던 내용을 멈추고 새로운 내용을 실현해 나가는 삶이기 때문이다. 기왕의 제도와 정책을 따르면서, 그 제도와 정책의 부조리를 성찰적 접근을 통해 멈추어 내고, 새로운 정책과 제도로의 이행을 위한 절차를 새로운 정책과 제도를 향한 목표 속에서 밟아나가는 것. 이것이 ‘마치 ~이 아닌/없는 것처럼’의 태도로 중간 수준에서 메시아적인 삶의 양식을 실현하는 길일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제도와 정책의 지난한 변모 과정을 기존의 제도와 정책 속에서 정치적이고 혁명적인 방식으로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마치 ~이 아닌/없는 것처럼’은 현세적 시스템이 실질적으로 효력을 끼치지 못하게 만들고, 그래서 그 시스템의 지속이 형식적으로는 유지되나 기존의 영향력은 폐지되도록 한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제도와 정책이 새로운 제도와 정책으로 이행할 계기를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메시아적인 삶의 양식을 갖춘 힘(권력)은 현재 또는 기존의 제도와 정책하에서라도 구체적인 실천들과 사회-생태 변화를 매개하는 실질적인 힘이 된다.
바울의 ‘메시아적 삶’의 구조에 대해 오늘날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해석학적 자원이 사회-생태 변혁을 위한 기획과 이론에 일정한 역할을 할 가능성을 탐구하는 작업은 생태학과 생태신학 모두에게 새로운 지평을 연다고 할 수 있다. 일종의 지평 융합 형태로 말이다. 생태학은 ‘긴장’이라는 개념을 통해 생태계가 갖는 자기 생성성을 스스로의 이론에 적용할 수 있는 여러 풍부한 경로 중 가치 있는 하나의 ‘깊은’ 경로로서 기독교 문해력의 힘을 빌려올 수 있다. 또한, 바로 이 동일한 과정을 통해 생태신학은 변증과 독백의 길을 벗어나 기독교 문해력의 힘을 제공함으로써 실제적 사회 변혁에 동참하는 구체적 이론으로 거듭날 수 있다.
1) Stephanie Sievers-Glotzbach and Julia Tschersich, “Overcoming the process-structure divide in conceptions of Social-Ecological Transformation: Assessing the transformative character and impact of change processes,” Ecological Economics 164(2019), Article 106361.
2) Ibid.
3) Ibid.
4) Ibid.
5) 자코모 달리사, 페데리코 데미리아, 요르고스 칼리스 엮음/강이현 옮김, 『탈성장 개념어 사전』 (홍성: 그물코, 2018), 219.
6) 사이토 코헤이/김영현 옮김,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기후위기 시대의 자본론』 (고양: 다다서재, 2021), 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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