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스파티우무스(Homo Spatimus?)들을 위해서

황용연(제3시대, 사회적 소수자 선교센터 무지개센터)
1.
저는 저에 대해서 농담반 진담반으로 "직업상으로도 예수쟁이"라고 소개하곤 합니다. 그러니 "호모 렐리기오수스", "종교적 인간"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직업"상으로도 할 말이 있어야 하는 사람인 셈인데요. 이렇게 글을 쓰게 되면 보통 어느 정도 그 다음 말을 예측하실 겁니다. 예측하시는 대로,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직업"상으로도 할 말이 있어야 하는 사람이란 건 변하지 않으니 뭔가 말을 붙이려고 한다면, 종교라는 게 무엇이다라고 말하기는 무척 어렵고, 종교라는 말이 어떻게 쓰이는 것 같다라고 말을 하면 그나마 조금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2.
종교 내지는 거기에 '적'자를 붙여서 종교적이라는 말이 쓰일 때는 이 글의 독자분들에게 익숙한 불교, 이슬람, 원불교, 그리스도교 등등의 소위 제도 종교를 두고 쓰이는 경우도 있고 그 제도 종교 밖의 현상을 두고 쓰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양쪽의 어느 경우든지 대체로 '종교'라는 말을 쓰게 되면, 그 현상의 강도와 밀도가 상당히 크고 강하다는 뉘앙스가 깔려 있지 않은가 합니다. 어떤 원칙이랄지, 태도랄지, 선망이랄지, 그런 것들을 끝까지 밀어붙이면서, 그에 따라 제도 종교 바깥의 현상인 경우에는 제도 종교처럼 어떤 의례까지 만들어 낼 정도도 되는 그런 강도와 밀도를 가진 현상들 말이지요.
여기서 한 가지 짚을 것은 종교(적이)라는 말은 그 강도와 밀도의 존재를 지시하는 말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고 보인다는 것입니다. 즉 그 강도와 밀도의 방향이 긍정적이거나 혹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거나를 보장하는 말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종교(적이)라는 말이 나올 때 그 말이 지칭하는 대상은 보통 한 글자 차이나는 다른 감정의 대상이 됩니다. 경외 아니면 경멸.
3.
방금까지 이야기한 강도와 밀도 외에 또 하나 종교(적이)라는 말에 대해서 덧붙여야 할 말이 있다면 그 말이 긍정적으로 쓰일 때는 새로운 무엇이 나타날 거라는 기대를 담고 있다는 점일 겁니다.
그런데 그 '새로운 무엇'이라는 게 과연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에 대해서 이런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흔히 '새로운 무엇'이라고 하면, 특히 그게 종교(적이)라는 차원에서 이야기될 때는, 뭔가 지금의 세계를 완전히 대체하는 천지개벽과 같은 무엇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을 것 같은데요. 오히려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무엇'이란, 그런 천지개벽으로 세상이 어제까지와는 다르게 완전히 뒤집어지면서 나타난다기보다, 세상 전체는 어제까지처럼 오늘도 내일도 돌아가더라도 곳곳에 작은 틈새가 생겨서 그 틈새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란 말입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이 못 미치는 구역에 생기는 틈새가 있기도 하고, 세상 돌아가는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이려니 오히려 거기서 역설적인 기능 정지가 발생해서 생기는 틈새가 있기도 하고 말입니다.
4.
원고청탁 주제 중에 "호모 렐리기오수스"라는 라틴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한번 맞춰 보겠다고 제목에 나와 있는 것처럼 호모 스파티우무스라는 엉터리 라틴어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라틴어로 틈이란 말이 뭔지 찾아 봤는데 spatium이란 말이 있더군요.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우리의 삶에서 '새로운 무엇'이 틈새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고 그 '새로운 무엇'이라는 게 어떤 의미로 쓰든지 간에 '종교'라는 말이 쓰일 때의 핵심이라면, 특히 세계를 변혁하기를 원하는 이들의 종교성이란 그 틈새를 통해서 경험하는 '새로움'이 지금의 세계를 견디는, 혹은 개기는 동력이 되는 그런 현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내가 찾아낸/찾게 된 틈새와 네가 찾아낸/찾게 된 틈새가 서로 이어져서 틈새가 좀 더 넓어지기도 말입니다. 틈새를 찾아낸/찾게 된 "너와 내"가 생명을 가진 존재인 이상 틈새 찾기와 넓히기는 아마도 앞에서 강도와 밀도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처럼 끝까지 이어질 수밖에 없겠고 말입니다.
ⓒ 웹진 〈3era〉
호모 스파티우무스(Homo Spatimus?)들을 위해서
황용연(제3시대, 사회적 소수자 선교센터 무지개센터)
1.
저는 저에 대해서 농담반 진담반으로 "직업상으로도 예수쟁이"라고 소개하곤 합니다. 그러니 "호모 렐리기오수스", "종교적 인간"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직업"상으로도 할 말이 있어야 하는 사람인 셈인데요. 이렇게 글을 쓰게 되면 보통 어느 정도 그 다음 말을 예측하실 겁니다. 예측하시는 대로,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직업"상으로도 할 말이 있어야 하는 사람이란 건 변하지 않으니 뭔가 말을 붙이려고 한다면, 종교라는 게 무엇이다라고 말하기는 무척 어렵고, 종교라는 말이 어떻게 쓰이는 것 같다라고 말을 하면 그나마 조금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2.
종교 내지는 거기에 '적'자를 붙여서 종교적이라는 말이 쓰일 때는 이 글의 독자분들에게 익숙한 불교, 이슬람, 원불교, 그리스도교 등등의 소위 제도 종교를 두고 쓰이는 경우도 있고 그 제도 종교 밖의 현상을 두고 쓰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양쪽의 어느 경우든지 대체로 '종교'라는 말을 쓰게 되면, 그 현상의 강도와 밀도가 상당히 크고 강하다는 뉘앙스가 깔려 있지 않은가 합니다. 어떤 원칙이랄지, 태도랄지, 선망이랄지, 그런 것들을 끝까지 밀어붙이면서, 그에 따라 제도 종교 바깥의 현상인 경우에는 제도 종교처럼 어떤 의례까지 만들어 낼 정도도 되는 그런 강도와 밀도를 가진 현상들 말이지요.
여기서 한 가지 짚을 것은 종교(적이)라는 말은 그 강도와 밀도의 존재를 지시하는 말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고 보인다는 것입니다. 즉 그 강도와 밀도의 방향이 긍정적이거나 혹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거나를 보장하는 말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종교(적이)라는 말이 나올 때 그 말이 지칭하는 대상은 보통 한 글자 차이나는 다른 감정의 대상이 됩니다. 경외 아니면 경멸.
3.
방금까지 이야기한 강도와 밀도 외에 또 하나 종교(적이)라는 말에 대해서 덧붙여야 할 말이 있다면 그 말이 긍정적으로 쓰일 때는 새로운 무엇이 나타날 거라는 기대를 담고 있다는 점일 겁니다.
그런데 그 '새로운 무엇'이라는 게 과연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에 대해서 이런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흔히 '새로운 무엇'이라고 하면, 특히 그게 종교(적이)라는 차원에서 이야기될 때는, 뭔가 지금의 세계를 완전히 대체하는 천지개벽과 같은 무엇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을 것 같은데요. 오히려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무엇'이란, 그런 천지개벽으로 세상이 어제까지와는 다르게 완전히 뒤집어지면서 나타난다기보다, 세상 전체는 어제까지처럼 오늘도 내일도 돌아가더라도 곳곳에 작은 틈새가 생겨서 그 틈새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란 말입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이 못 미치는 구역에 생기는 틈새가 있기도 하고, 세상 돌아가는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이려니 오히려 거기서 역설적인 기능 정지가 발생해서 생기는 틈새가 있기도 하고 말입니다.
4.
원고청탁 주제 중에 "호모 렐리기오수스"라는 라틴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한번 맞춰 보겠다고 제목에 나와 있는 것처럼 호모 스파티우무스라는 엉터리 라틴어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라틴어로 틈이란 말이 뭔지 찾아 봤는데 spatium이란 말이 있더군요.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우리의 삶에서 '새로운 무엇'이 틈새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고 그 '새로운 무엇'이라는 게 어떤 의미로 쓰든지 간에 '종교'라는 말이 쓰일 때의 핵심이라면, 특히 세계를 변혁하기를 원하는 이들의 종교성이란 그 틈새를 통해서 경험하는 '새로움'이 지금의 세계를 견디는, 혹은 개기는 동력이 되는 그런 현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내가 찾아낸/찾게 된 틈새와 네가 찾아낸/찾게 된 틈새가 서로 이어져서 틈새가 좀 더 넓어지기도 말입니다. 틈새를 찾아낸/찾게 된 "너와 내"가 생명을 가진 존재인 이상 틈새 찾기와 넓히기는 아마도 앞에서 강도와 밀도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처럼 끝까지 이어질 수밖에 없겠고 말입니다.
ⓒ 웹진 〈3e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