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여름, 기획 기사] 변방에서 민중-신학하기(정나진)

2022-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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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에서 민중-신학하기

 

정나진(함부르크대학 상호문화신학 박사과정)

 

‘민중으로서의 탈북여성’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가장 선교하고 싶은 대상은 북한(사람)이고 그래서 그들은 북한선교를 위한 물적 자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북한에 직접 갈 수 없기 때문에 주로 탈북자를 대상으로 선교를 하고 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아주 미비하다.

 

나는 한국교회의 북한선교, 탈북자 선교가 실패하는 이유를 역사적, 사회학적 분석을 통해 돌아보고, 탈북여성을 돌봄노동이라는 여성 외국인노동자로서 고통을 겪는 지구화시대의 민중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에 와서도 이데올로기로 인해 분단된 국가의 특수성 속에서 차별과 배제를 겪는 민족 민중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주로 인터뷰와 민족지를 통해 질적연구를 하는 동안 또한 탈북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해방의 면모를 발견하며 한국교회의 선교 대상이 아니라 대화 파트너가 되는, 행위주체(Agency)로서의 탈북여성을 조우하고 기술하고 있다.



독일에서 민중신학을 한다는 것

 

얼마 전 독일교회 소속의 한 선교회에서 ‘현대 한국사회에서 민중신학의 영향’이라는 주제로 발제를 부탁받았다. 나는 그동안 독일에서 7,80년대 이후의 민중신학에 대한 소개가 거의 없어서 답답했던 터라 기꺼이 발제를 맡았지만, 참석한 이들에게 ‘만약 당신들에게 현대 독일사회에서 독일신학의 영향에 대해 묻는다면 뭐라 대답할 수 있는가’ 하고 되물었다. 민중신학의 당대성에 대한 논의는 90년대 이후 우리 안에서도 끊임없이 있어 왔던 것이고, 한국 파트너쉽의 날에 한국에 관심 있는 이들이 모여서 하는 세미나여서 그들의 한국과 민중신학에 대한 관심이 고맙기도 했지만, ‘현대 한국사회에서 민중신학의 영향’이라는 거대담론적 주제는 한국에 대해서도, 그리고 민중신학에 대해서도 판타지와 무시라는 양극화된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이 가득한 태도에서 나온 것 같아서 배알이 꼬였다.

 

나는 당신네들의 의구심에서처럼 혹은 당신네들의 기대와는 달리 민중신학이 예전 같지 않을 수 있다고, 예전처럼 민중신학자가 한국의 대표적인 지식인이 아닐 수도 있고, 민주화처럼 한국사회를 크게 변화시킬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민중신학의 문제가 아니라 탈근대 이후의 계몽주의적 지식(인)의 퇴조와 지식의 탈개인화로부터 비롯되는 전지구적 현상이며 이러한 세계 속에서 우리(신학자, 지식인, 교회 등)가 가야할 방향을 민중신학으로부터 배웠으면 한다고 조언하며 발제의 제목을 ‘변방에서 민중-신학하기’로 정했다. 3세대 이후의 민중신학의 한국사회에서의 역할의 하나로 ‘비판담론’으로서의 민중신학을 소개하고 그러한 민중신학은 단순히 정치신학을 넘어선 ‘문화정치적’ 신학이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민중들의 삶의 자리인 ‘변방’에 있어야 함을 이야기했다.

 


변방으로 가보자

 

‘변방에서 신학하기’라는 개념은 이들에게 아주 낯선 이야기는 아니다. WCC 부산총회에서 32년만에 발표된 새 선교선언문 ‘함께 생명을 향하여 : 지형변화 속의 선교와 전도’에는 ‘변방으로부터의 선교(Mission from the margin)’라는 컨셉이 제안되어있기 때문이다. 새 선교선언문에서의 ‘변방’은 단지 지리적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북반구에서의 그리스도교의 쇠퇴와 남반구에서의 부흥이 ‘지형변화’를 의미하는 것이긴 할 것이나, 선교선언문은 분명히 ‘변방’이 단지 지리적 공간을 넘어서는 ‘권력의 변방’임을, 그 권력의 변방에 어떤 ‘성령의 역사’가 있는지를 주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미 선교의 주체로서 ‘변방의 존재’들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신학담론의 하나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는 (적어도 독일 신학계 내에서는) 문제시하고 있는 듯 하다. 그것은 마치 개념화되지 않은 ‘민중’이라는 단어에 대해 지금까지도 의심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또한 ‘변방’이라는 공간을 명명하는 것이 중앙과 변방을 이분법화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 것이 아니냐는 문제제기를 하기도 한다. 나는 이러한 서구신학의 태도가 지금까지 자신을 중심으로 사고했던 이들의 한계임을 지적하고, 변방에 가 변방의 존재들에게 배울 것을 제안했다.


 

변방의 민중신학자

 

변방은 중심의 반대말이 아니다. 그것은 소수성의 반대말이 다수성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변방은 단순히 중심에 의해 타자화되고 위계화된 ‘주변’이라는 대타성의 공간 혹은 그러한 실체의 속성이 아니라, 척도 바깥의 실존, 지배적인 체계 ‘반대편’에 있기도 하지만 또한 그것을 ‘넘어서’ 있는 역설의 은유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그래서 소수성의 짝은 다수성이 아니라 ‘생성’이라고 말했다. 언제든 어디서든 척도를 비스듬히 빗겨나감으로써 현행화되는 힘이라는 것이다.1) 예를 들면 『천의 고원1』에서 이야기하는 ‘여성-되기(devenir)’가 그러한 것일 것이다. 여성은 그들이 갖고 있지 못한 것의 생성을 가능하게 하면서만 창조할 수 있으며, 그들 스스로 그 생성 속으로, 여성-되기 속으로 들어간다. 이러한 여성-되기는 남자와 여자 모두를 포함하는 인간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변방에서 민중-신학하기’는 거칠게 말하면 변방을 객체로 볼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러한 변방의 존재-되기, 소수자-되기를 통해 창조와 생성의 일에 동참하는 아이디어이다.

 

변방의 시야는 중앙에서 보는 시야와 다른 많은 것들을 보게 한다. 그렇기에 민중을 증언하고 해석할 수 있는 장소이고 비판담론으로서 변방의 존재들에게까지 뻗친 교묘하게 은폐된 권력을 분석할 수 있는 자리이다. 더불어 ‘변방에서 신학하기'는 한편으로는 변방의 존재들을 증언하고 해석하는 일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변방이라는 공간과 그 존재들이 가지는 다른 시각과 해방/구원을 발견하는 일이다. 그들에게 주류언어를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언어(고통)를 (통해서) 배우는 일이다. 초기 민중신학이 (역사의) 주체(Subject)로서의 민중을 호명하였다면, 그래서 한편으로는 민중을 낭만화하였다면, 지금의 민중신학은 그들의 행위주체성(Agency)과 행위주체로서의 임파워먼트를 발견해내면서 단순히 희생자 혹은 영웅으로서 타자화하지 않고 이분법화하지 않는다.

 

독일인들에게 민중신학자들이 씨름하고 있는 현 시대 민중신학의 구체적인 컨텍스트들과 개념 몇 가지를 소개하면서 나는 사실 지금의 민중신학자들은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이미 변방의 자리에 있다고 말했다. 그이들은 더 이상 교수가 아니며, 취직과 연애와 결혼을 포기한 청년들이며 열정페이를 요구받는 비정규직들이며, 그 열정페이의 일부로 학자금을 갚아나가고 있는 가난한 이들이며, 남성중심의 교회권력과 싸우며 교회 안의 성폭력으로부터 미투운동을 벌이는 여성들이며, 현재 한국교회가 가장 혐오하는 동성애자이고, 미칠 듯이 오르는 주택임대비용에 서울 중심으로부터 변방으로 밀려가는 방랑자들이다. 중심에서 보면 민중신학은 한국사회에 그렇다할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포스트 3세대, 혹은 4세대로 불리우는 현재의 민중신학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민중의 삶의 자리인 변방에서 민중사건을 직접 목도하고 살아내며 신학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민중신학의 현재적 쟁점’이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변방에서 민중-신학하기’라고 말했으나 써놓고 보니 실은 험난한 세파에도, 남의 욕망을 욕망하지 않으며 오롯이 민중신학자로서 변방에서 ‘살아남기’가 우리들의 가장 현실적이고도 어려운 현재적 쟁점이 아닌가 한다.



1)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의 고원 1』, 이진경 외 옮김, 연구공간 너머, 2000, 1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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