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 이대남, ‘볼모’로 잡힌 건 바로 당신이라구”
『급진의 20대』를 읽고

아아(Cafe de 3era 바리스타)

한일전, 한중전, 감옥빵, 상식과 비상식의 싸움으로 일컬어진 대선도 벌써 한 달 남짓 지났다. 애써 부정하지도 않았지만, 다른 이들과 대등하게 ‘후보’로 불렸던 그가 이제 ‘당선인’으로 홀로 호명되는 것을 보니 대선 결과가 새삼 실감이 난다. 주변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민주당의 열렬한 지지자인 아빠는 비통한 나머지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던 걸까, 한동안 티비를 보지 않았다고 한다. 지난 대선에서는 민주당을 선택했지만 이번에는 국민의힘을 택한 친한 형은 정권교체를 이뤘으니 앞으로 5년 간은 큰 걱정이 없을 거라고 말한다. 이번에도 진보적 정당에 투표한 내 친구들은 예상보다 저조한 득표율에 멘붕인 듯하다. 이들의 정파적 입장은 저마다 다르지만, 대선 결과에 대한 반응은 비슷했다. “0.7% 차이밖에 안 났다고?” 오차범위 밖으로 앞선다던 여론조사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또한 10% 차이의 승리를 확신하던 이준석을 낯부끄럽게 할 만큼 선거는 치열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대선 후보들의 선거운동 양상은 이전과 사뭇 달랐다. 그들은 통합이나 융합으로 대표되는 훈훈한 봉합의 가치를 내세우기보다, ‘속내’를 가감 없이 드러내며 노골적인 적대의 전략을 사용했다. 대표적으로 국민의힘의 ‘세대포위론’은 2030, 6070세대의 세력 결집을 통해 (비교적 민주당 지지율이 높은) 4050세대를 설득하고 포위하겠다는, 혹은 그들에게서 얻지 못한 득표율을 만회하겠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설득은 온데 간데 없고, 적대만이 남았다. 통합이고 뭐고 갈길 알아서 가자, 어차피 우리가 이긴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이걸 확신한 게 아니었을까? 그들의 갈라치기는 세대에 대한 맞춤 공략이었을 뿐 아니라 젠더에까지 이어졌다. 이 전략에 의해 되려 패배할 수도 있었지만, 무튼 그들은 승리했다.
이대남은 주인공으로 호명되었다. 그들은 온라인에서든 거리에서든 세대포위론류의 여러 갈라치기 운동들을 선도했다. 그들은 환호했고 쾌감을 느꼈다. 우리는 이 일련의 과정들을 국힘으로부터 ‘선동당했다’고 독해할 수만은 없다. 그들은 선택했고 그들의 묵시를 대선에 이입했다. 그 묵시는 ‘정권교체’였다.
20대 대선이 이전과 무엇이 달랐냐며 반문할 수도 있다. 두 거대 정당의 대결구도, 정권교체나 정권수호 따위의 매번 비슷한 슬로건, 시장자본주의에 대한 무조건적 수용, 다양한 의제들을 정파적 정치로 환원시킨 정치지형의 거만함 등. 뻔하디 뻔한 양상은 여전했으며 구조적 변혁 또한 답보상태에 머물렀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삶을 둘러싸고 있는 거의 모든 조건들이 답보상태인데도 불구하고, 이번 대선을 통해 무언가 바뀌었다는 쾌감이 이대남의 공통감각이 됐다는 것이다.
그런 이대남은 대개 ‘덜 떨어진 놈들’로 간주되곤 한다. 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 이대남 현상을 뭔가 잘못 꼬여버린, 일시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고로 해결책은 ‘계몽’이나 ‘참회’ 정도로 제시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급진의 20대』1) 의 문제의식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20대 현상’을 논하는 대개의 문헌은 혐오 문제가 심각해진 원인을 무지와 그에 따른 ‘유예된 각성’에서 찾는 데서 멈춘다. (…) 이들이 우경화해서가 아니다. 이들의 공통된 주장은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다.”(41, 44)
이대남을 ‘우경화’로만 해석할 게 아니라, 그들이 천착하는 ‘공정’의 맥락을 들여다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이대남에게 이 사회는 왜 공정하지 않게 느껴졌을까? 일련의 사건들이 있었다. 조국사태, LH사태,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 인국공 정규직 전환 등. 이들에게 이 사건들은 감히 노력도 하지 않는 자들이 설치는 준범죄였다. 이를 계기로 현 정부에 대한 위선 프레임이 씌워졌고 응징하기 위해 그들은 결집했다. 그리고 여성, 소수자, 외국인, 불안정 노동자를 노골적으로 겨냥했다. 이렇게 그들의 혐오서사는 구축됐다. 저자 김내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혐오는 우울과 불안의 원인을 의인화된 특정 집단에서 찾는 스토리텔링의 산물이다.”(62)
그럼 우리는 이제 이대남들의 ‘우울과 불안의 원인’을 규명하여 개선하면 되지 않을까? 우울과 불안은 대개 경제적 위기에서 촉발된다던데, 이를 해결하거나, 아니면 다른 요인을 찾아 혐오를 사라지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김내훈은 혐오의 원인이 개선될지라도 혐오가 유지되고 있는 실태에는 크게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포퓰리즘이란 민주주의를 위해 해결해야 하는 병리적 현상이 아닌 민주주의에 내재된 증상이라 말한다. 포퓰리즘은 공정과 같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상식이 위기에 처하고 의심을 받을 때, 이 공백을 채우기 위해 부상했으며, 이대남 현상이 그 실례라는 것이다. 그들은 공정과 상식을 위협하는 소위 ‘도둑놈’을 규탄하기에 이르렀고 마침 SNS에 게시된 슬로건에서 더할 나위 없는 ‘사이다’를 경험한다.
“여성가족부 폐지”, “시민단체 불법이익 전액환수”
이는 그들에게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었던 ‘공정’, 개인의 초연함을 발휘할 때 비로소 실현 가능한 ‘공정’을 지키기에 꽤나 만족스러운 슬로건이었다. 사회 따위는 공정한 개인을 상상할 때 불필요한 방해거리였기 때문에, 그들은 취업시장에서 할당제라는 ‘편법’을 쓰는 자들, 시장경제에 어떠한 기여도 하지 않는 자들, ‘정상시민’이 피땀흘려가며 낸 세금을 좀먹는 자들, 다시 말해 (그들에 논리에 의거해 표현하자면) ‘개인의 능력이 아닌 사회의 기능에 의탁하려는 자들’을 응징해야 했다. 그리고 “여성가족부 폐지”와 “시민단체 불법이익 전액환수”를 외치는 국민의힘은 응징을 실현해줄 최고의 아군으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갈라치기는 언제든지 진영을 옮겨 다닐 수 있으며, 의제나 공략층에 따라 새로운 울타리를 개발할 수도 있다. 그것이 바로 김내훈이 말하는 포퓰리즘이다. 그렇게 이대남들은 실은 개인이 아닌 ‘(타자화된)그들’과 ‘우리’를 함께 만드는 포퓰리즘에 의탁했다.
여기서 포퓰리즘이 ‘그들’과 ‘우리’를 함께 만든다는 점, 즉 포퓰리즘의 양가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내훈은 이러한 양가성을 갖는 포퓰리즘의 ‘정치적인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치적인 것’이란 공적 이익과 정의의 궁극적인 일치, 합일이 불가능함을 가리키며, 불화의 영속적 실천이자 정치 공동체의 최종적 통일의 불가능성이다. 합의와 질서에 포섭되지 않는 불화의 잉여, 요구와 갈등의 잉여는 주변화된 채로 언제 어디에나” 있다.(239)
이처럼 김내훈은 포퓰리즘 정치로 식별되는 ‘우리’ 안에도 불화의 잉여가 내재하므로, 포퓰리즘의 양가성이 급진적 상상력과 만난다면, 응징과 혐오로 점철돼 있는 정치를 급진적인 사회적 동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역설한다. 왜냐하면 포퓰리즘 정치의 양가성, 이를테면 포괄(우리)과 배제(그들), 합의와 불화, 통일과 갈등의 대비가 “협소한 정치적 상상력을 완벽히 벗어난 급진적인 상상력”(248)과 접선한다면 되려 “새로운 사회적 투쟁의 출발점이자 동력”(248) 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포퓰리스트가 이대남의 주력 의제를 떠나 다른 집단(또 다른 ‘우리’)과의 의기투합을 시도하며 그들을 포섭하려 한다 해도, 그것은 적어도 포퓰리스트의 배신은 아니지 않을까? 불화의 영속성을 감내하며 그들의 정치의 영속적 실현을 위해 또 다른 아군을 물색하는 것. 포퓰리즘의 정치적인 것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불화의 잉여’가 사회를 바꿀만한 급진적인 상상력과 접선하는 게 아니라 공허하게 비어있는 기표인 ‘공정’에 착륙하여 (반페미니즘 그룹이 “성평화”와 같은 위성 개념을 만들었듯이) 그 기표를 위선과 불공정을 응징할 규범으로 가득 채울 수도 있는 가능성. 그것이 포퓰리즘의 본색이면 본색이요 정치적인 것의 발현이기 때문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대선 국면에서 포착된 이대남, 포퓰리즘 정치에서 이대남은 무엇이었을까? 20대 대선의 승리를 위한 포퓰리스트의 ‘볼모’는 아니었을까? 이대남의 표도 절실한 여당을 ‘페미니즘-그들’로 고립시켜, 4050세대로부터 획득하지 못한 표를 충당하기 위해 대선 국면에서 한시적으로 기능하는 ‘볼모’. 다양한 정치 의제들을 자극적인 언사들로 공격하면서 ‘개인적 문제’로 환원시키는 전략을 위해 섭외된 ‘볼모’가 아니었을까? 그들은 결국 승리했지만, 그들이 ‘우리’로 결집된 계기였던 세대포위론류의 갈라치기 때문에 되려 되치기를 당할 뻔했다. 이제 대선은 끝났고 남은 건 이대남이다. 이 때문에 포퓰리스트 이준석의 ‘책임론’까지 불거지고 있는 지금, ‘이대남’이라는 ‘우리’는 ‘대선 이후’에도 지속될 수 있을까? ‘대선 이후’ 그들의 소집해제는 이미 점쳐진 결과가 아닐까. 마지막으로 이대남에게 한 마디 전하고 싶다. “어이 이대남, ‘볼모’로 잡힌 건 바로 당신이라구.”
1) 이하 이 책의 직접인용은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
ⓒ 웹진 <3era>
“어이 이대남, ‘볼모’로 잡힌 건 바로 당신이라구”
『급진의 20대』를 읽고
아아(Cafe de 3era 바리스타)
한일전, 한중전, 감옥빵, 상식과 비상식의 싸움으로 일컬어진 대선도 벌써 한 달 남짓 지났다. 애써 부정하지도 않았지만, 다른 이들과 대등하게 ‘후보’로 불렸던 그가 이제 ‘당선인’으로 홀로 호명되는 것을 보니 대선 결과가 새삼 실감이 난다. 주변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민주당의 열렬한 지지자인 아빠는 비통한 나머지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던 걸까, 한동안 티비를 보지 않았다고 한다. 지난 대선에서는 민주당을 선택했지만 이번에는 국민의힘을 택한 친한 형은 정권교체를 이뤘으니 앞으로 5년 간은 큰 걱정이 없을 거라고 말한다. 이번에도 진보적 정당에 투표한 내 친구들은 예상보다 저조한 득표율에 멘붕인 듯하다. 이들의 정파적 입장은 저마다 다르지만, 대선 결과에 대한 반응은 비슷했다. “0.7% 차이밖에 안 났다고?” 오차범위 밖으로 앞선다던 여론조사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또한 10% 차이의 승리를 확신하던 이준석을 낯부끄럽게 할 만큼 선거는 치열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대선 후보들의 선거운동 양상은 이전과 사뭇 달랐다. 그들은 통합이나 융합으로 대표되는 훈훈한 봉합의 가치를 내세우기보다, ‘속내’를 가감 없이 드러내며 노골적인 적대의 전략을 사용했다. 대표적으로 국민의힘의 ‘세대포위론’은 2030, 6070세대의 세력 결집을 통해 (비교적 민주당 지지율이 높은) 4050세대를 설득하고 포위하겠다는, 혹은 그들에게서 얻지 못한 득표율을 만회하겠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설득은 온데 간데 없고, 적대만이 남았다. 통합이고 뭐고 갈길 알아서 가자, 어차피 우리가 이긴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이걸 확신한 게 아니었을까? 그들의 갈라치기는 세대에 대한 맞춤 공략이었을 뿐 아니라 젠더에까지 이어졌다. 이 전략에 의해 되려 패배할 수도 있었지만, 무튼 그들은 승리했다.
이대남은 주인공으로 호명되었다. 그들은 온라인에서든 거리에서든 세대포위론류의 여러 갈라치기 운동들을 선도했다. 그들은 환호했고 쾌감을 느꼈다. 우리는 이 일련의 과정들을 국힘으로부터 ‘선동당했다’고 독해할 수만은 없다. 그들은 선택했고 그들의 묵시를 대선에 이입했다. 그 묵시는 ‘정권교체’였다.
20대 대선이 이전과 무엇이 달랐냐며 반문할 수도 있다. 두 거대 정당의 대결구도, 정권교체나 정권수호 따위의 매번 비슷한 슬로건, 시장자본주의에 대한 무조건적 수용, 다양한 의제들을 정파적 정치로 환원시킨 정치지형의 거만함 등. 뻔하디 뻔한 양상은 여전했으며 구조적 변혁 또한 답보상태에 머물렀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삶을 둘러싸고 있는 거의 모든 조건들이 답보상태인데도 불구하고, 이번 대선을 통해 무언가 바뀌었다는 쾌감이 이대남의 공통감각이 됐다는 것이다.
그런 이대남은 대개 ‘덜 떨어진 놈들’로 간주되곤 한다. 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 이대남 현상을 뭔가 잘못 꼬여버린, 일시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고로 해결책은 ‘계몽’이나 ‘참회’ 정도로 제시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급진의 20대』1) 의 문제의식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20대 현상’을 논하는 대개의 문헌은 혐오 문제가 심각해진 원인을 무지와 그에 따른 ‘유예된 각성’에서 찾는 데서 멈춘다. (…) 이들이 우경화해서가 아니다. 이들의 공통된 주장은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다.”(41, 44)
이대남을 ‘우경화’로만 해석할 게 아니라, 그들이 천착하는 ‘공정’의 맥락을 들여다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이대남에게 이 사회는 왜 공정하지 않게 느껴졌을까? 일련의 사건들이 있었다. 조국사태, LH사태,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 인국공 정규직 전환 등. 이들에게 이 사건들은 감히 노력도 하지 않는 자들이 설치는 준범죄였다. 이를 계기로 현 정부에 대한 위선 프레임이 씌워졌고 응징하기 위해 그들은 결집했다. 그리고 여성, 소수자, 외국인, 불안정 노동자를 노골적으로 겨냥했다. 이렇게 그들의 혐오서사는 구축됐다. 저자 김내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혐오는 우울과 불안의 원인을 의인화된 특정 집단에서 찾는 스토리텔링의 산물이다.”(62)
그럼 우리는 이제 이대남들의 ‘우울과 불안의 원인’을 규명하여 개선하면 되지 않을까? 우울과 불안은 대개 경제적 위기에서 촉발된다던데, 이를 해결하거나, 아니면 다른 요인을 찾아 혐오를 사라지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김내훈은 혐오의 원인이 개선될지라도 혐오가 유지되고 있는 실태에는 크게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포퓰리즘이란 민주주의를 위해 해결해야 하는 병리적 현상이 아닌 민주주의에 내재된 증상이라 말한다. 포퓰리즘은 공정과 같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상식이 위기에 처하고 의심을 받을 때, 이 공백을 채우기 위해 부상했으며, 이대남 현상이 그 실례라는 것이다. 그들은 공정과 상식을 위협하는 소위 ‘도둑놈’을 규탄하기에 이르렀고 마침 SNS에 게시된 슬로건에서 더할 나위 없는 ‘사이다’를 경험한다.
“여성가족부 폐지”, “시민단체 불법이익 전액환수”
이는 그들에게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었던 ‘공정’, 개인의 초연함을 발휘할 때 비로소 실현 가능한 ‘공정’을 지키기에 꽤나 만족스러운 슬로건이었다. 사회 따위는 공정한 개인을 상상할 때 불필요한 방해거리였기 때문에, 그들은 취업시장에서 할당제라는 ‘편법’을 쓰는 자들, 시장경제에 어떠한 기여도 하지 않는 자들, ‘정상시민’이 피땀흘려가며 낸 세금을 좀먹는 자들, 다시 말해 (그들에 논리에 의거해 표현하자면) ‘개인의 능력이 아닌 사회의 기능에 의탁하려는 자들’을 응징해야 했다. 그리고 “여성가족부 폐지”와 “시민단체 불법이익 전액환수”를 외치는 국민의힘은 응징을 실현해줄 최고의 아군으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갈라치기는 언제든지 진영을 옮겨 다닐 수 있으며, 의제나 공략층에 따라 새로운 울타리를 개발할 수도 있다. 그것이 바로 김내훈이 말하는 포퓰리즘이다. 그렇게 이대남들은 실은 개인이 아닌 ‘(타자화된)그들’과 ‘우리’를 함께 만드는 포퓰리즘에 의탁했다.
여기서 포퓰리즘이 ‘그들’과 ‘우리’를 함께 만든다는 점, 즉 포퓰리즘의 양가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내훈은 이러한 양가성을 갖는 포퓰리즘의 ‘정치적인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치적인 것’이란 공적 이익과 정의의 궁극적인 일치, 합일이 불가능함을 가리키며, 불화의 영속적 실천이자 정치 공동체의 최종적 통일의 불가능성이다. 합의와 질서에 포섭되지 않는 불화의 잉여, 요구와 갈등의 잉여는 주변화된 채로 언제 어디에나” 있다.(239)
이처럼 김내훈은 포퓰리즘 정치로 식별되는 ‘우리’ 안에도 불화의 잉여가 내재하므로, 포퓰리즘의 양가성이 급진적 상상력과 만난다면, 응징과 혐오로 점철돼 있는 정치를 급진적인 사회적 동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역설한다. 왜냐하면 포퓰리즘 정치의 양가성, 이를테면 포괄(우리)과 배제(그들), 합의와 불화, 통일과 갈등의 대비가 “협소한 정치적 상상력을 완벽히 벗어난 급진적인 상상력”(248)과 접선한다면 되려 “새로운 사회적 투쟁의 출발점이자 동력”(248) 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포퓰리스트가 이대남의 주력 의제를 떠나 다른 집단(또 다른 ‘우리’)과의 의기투합을 시도하며 그들을 포섭하려 한다 해도, 그것은 적어도 포퓰리스트의 배신은 아니지 않을까? 불화의 영속성을 감내하며 그들의 정치의 영속적 실현을 위해 또 다른 아군을 물색하는 것. 포퓰리즘의 정치적인 것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불화의 잉여’가 사회를 바꿀만한 급진적인 상상력과 접선하는 게 아니라 공허하게 비어있는 기표인 ‘공정’에 착륙하여 (반페미니즘 그룹이 “성평화”와 같은 위성 개념을 만들었듯이) 그 기표를 위선과 불공정을 응징할 규범으로 가득 채울 수도 있는 가능성. 그것이 포퓰리즘의 본색이면 본색이요 정치적인 것의 발현이기 때문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대선 국면에서 포착된 이대남, 포퓰리즘 정치에서 이대남은 무엇이었을까? 20대 대선의 승리를 위한 포퓰리스트의 ‘볼모’는 아니었을까? 이대남의 표도 절실한 여당을 ‘페미니즘-그들’로 고립시켜, 4050세대로부터 획득하지 못한 표를 충당하기 위해 대선 국면에서 한시적으로 기능하는 ‘볼모’. 다양한 정치 의제들을 자극적인 언사들로 공격하면서 ‘개인적 문제’로 환원시키는 전략을 위해 섭외된 ‘볼모’가 아니었을까? 그들은 결국 승리했지만, 그들이 ‘우리’로 결집된 계기였던 세대포위론류의 갈라치기 때문에 되려 되치기를 당할 뻔했다. 이제 대선은 끝났고 남은 건 이대남이다. 이 때문에 포퓰리스트 이준석의 ‘책임론’까지 불거지고 있는 지금, ‘이대남’이라는 ‘우리’는 ‘대선 이후’에도 지속될 수 있을까? ‘대선 이후’ 그들의 소집해제는 이미 점쳐진 결과가 아닐까. 마지막으로 이대남에게 한 마디 전하고 싶다. “어이 이대남, ‘볼모’로 잡힌 건 바로 당신이라구.”
1) 이하 이 책의 직접인용은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
ⓒ 웹진 <3era>