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여름, 활동가의 글쓰기] 민중신학의 ‘민중’ 용어로 본 장애운동(유진우)

2022-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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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신학의 ‘민중’ 용어로 본 장애운동


유진우(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민중신학의 태동과 장애운동의 태동


민중신학자 최형묵은 민중신학이 “60년대 말과 70년대 초 한국의 정치사회적 배경”에서 등장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서남동의 말을 빌려, “민중신학의 출발은 ‘전태일 사건’과 ‘김지하의 시’라는 두 가지 계기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하였다. ‘전태일 사건’은 1970년 청계피복에서 노동하던 전태일이 노동삼권을 외치며 평화시장에서 분신자살한 사건이며, ‘김지하의 시’는 민중의 현실에 대한 지식인의 자각을 대표한다. 이러한 두 계기를 기반으로 하여 신학자들은 민중의 삶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1)

 

민중신학이 전태일 사건과 김지하의 시를 계기로 형성되었다는 사실은, 민중신학이 ‘사건’에 초점을 맞춘 신학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기존의 기독교 신앙/신학은 사건과 분리된 채 예전과 기독교 교육, 신과 개인의 관계 및 기복신앙을 중심으로 신앙/신학을 형성하는 데 집중했다. 하지만 민중신학은 민중의 ‘사건’으로 시선을 옮겨 현장을 바라보고, 민중의 고통이 어디에서 기인하는가를 탐구했다.

 

장애운동은 2001년 1월 오이도역 추락 참사를 계기로 태동했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시 만들어 진 지 6개월밖에 안 된 신설 수직형 리프트를 장애인 노부부가 귀성길에 이용하다가 추락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장애인이동권연대가 결성되어 진상규명을 위해 활동하게 된다. 하지만 서울교통공사는 이를 ‘개인’의 잘못이라고, 기계결함 때문에 일어난 사고라고 일축했다. 이 사건에 대해 서울시도 정부도 사과하지 않았고, 모두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로 일관했다.

 

국가의 방관과 무시로 장애인이 생명을 잃게 된 사건인 오이도역 추락 참사로 인해 장애인들은 집 밖으로 나와 지하철 철로에 내려갔고 지하철을 막으며 장애인 이동권을 보장하라고 외치면서 투쟁을 시작하였다.

 

그렇다면 민중신학의 ‘민중’이라는 언어와 그러한 언어 규정을 통해 생기는 의미는 무엇인가? 오이도역 사건을 계기로 장애운동이 형성되었다면, 장애운동을 하는 장애인을 민중신학이 말하는 ‘민중’으로 볼 수 있을까?

 


장애인을 민중신학적 의미의 민중이라 규정할 수 있는가


민중신학자 황용연은 1970년대에 민중이라는 용어가 가졌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민족이라는 가치에 균열이 나고, 그 균열의 당사자 중 한 명이 권력을 잡았으나 피해자가 발생하는 상황에서, ‘권력자를 대체할 수 있는 주체’라는 의미를 ‘민중’이 부여받았다는 것이다.2) 이를 고려할 때, 민중의 의미는 사회의 변동에 따라, 각각의 사회가 가진 문제에 따라 바뀔 수 있다.

 

또 다른 민중신학자 김희헌은 “서남동이 민중을 가리켜 단순히 ‘서민대중’이라고 표현하였듯이, (…) 피지배집단 즉,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정치적으로 억압받으며 사회적으로 착취를 당하지만 문화적 역사적으로는 풍요롭고 강력한 생명력을 지닌 집단”3)이 민중이라고 밝힌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민중이 사회적으로 착취당하는 반면 문화적·역사적으로는 풍요롭고 강력한 생명력을 지닌다는 점이다.

 

두 민중신학자의 민중을 바라보는 관점은 비슷하다. 민중은 사회적으로 억압받고 차별받고 있으며,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고, 사회에서 소외되어있다 하더라도 문화적·역사적으로는 풍요롭고 강력한 생명력을 지닌 집단이다. 민중신학자들은 이러한 민중이 겪는 고통을 방관하는 것이 아닌, 고통에 참여하는 것이 민중신학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민중신학적 관점에서 장애인을 민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일단 황용연이 설명한 민중의 함의를 참고한다면 장애인은 민중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장애를 바라보는 관점은 크게 두 가지로, ‘의료적 관점’과 ‘사회적 관점’이 있다. 전자는 장애를 ‘개인’이 극복해야 할 문제로 간주하며, 재활을 통해 ‘정상인’의 몸으로 만들어가는 것을 추구한다. 후자는 장애를 개인이 극복할 문제로 보지 않고, 장애를 둘러싼 ‘비장애중심적인 사회환경’이 문제라는 점에 초점을 맞춘다. 현재는 후자의 관점으로 장애를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2001년 오이도역 사건으로 인해 장애인이 겪는 사회적 차별이 가시화되었다. 참사 당시 관계부처에서 대응한 방식과 달리, 이 사건은 개인의 잘못이나 기계결함이 아니라, 장애를 둘러싼 ‘비장애중심적인 사회구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오이도역 사건이 일어난 이듬해에도, 그리고 올해까지도 같은 사건은 재발했다. 이미 투쟁을 통해 이명박 전 서울시장에게 2004년까지 지하철 엘리베이터 100% 설치, 박원순 전 서울시장에게 2022년까지 지하철 1역사 1동선 100% 설치 등의 약속을 받아냈지만, 이 약속들은 모두 지켜지지 않았다. 특정 개인의 잘못이나 기계결함이 원인이었다면 왜 같은 참사는 계속해서 발생하고, 약속은 이행되지 않는가? 이러한 사실들은 한국사회의 비장애인중심주의가 얼마나 공고한지를 말해준다.

 

민중신학이 말하는 민중의 힘은 고난을 스스로 이겨내고 사회를 전복시키는 힘이다. 이는 장애인이 처한 사회적 차별의 상황에서 장애인 스스로가 그 상황을 전복시킬 힘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기도 한다. 이처럼 민중에게 내재한 역능에 대한 민중신학적 사유를 장애운동에 대입하면 장애인이야말로 잠재력을 지닌 주체임을 알 수 있다. 장애운동은 2001년부터 현재까지 21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는 장애인들이 21년 동안 행해진 무수한 사회적 차별을 겪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장애인 스스로 비장애인 중심 사회를 전복하는 투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장애운동이 이루어낸 성과 중 이동권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투쟁을 통해 지하철 역사에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고 저상버스와 장애인콜택시가 도입되었다. 김희헌이 말했듯 억압과 착취의 구조에 놓여있으나 문화적·역사적으로 풍요롭고 강력한 생명력을 지닌 집단이 민중이라면, 장애인이 바로 그러한 집단인 것이다.

 

하지만 아직 장애운동이 갈 길은 멀다. 지하철 역사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어도 여러 문제점들이 있고, 저상버스의 비율은 전국적으로 30%에 그치는 정도이며, 특별교통수단인 장애인콜택시 역시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관리하면서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어 이를 해결하는 투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렇듯 장애인은 스스로 사회를 전복시키는 운동을 계속해서 이어나가고 있다.

 


시민과 비시민


현재 민중신학은 시민과 비시민에 주목하고 있다. 황용연은 시민과 비시민을 “민주화 시대의 대중과 권력의 관계, 그리고 이 대중과 권력의 관계에서 생산되는 사회적 배제를 고찰하는 핵심 고리에 놓인 단어”4)라고 말한다. 그리고 “표준 시민은 자신들의 ‘상식’을 따르고 있고, (…) 이 ‘상식’이란 말은 그것이 의문의 여지없는 당연한 표준이 되어야 한다는 뉘앙스를 갖고 있지만 정작 그 ‘상식’의 내용은 모호하다”5)고 지적한다. 시민들은 자신이 정해 놓은 ‘상식’을 지키기만 한다면 비시민이 과격한 투쟁을 하더라도 가만히 둔다. 하지만 누군가 자신들이 정해 놓은 ‘상식’의 선을 넘는 순간, 상대를 혐오하고 그들의 투쟁을 저지한다. 이러한 현상은 장애운동 현장에서도 목격할 수 있다.

 

현재 장애운동은 기획재정부에 장애인권리예산 보장을 요구하는 투쟁을 진행하고 있다. 장애인권리예산에는 이동권, 교육권, 노동권, 탈시설 권리 예산이 포함된다. 이를 스스로 쟁취하기 위해 장애인들은 지하철을 연착시키면서 권리와 예산의 보장을 요구한다. 장애인들이 지하철을 연착시키는 것은 그동안 장애인을 배제해 온 ‘자본주의 시간’을, ‘비장애인의 시간’을 멈추는 것이다. 장애인을 배제하는 체제에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행동인 것이다. 이러한 투쟁을 진행하다 보면 표준시민들의 혐오의 말들이 들려온다. 자신들이 정해 놓은 ‘선’을 넘어오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빨리 출근해서 일해야 하는, 일 분 일 초가 돈으로 계산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구성원답게 스스로 시간을 벌라는 말을 하거나, 장애인이면 집에나 있지 왜 나와서 난리냐는 말, 그보다 더 직설적인 말을 내뱉는다.

 

지하철 연착은 표준시민에게는 비상식이며,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자체가 표준시민에게는 비상식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수호하는 ‘상식’은 모호하며, 누가 정해 놓은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이다. 나아가 그들이 주장하는 상식이야말로 비상식적이다. 하지만 비시민으로 낙인찍힌 장애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의 투쟁을 이어나간다. 이렇듯 장애인은 표준시민이 규정해 놓은 상식에 균열을 내는 시간, 더 이상 우리를 배제하지 말고 함께 살자는 말을 하는 시간을 만들고 있다.

 

 

민중신학, 장애인도 민중이다.


이렇게 민중신학의 민중 용어를 통해 장애인이 민중임을 밝혀 보았다. 장애인은 21년 전이나 현재나 민중이다. 장애인들은 사회적 차별을 겪고 있고, 스스로 차별을 전복시키고 있으며, 표준시민의 ‘상식’에 균열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장애인들은 투쟁을 이어가면서 자본주의에, 비장애인 중심 사회에 균열을 낼 것이다. 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몸으로, 언어로, 행동으로 사회의 모순을 밝혀가면서 모두가 함께 살기 위한 사회를 만들어 갈 것이다. 민중신학 또한 장애운동을 민중신학의 한 영역으로 생각하고 장애인 투쟁을 연구하고 장애인 투쟁에 함께 했으면 한다.



1) 최형묵, 「민중 현실을 증언하는 신학이 태동하다.」, 뉴스앤조이, 2005.10.21.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3558

2) 황용연, 「민중신학에서의 민중 용어의 작용에 대한 연구」, 『신학사상』 190호, 한신대학교 신학사상연구소, 2020, 425-426쪽.

3) 김희헌, 「민중신학이란 무엇인가?」, 에큐메니안, 2009.05.28. http://www.ecumen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6525

4) 황용연, 앞의 글, 442쪽.

5) 위의 글, 4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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