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겨울, 기획 기사] ‘철구’는 말했다(김정원)

2023-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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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구’는 말했다


김정원(여름교회, 성공회대 박사과정)

 

지난 7월에 열린 퀴어퍼레이드가 기억에 남는 이유는 폭우 때문이었다. 아니다, 철구 때문이었다.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퀴퍼 옆 또 하나의 공간. 그곳에는 여성가족부 폐지와 차별금지법 반대 집회에 참여한 신남성연대 멤버들이 들어찼고 거기에는 철구도 있었다. 20대 남성들의 불편한 정서가 온라인이 아닌, 공론장에서 집단적으로 외쳐지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었기에 발을 멈추고 잠깐 들여다보았다. 퍽 안전해진 나의 삶의 자리에서는 만날 수 없는 저기의 저 존재들이 참 많이도 왔더라. 무대에 오른 철구와 배인규는 외쳤다. “인간의 성별은 무엇으로 나뉘나요?”, “남자와 여자입니다”, “이제 그렇게 말하면 처벌받습니다! 이게 바로 차별금지법, 분별금지법입니다.” 사람들의 함성은 내게 자극적이었고 비에 젖어 추운 건지 소름이 돋아 추운 건지 모를 일이었다.

 

대중정치의 극우적 이념화는 사회구조적 불평등에 대한 정치적 대응이 약화한 상태에서 드러난다.1) 그러니까 내가 광장에서 본 것은, 사회적 불평등을 사회에 까발리는 것을 대신하여 중심과 주변부를 경계지음으로써 불평등을 회피하려는 ‘탈진실’한 대응 방식이었던 것이다. 성평등이 젠더갈등으로 둔갑되고 있는 것이 암만 정치 전략이라 한들 대체 왜 그리도 젠더에만 빠져있는 것인지. 혹자가 내게 한 조언, “젠더 그거 그만 해~ 젠더 너무 하면 못 써~”를 돌려주고 싶어진다. 그들 대부분도 (예비)노동자가 아니겠는가. 그들 역시 자본주의 질서 안에서 임금에 매여 사는 몸뚱이들일 것이다. 근무 형태 역시 기간제, 파견, 단시간, 비정규 등 여러 형태의 차등/별적 상황에 처하게 될 텐데,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임금 격차를 줄여준다는 그 법을 그토록 반대하면 어쩌란 말인가. 불안정 고용에 시달리는 우리네와 뭐 얼마나 다르겠는가. 이런 뒷담화도 있긴 하다. 자본가나 정치인에게는 따져 물을 만한 처지가 못 되니 가장 만만한 여성들을 족치는 거라는. 속이야 좀 후련할지는 몰라도 이런 인상비평은 단절을 강화시킬 뿐인 걸 안다. 잠재적 범죄자란 말에 화가 났다는 이들도 적잖다. 애초 그 서사의 시작은 양자 간의 확연한 힘의 차이를 감안한, 그리고 여전히 압도적으로 여성이 폭력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었다. “남성 모두를 범죄자로 들씌우는 것은 차별 아니냐?”라는 언사들이야말로 허세 쩌는 정치적 올바름 아니겠는가.

 

한창 ‘블랙 라이브스 메터(Black Lives Matter)’ 운동이 미국 전역에 일었을 적에, 어떤 이들은 ‘올 라이브스 메터(All Lives Matter)’를 외쳤다. 이때 버틀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올 라이브스 메터’라고 말하는 것은 흑인들이 겪은 노예 제도나 흑인 생명 경시에 나타나는 역사를 보지 않으려는 태도이다. 비무장 흑인들을 죽이고도 경찰이 무죄가 되는 일이 왜 일어날까? 배심원들이 그 행동이 옳다고 여겨서라기보다는 흑인이 위협이 되는 존재라고 합리화하기 때문이다. 백인 사회를 중심에 둔, 백인들의 안전을 위한 선택이다. 경찰 시스템은 이와 함께 돌아간다. 백인들의 목숨이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올 라이브스 메터’는 바로 이러한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외침인 것이다.”2)

 

‘올 라이브스 메터’처럼 역차별과 같은 언어들은 남성들의 사회가 유지되지 못할 두려움에서 오는 것이다. 여성들의 인권과 목숨 역시 중요하겠다만 그보다는 계속 작동되는 가부장적 질서가 무너질까 하는 노심초사로 인한, 그리고 남성들에게만 불공정한(이라고 믿는) 기회 불평등의 불안감에서 오는 정치적 올바름의 옷을 입은 변명인 것이다. 그런 소리를 정치적 올바름이라고까지 정성스럽게 쓰고 있는 지금, 순간 자괴감이 들지만, 여성,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를 소환하여 계속해서 혐오를 쏟아내는 이들과 페미니즘을 말하는 이들은 존재론적으로 확연한 차이가 있다. 진정한 혁명은 왕의 목을 친 때가 아니라, 오래된 관습과 체제에서 배제돼온 존재들이 새로운 질서를 상상하는 바로 그때 도래한다고 한다.3) 왕은커녕 약자들 목이나 치고 앉아 있지 말고, 공정의 냄새도 풍기지 않는 이 ‘공정사회’에 대고 따져 물어 달라. 또 하나의 약자로 살아가는 자신을 위해서라도 새로운 질서를 상상해 보자. 따로 또 같이, 아니 따로…….


‘다양성’만큼 진부한 말이 어디 있던가. 그럼에도 가독성 떨어지는 글에 대한 두려움에 ‘젠더해체’보다는 다양성을 요청함으로써 글을 마무리해 본다. 다양성이란 말은 사실 빨주노초파남보가 함께 있다기보다는 모두가 빨간색인데, 그 속에 하나 있는 노란색을 눈여겨보는 것이다. 큰 것 속에 작은 것, 힘이 센 것 중에 약한 것들을 위해 우리 사회에 등장한 언어인 셈이다. 진부하지만 다양성은 매우 어렵다. 빨간색이 점하고 있는 우위를, 빨간색이 만들어 놓은 위계를 포기하는 데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멍 난 양말을 결정하는 것은 구멍일까? 양말일까? 하얀 캠퍼스에 찍힌 점 하나. 그 그림을 결정하는 것은 하얀 바탕일까? 눈에 띄는 점 하나일까? 그냥 양말인 것 같지만, 구멍이 작게 났다면 그것은 구멍 난 양말이다. 큰 캔버스가 흰색으로 꽉 차 있더라도, 그 까만 점 하나를 빼고는 그 그림을 다 말할 수 없다. 결국 차별 없는 세상은 빨주노초파남보가 각기 상대주의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넘어, 전체 속에 점 하나, 굳건한 것 속에 작은 구멍 하나를 발견하는 세상이다. 약자들이 여성만으로 구성되지 않듯, 남성도 늘 강할 수 없다. 그러니 맞서 싸우는 소수자들에게 욕하지 말라. 페미니스트들에게 미친년이라고도 하지 말고. 그렇게 대단하게 각성된 존재들이라면 약자들에게 모든 혐의를 뒤집어씌우는 가장 쉽고 비겁한 방법을 쓰면 되겠나. 그래도 우리 당분간은 공론장에서 마주치는 일은 없도록 하자.



1) 홍찬숙, 「청년의 무엇이 ‘성평등 프레임에서 젠더갈등과 공정성 프레임으로’ 변화한 것인가?」, 『젠더리뷰』 62, 한국여성정책연구원, 2021.

2) George Yancy and Judith Butler, 「What’s Wrong With ‘All Lives Matter’?」, The New York Times, 2015.1.12. https://archive.nytimes.com/opinionator.blogs.nytimes.com/2015/01/12/whats-wrong-with-all-lives-matter/

3) 오혜진,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 오월의봄,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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