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봄, 기획 기사] 인간은 결코 예외적 존재가 아니다(양권석)

2024-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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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결코 예외적 존재가 아니다

 

양권석(제3시대 이사, 성공회대학교)

 


인간중심주의의 문제

 

우리 시대를 가리키는 인류세와 자본세와 같은 말들 속에는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분위기가 가득하다. 지구와 인간문명의 우호적인 관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신호가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다. 인간 문명에 대한 공감과 진보에 대한 낙관이 그 근본에서 흔들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인류세라는 말은 인간이 다른 인간이나 비인간과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담고 있는 말이다. 지금까지 맺어 온 지구와 인간문명의 관계, 동물이나 식물이나 다른 사물들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인간이라는 말의 범주에 속한 인간과 그렇지 못한 인간의 관계가 더이상 지탱 불가능하다는 절박한 호소다. 한 마디로,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간에 대한 인식 그 자체를 근본적으로 재고하라는 요청이다. 다른 인간은 물론이요, 다른 모든 피조물들을 차별적으로 분리하고 배제해 온 인간중심주의를 향한 도전이 그 어느 때보다 급진적이고 근본적이다.

 

인간, 곧 근대적 주체는 자신 밖의 다른 피조물들이나 이웃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확인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는 이웃과 자연환경으로부터 분리된 예외적 존재이기를 추구한다. 그래서 그가 가진 자유나 지식이나 기술은 이웃과 자연환경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권리이거나 능력이다. 그의 눈에는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 성이 다른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은 아직은 그가 생각하는 인간의 범주 밖에 있다. 모든 비인간 생물들과 사물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은 모두 인간 삶의 외부에 있는 것이며, 그래서 인간의 삶에 어떤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도 없고, 주게 해서도 안 되는 것이며, 착취와 이용의 대상들일 뿐이다.

 

정복주의, 착취주의, 식민주의, 인종주의, 홀로코스트, 자원 채굴주의, 생태 파괴주의가 모두 같은 죄로부터 나왔다는 말은 바로 이런 뜻이다. 결국 우리 시대의 생태사회적 위기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이와 같은 인간중심주의, 혹은 인간예외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과 함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학의 인간중심주의 비판

 

우리 시대의 과학은 인간은 예외적인 능력을 가진 존재도 아니고,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고 분리될 수 있는 존재도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내고 있다. 동물학자들이나 식물학자들을 포함한 생물학자들은 인간의 지적 능력, 인간의 예술적 창조성, 인간의 문화형성 능력이라는 것도 인간만의 고유한 것이거나 예외적인 것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능력이나 정도에 차이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그 차이들은 오히려 연속성을 말하는 것이지 불연속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과 동물 사이, 인간과 식물 사이의 경계선은 서로를 근본적으로 분리하는 선이 아니라 오히려 연속적으로 서로 얽혀 있음을 보여주는 선이라고 말하고 있다.

 

물리학자들은 가장 작은 물질도 그리고 거대한 우주도 죽어 있는 사물이거나 그런 사물들의 배치나 모임이 결코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물리학자 카렌 바라드는 물질은 그 가장 작은 조각이나 단위에서도, 결코 죽어서 고정되어 영원히 있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물질세계의 영원한 운동이 그 가장 작은 물질 조각 안에 들어와 있고, 그래서 스스로도 그 영원한 변화의 리듬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모든 살아있는 것들처럼 물질도 유한한 생명을 갖는다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인간과 동물, 인간과 식물, 인간과 물질은 물론이요, 물질과 정신 역시 결코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서로 관계적으로 얽혀 있다는 것이 과학의 통찰이다.

 

인간 자신을 생각해 보아도, 인간을 다른 모든 생물과 무생물로부터 분리해서 바라보거나, 모든 피조물들 중에 예외적인 위치에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인간은 10%만 인간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다시 말해, 인간을 구성하는 100조 개 가까운 세포 중에 단 10%만 인간 세포라는 말이다. 이 주장이 아무리 과장된 것이라 할지라도, 인간은 결코 단일한 생명체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인간은 무수한 다른 생명들이나 물질들이 들어와 함께 살고 있는 복합체다. 카렌 바라드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 몸의 물질성 안에, 무한한 우주의 운동이 들어와 있고, 그 몸의 물질성이 이미 우주의 영원한 변화의 리듬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과학은 인간중심주의나 인간예외주의가 불가능함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을 모든 동물과 식물과 물질로부터 분리시켜 독립적인 위치에 놓으려는 시도에 골몰해 왔던 것이다.

 


성서적 인간중심주의 비판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 안에는 무수한 다른 표현들이 있는데, 왜 하필 “지배”와 “정복”으로 그 모든 것을 요약하고 읽어내야 했을까? 창조의 과정에서 새롭게 생성되어 나오는 피조물을 향해서, 그렇게 감탄하던 창조자가, 지배하고 정복하고 착취하는 적대자의 위치에 인간을 세우기 위해서, 인간을 하느님의 형상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모순 아닌가? 우리는 왜 창조를 무로부터의 창조라고 읽었을까? 창세기를 다시 읽어보면, 창조자가 무엇인가를 낳아라, 혹은 생성해 내라고 하면, 그것에 정말로 응답하고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땅이고 물인데, 왜 사람만이 하느님 창조의 협조자일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인간, 아니 인간 전체가 아니라 특정한 인간들, 그들의 예외적 위치를 향한 정복적 식민주의적 욕망이 성서를 인간중심주의적으로만 보게 했던 것일 수 있다. 인간을 하느님의 형상이라고 했던 것은, 특정 범위의 인간들을 노예로 구별해 내는 제국의 착취적 질서에 대한 저항이었다. 배제하고 버리기 위해서 예외를 만드는 질서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래서 하느님의 형상이 말하는 저항은 배제와 분리에 대한 저항이며, 특권적 예외 만들기와 착취적 예외 만들기 모두에 대항한 저항이었다. 그것은 특정한 인간들의 범접할 수 없는 위치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넓고 더 깊이 더 아래로 얽히고 관계하기 위한 저항이었다.

 

예언자 호세아의 예언처럼, 사람도, 땅도, 동물도 식물도 모두 함께, 탄식하며 고통받고 있는 시대다. 생태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 분리 불가능하게 얽혀 있다는 것이 더욱 명확하게 보이는 시대다. 이제 인간중심주의적으로 텍스트와 삶과 실천을 바라보던 시각을 그 근본에서부터 문제삼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호세아가 말하는 탄식과 고통의 그 얽힌 실상은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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